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 요한 1서 묵상 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요한 1서 3:1>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원수를 입양하여 아들을 만든 그 커다란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신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봤다면, 만약 유대인들이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봤다면 그들은 감히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이자 전능자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라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 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 했듯이 그들은 빛 가운데 걷는 우리를 미워할 것 입니다.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 그는 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형제를 죽였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한 1서 3:12~13>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 사람들의 소망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받고 성공하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 같게 되고 또 그분을 보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순결하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3:6>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요한 1서 3:9>
우리가 이 두 구절을 읽고 곧바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내가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아니지 않을까? 걱정 되지 않나요?
그런데, 9절 하반절에 보면,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난자가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5절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우리의 죄를 제거하려고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2장 처음에도 요한은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함이며, 죄를 지어도 우리는 화해 헌물이신 변호사로 인해 무죄가 된다고 얘기 합니다. 즉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수 없다라는 얘기는 단순히 우리가 죄 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뛰어 넘어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죄를 짓는게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3장 끝에 용서의 복음을 확인해 줍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할진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확신을 갖고 <요한 1서 3:20~21>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하셨으니 자유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분명히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얘기할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즉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면,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자유하게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성도가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자유하라는 것 입니다. 이 묵상이 극단적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이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이제 내 삶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이며 그들에게는 죄가 있을수 없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성도들이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얘기가 “나는 아무 행동이나 해도 죄가 없는 것이니까, 막 나가보자!” 라고 생각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는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막 살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나를 이끄시는데 어떻게 막 나가자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이 해석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분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우며 <요한 1서 3:7>
우리의 힘으로는 예수님 같이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 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으며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것 입니다.
그 십자가를 믿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빛 안에서 걸으며 내 죄를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이 먼저 주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속해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 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누구든지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느니라. <요한 1서 3:10>
요한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 즉 사랑하지 못한 사람의 대표로 가인을 내세웁니다. 가인은 누군가요? 자신의 제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동생인 아벨을 죽인 사람 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믿음이 아닌 자신의 의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성스레 준비한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기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격분해서 동생을 죽인 것 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미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 1서 3:15>
우리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