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종을 고쳐 달라고 했는가? – 성경의 오류?
성경에는 수 많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들이 나옵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수님을 놀라게한 믿음의 백부장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에 모순이 있다는 것 입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아 갔나요? 친구들을 보냈나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그분께 나아와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주여, 내 종이 마비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고통을 받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리라, 하시니 백부장이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사온즉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나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며 내 아래에도 군사들이 있어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그가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그가 오며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그가 그것을 하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놀라사 따르던 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내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5~10>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시더라. 이제 그분께서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이 친구들을 그분께 보내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친히 수고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나이다. <누가복음 7:6>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집으로 들어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음을 기록하고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같은 말을 했다고 기록 합니다.
백부장은 직접 예수님께 나간 것일까요? 아니면 친구들을 보내어 그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전해준 것일까요?
실제 사건은 백부장이 친구를 보낸 것이 맞습니다
결론 부터 말씀드리면, 이 구절들 사이에는 모순이 없지만, 다른 표현을 한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실제는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집에 오시지 말라고 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백부장이 직접 나가서 예수님께 말했다고 적었을까요?
우리는 너무 지금의 기준을 과거에 적용하는 버릇을 갖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생각이지만, 이는 역사 기록이나 성경 기록을 이해하는데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조선 시대에 당시에 없던 백성을 편하게 만들어 줄 최고 수준의 획기적인 농기구를 개발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곧 조정에 상소가 올라가게 될 것이고, 여러분이 만든 농기구에 대한 보고가 왕에게 올라갈 것 입니다. 그리고 왕은 그 농기구를 자신이 만든 것 처럼, 즉 자신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보급하게 될 것 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이는 지적 재산권 침해 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백성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역사서에 “최고의 농기구를 XX왕이 개발하셨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이를 오류나 거짓으로 여기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시의 역시 기록 관행이나 방법으로 보시겠습니까?
프루타르코스는 같은 상황을 어떻게 기록했나?
이런 일은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AD 52년에 로마는 폼페이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 했는데, 그는 특별한 법을 하나 세웁니다. 그것은 당시에 법정에서 피고인에게는 “엔코미엄” 이라는 찬사의 발언을 할 수 없게 한 것 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이 만든 법을 어기기 시작 합니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프랑쿠스를 위해서 자신의 대변인을 보내서 찬사의 발언을 대신 읽게 한 것 입니다. 프루타르코스가 쓴 인물전인 Life of Cato the Younger에서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하는데, 프루타르코스는 실제로는 폼페이우스가 아닌 대변인을 보냈음에도 자신의 책에 길고 불필요한 설명을 삭제하고 폼페이우스가 법정에 직접 가서 찬사의 발언을 했다고 기록 합니다. [^1]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을 대변하는 친구들을 보내었지만, 마태는 누가 가서 얘기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백부장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메세지를 전한것이 중요한 것이기에 백부장이 가서 얘기한 것 처럼 기록한 것 입니다. 실제로 누가 복음을 잘 읽어 보시면 친구들을 보내서 얘기했지만, 예수님께 얘기하는 화자가 백부장임을 아실 수 있습니다.
백부장이 친구들을 그분께 보내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친히 수고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주께 나아갈 자격도 없는 줄로 생각하였사온즉 오직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나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며 내 아래에도 군사들이 있어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그가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그가 오며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그가 그것을 하나이다, 하매 <누가복음 7:6~8>
이 말은 백부장의 친구들이 스스로의 의지나 자격으로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백부장의 대리인으로써 간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마치 법적인 중요한 서류에 서명을 할 때, 법적 위임장을 받은 사람이 서명을 했지만, 그것을 위임을 준 사람이 서명했다는 법적 효력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현대 전기와 고대 전기의 문학적 차이
성경은 어떠한 문학 장르에 속할까요? 자주 얘기 하다시피 성경은 역사책도 과학책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책 입니다. 하지만 이 복음서를 인간의 문학 장르에 가장 가깝게 구분한다면 고대 그레코로만 스타일의 전기(Ancient Biography) 일 것 입니다. 이는 근대 전기 (Modern biography)와는 다릅니다.
1 세기의 문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바와 21세기의 문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그 부분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잣대로 내용을 판단하려 한다면, 한 사람의 노력으로 피땀흘려 만든 귀한 발명품을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지적재산권 침해로 조선의 왕들을 도덕적으로 악한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복음의 메세지는 무엇인가?
이제 저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복음의 메세지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셨을까요? 무엇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을까요?
만약 여러분에게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그가 의사도 손을 못쓸 죽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소문에 기적으로 이런 병을 고친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부탁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아마도 집에 와서 자기의 아이를 보고, 만져주며, 혹시 못고치면 고치게 될 때까지 머무르게 하기를 바랄 것 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내 아들이 낫는 모습을 내 두눈으로 보기를 바랄 것 입니다.
구약 시대에 문둥병에 걸렸던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도, 멀리서 온 자신을 처다도 보지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담그라는 엘리야의 말에 자신을 안수하고 하나님께 기도라도 할 줄 알았다고, 화를 내며 그냥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주께 나아갈 자격도 없는 줄로 생각하였사온즉 오직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누가복음 7:7>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명성이나 행동이나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신뢰한 것 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아도, 예수님이 내 종을 고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내 종이 나을수 있다는 신뢰! 이 신뢰는 예수님 조차도 놀라게 한 이스라엘에서 결코 보지 못한 큰 믿음 입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을 놀라게 할 이스라엘에서 보지 못한 큰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