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침례를 받으신 모세를 상징하는 예수님은 모세가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 다다른 것처럼 곧바로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출애굽 후 이스라엘의 실패를 갚아주십니다.
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로 들어가심을 기록하며 시작합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는 이유는 분명하게 사탄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이스라엘의 패배를 갚아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출애굽 시 이스라엘의 넘어짐을 갚아주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굶주리십니다. 그리고 육체의 괴로움이 극심한 상태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40일을 굶었다고 뭐 그래 괴로우셨겠냐고 질문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써 또 사람의 대표로써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100% 인간으로 시험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우리가 느꼈어야 하는 유혹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셨으며 인간으로써 이를 감당해 내셔야 했습니다.
그게 십자가 복음의 원리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써 모든 율법을 지키셔야 그 공로가 인간에게 전가 될 수 있었고, 인간을 위해 죄 삯을 대신 갚을 수 있으셨던 것이죠.
사탄은 철저하기 굶주린 예수님을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재밋는 점은 사탄이 직접 예수님께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말함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통해 2가지를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사탄이 인간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유혹을 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훨씬 더 쉽게 유혹을 하고 시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유혹 – 돌을 떡이 되게 하라
첫 번째로 사탄은 예수님께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굶주리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 먹을 것없어서 불만이 가득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는 장면과 비교되지 않나요?
출애굽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이라는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지었지만 사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네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2~3>
그리고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 굶주림을 해결하라는 사탄에게 신명기 말씀으로 대적합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4>
우리는 말씀이라고 하면 단순히 성경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저는 여기서 나오는 말씀은 우리가 읽는 성경을 넘어서는 어떠한 한 분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한복음 1:1>
그 분은 바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즉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빵으로 비유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데, 사탄은 영적인 의미를 가진 육적인 혹은 물리적인 비유를 그대로 육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48~50>
첫 번째 시험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적인 시험을 통과하심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성경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께서 주고 싶으신 영생에 대한 메세지를 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세의 역할을 담당하심과 동시에 모세가 줄 수 없었던 영생을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더 훌륭하고 높은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음으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갚아 주었습니다.
이제 사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예수님에게 뛰어 내리라고 말하죠.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를 주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편 91:11~12>
그러며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마태복음 4:6>
하지만 시편 91편의 말씀은 사탄의 해석과 다릅니다. 사탄은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구절 하나만 떼어와 엉뚱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로 피하는 사람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도와주실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탐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엄청나게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사 놓고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공급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이 시키신 일만을 하는 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 5:30>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과시하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복음서에서 꽤 여러번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리는 마리아에게, 장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을 드러내라는 형제들에게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며 거절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번에도 사탄의 요구를 거절하고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을 인용해서 사탄을 대적합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한 것 같이 그분을 시험하지 말라. <신명기 6:16>
즉 예수님은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실패를 되갚아준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만나를 먹고 난 후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마르고 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불평을 토해내고 심지어 모세를 돌로 쳐 죽일 기세로 다툽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그 바위를 치라고 말씀하시고 그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와 마시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그곳의 이름을 맛사와 므리바라 하였으니 그 까닭은 이스라엘 자손의 다툼 때문이요, 또한 그들이 주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하였기 때문이더라. <출애굽기 17:7>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중에 십자가에서 무저갱 즉 지옥으로 뛰어 내리셔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뒤집어 쓰고요… 그 때 예수님을 건져주신 분, 예수님의 발이 바위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의 혼인 잔치에서도 장막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은 이를 통해 영생을 설명하고 구원을 설명하기 바랬으며, 사탄은 비유대로 육적인 것으로 우리 시선을 가두려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유혹 – 세상을 모두 줄테니 사탄을 경배하라
마지막으로 사탄은 대놓고 자신을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육신의 연약함을 공격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말씀으로도 시험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모든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예수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하기를 바라고 결정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우리를 우리를 위해서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바꾸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탄을 말씀으로 대적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쓰러뜨렸던 사탄은 패배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모세이자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성취하는 모세보다 더 뛰어난 메시아로 성경의 독자들에게 조명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갚으시고 난 뒤
시험이 끝나고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사역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중심에 서고 싶어하며 그렇게 배워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한이 응답하여 이르되,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27~30>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기 시작하십니다. 이는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리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저주 받은 이 세상에서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소문을 듣고 또 직접 치유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자신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아오지 않습니다. 병든자, 귀신 들린자, 무언가 부족한자, 영으로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고침을 받고 채움을 받습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들 혹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내 스스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내가 높아지고 드러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곳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우리가 생각했던 천국, 승리, 다스림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