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나? 못들었나?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 보면 거의 대부분의 모순이나 오류들은 무리 없이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지식, 잘못된 기준, 당시 문화나 문학에 대한 오해를 통해 성경에 오류가 많이 있다고 주장 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박탈 당한 피터 엔즈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 입니다. 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세 가지의 사례를 자주 인용합니다. 첫번째로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여리고성, 두번째로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잔인한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행전에 기록되 있는 다메섹에서 있었던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한 모순을 지적 합니다. 첫번째 여리고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믿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욕심으로 인해 그 증거를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두번째 가나안 지역 사람들에 대한 학살 명령 역시 선이 무엇인지 도덕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피터 엔즈의 무지에 기인한 잘못된 논거 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들을 아래 링크를 드립니다. 오늘 글에는 마지막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장면에서 어떤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며 왜 그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다메섹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 기록했는가?
그와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은 음성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도행전 9:7>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참으로 그 빛을 보고 두려워하였으나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더라. <사도행전 22:9>
두 구절은 모두 누가가 쓴 사도 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구절에 어떠한 모순을 찾으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솔직히 없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말씀에 사도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즉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2장에서 얘기한 빛을 보았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빛은 보지만 사람은 보지 못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성만 듣는 것과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9장의 말씀에 사도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음성 즉 어떤 소리는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22장에서는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어떤 소리를 듣지만 동시에 그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멀리서 누군가에게 얘기했을때,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 말은 들었는데 잘 못들었어 다시 얘기해줘!” 라고 부탁한다면 이는 모순일까요? 혹은 어떤 소리는 들었는데, 그것이 바람 소리인지 사람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면 모순일까요? 그렇지 않겠죠. 첫번째 들었다는 것은 제가 어떤 말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인지한 것이고 두번째 얘기하는 잘 못들었다는 것은 제가 어떤 말을 했는지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지 않았다는 뜻 입니다.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만났을 때에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지하지 못하고 빛만 볼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 소리가 무엇인지도 예수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아들을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9:7과 22:9가 종합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며 그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오류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 동일한 상황
이런 식의 사건들은 성경에 자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내가 이미 그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곁에 서서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르기를,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하니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이 음성은 나 때문에 나지 아니하고 너희를 위해 났느니라. <요한복음 12:28~30>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의 때가 오신줄 아시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천둥 소리라고 하여 못 알아듣고, 어떤 사람들은 천사의 소리라고 합니다.
왜 누구는 알아듣고 누구는 알아듣지 못하는가?
사도 행전의 두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음성을 자신의 선택한 자들에게만 들려주신다는 것 입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있었고,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누군가는 메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누군가는 소리만 듣습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미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수 있지 않냐고 반문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질문 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기적을 일으키실 계획은 커녕, 한번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도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그 기적을 체험시키십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려 애쓰는가?
저는 피터 엔즈 같은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이 왜 이런 의미 없고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구절들을 오류라고 주장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평신도들도 발견 할 수 있는 말씀을 신학자가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왜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 말에 넘어가 동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식 수준에서 판단하려 드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기도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나의 이해를 뛰어 넘는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똑같은 성경을 보고도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 처럼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나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경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시면 우리는 그 어떤 진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베드로후서 1:20~2:1>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 안에서 말하였으되 그 안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므로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미리 알았은즉 저 사악한 자의 오류에 이끌려 너희도 너희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베드로후서 3:16~17>
겸손하게 말씀을 신뢰하고 성령을 통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시기를 권면드립니다.
저 역시 베드로후서의 말씀을 인용해 여러분들에게 권면 합니다. 여러분들은 수많은 교회사 기간 동안 성경을 왜곡하고 인간의 이해가 닿지 않는 부분을 부정하고 성경을 신화나 도덕책 정도로 인식했던 많은 사람들 나라들을 봐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수많은 선교사들을 보냈던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이제 교회가 몰락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질수 밖에 없는 나라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들을 미리 알았으니까 사악한 사탄의 오류에 이끌려 구원에서 떨어지지 마시고 믿음을 소유한 채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