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하지 않으실 건가요? – 작은 불순종 그리고 커다란 순종의 결과들 1편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는 패배 했지만, 창세 전 부터 선택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까지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 까지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으며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봐도 불리한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전신 갑주를 입는 것 입니다.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악한 날에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을 입으며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하며 그것으로 능히 저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그 일에 깨어 있고 또 나를 위하여는 내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사 내가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의 신비를 알리도록 구하라. <에베소서 6:12~19>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전략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저 전신 갑주를 벗도록 흔드는 것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믿음을 얻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의를 행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절대 의존, 절대 신뢰, 절대 순종하게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되고 싶어 먹은 선악과로 인해 우리는 창조 때의 모습을 잃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진의를 흔들어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성경을 조롱하고 그것이 신뢰할만한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지식으로 그 근거들을 찾아 내려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 수많은 내용들이 바로그런 인간의 죄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믿고 순종한 사람들과 말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무시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아담과 하와 (창세기 3장)
우리가 왜 지금 이 저주 받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왜 불순종 했습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렇지 않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2) 노아의 방주 (창세기 7장)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홍수를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가 신화가 아니라는 증거 중의 하나는 방주의 비율 입니다. 1992년 한국 해양 연구 센터는 창조 과학회의 의뢰를 받아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해 시험을 했고, 최고 47m의 파고에도 견딜 수 있으며, 길이와 높이와 너비를 늘리거나 줄인 다른 12 척의 배와 비교 했을때, 최고의 복원 안정성, 파랑 안정성, 구조 안정성을 가진 배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소설이라면 3,500년전 고대의 소설가가 거대한 배를 어떻게 지어야 안전할 지 알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실제로 이 실험을 한 해양 연구소장님은 성경을 믿던 분이 아니였지만, 이 실험을 계기로 성경을 믿기 시작하여 간증을 다니기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노아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홍수를 시적 표현이나, 상징이나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순종하지 않고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아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던 세상에서 120년간 산 위에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조롱했을 겁니다. 미쳤다고 손가락질 당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또 만들다 말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이 바다에 빠져 죽었을 것 입니다.
두번째는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배를 짓지 않고 자기 멋대로 지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노아에게 배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설계도대로 만들지 않았다면, 배는 부서지거나 뒤집혔을 것이고, 역시 모든 생물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노아의 순종으로 인류와 많은 동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3)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며 아들을 주시고 그 뿐 아니라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를 믿는 것이 쉬웠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백성을 어떻게 훈련시켜 가시며 한 사람의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믿음을 얻고 순종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10여년이 지나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결국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실것임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이 100세때 즉 아브라함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가질수 없을 그 때에 약속했던 그대로 이삭을 주십니다.
4)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 (창세기 22장)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귀하게 얻은 자식을 죽여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 하십니다. 농담이었을까요? 상징이었을까요? 시적 표현이었을까요? 아니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 갑니다. 그리고 이삭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대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넌 왜 농담도 못알아듣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비유와 상징도 못알아채냐고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처럼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이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음으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내가 이제 아노라!”
그리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 번제물로 예비하신 양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창세기 22:18>
만약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을 것 입니다.
5) 벧엘로 가지 않은 야곱 (창세기 34장)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잠을 잡니다. 그곳에서 그 유명한 야곱의 사닥다리 꿈을 꾸고는 하나님께서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올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 후 라반과 함께 20년을 보낸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벧엘이 아닌 세겜의 도시 살렘에 정착하려 합니다.
그곳에서 야곱의 딸 디나는 히위 족속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오빠들이 히위 족속을 몰살 시켜 멸망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는 벧엘에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쫓겨나듯 벧엘로 갑니다.
20년전 잊어버릴 수도 있었던 작은 약속에 순종하지 않은 댓가로 야곱과 그 가족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습니다.
6) 파라오에게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모세 (출애굽기 4장)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꿈을 꾸었던 모세는 살인을 하고 파라오에게 쫓김을 받아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자로써 자신의 일생이 끝나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잊지 않으셨고 그에게 나타나 많은 이적을 보여주시며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내십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지금 양이나 치던 광야의 목자를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던 파라오에게 보내 명령하게 하는 것이 믿기는 일이며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게다가 모세는 그 파라오에게 죽을뻔 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거부하자 불같이 분노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을만한 이유로 인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고 그것을 인정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의 상식을 뛰어 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7)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파라오 (출애굽기 7장)
당대 최고의 권력,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파라오에게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히브리인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이집트에 대재앙을 내릴것이라 경고하십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이렇게 말합니다.
파라오가 이르되,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하매 <출애굽기 5:2>
파라오에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신이 역병을 일으키고 칼로 덮친다는 말이 이해도 안되고 상상도 안되는 말이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은 댓가로 파라오와 이집트는 완전히 파멸하게 됩니다.
8)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른 히브리인 (출애굽기 12장)
하나님은 이집트에게 10번째 재앙으로 장자를 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먹고 그 피를 양 옆 기둥과 위의 문 기둥에 뿌리라고 명령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왜 양이나 염소의 피를 문기둥에 바르면 장자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이해한 사람이 있을까요?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었을까요? 하지만 이를 순종하고 지킨 사람들의 장자는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은 시적인 표현도 상징적인 의미도 아니였고, 문자 그대로 지켜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순종이 성경에 남아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해 줍니다.
9) 한 오멜 (출애굽기 16)
유월절 이후 소위 모세의 기적을 통해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쫓아온 이집트 군대를 홍해에서 다 몰살 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본 히브리 백성들은 광야에서 음식이 떨어지자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빵을 비같이 내리시겠다 약속하시고는 만나를 주십니다.
그런데 한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누구도 만나를 보관하지 말지며, 다만 얼마가 되었던 하루 먹을만큼만 가져다가 먹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그들이 내 법안에서 걷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출 16:4)”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어린 아이처럼 믿는자로 그리고 절대 순종하는 자로 훈련시키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백성들 중에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침까지 음식을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으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거둔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반대로 안식일 전날에 안식일 날에 먹을 것 까지 즉 평소에 두배를 모으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찾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내 명령들과 내 법들 지키기를 거부하느냐? <출애굽기 16:28>
10) 성막과 율법 (출애굽기 21장~)
성경을 읽다보면 정말 읽기 힘들고 지겨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족보이고, 두번째는 율법과 제사에 대한 구절들 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짓는 것에도 그냥 성막을 지어라!가 아니라 아주 detail하게 성막의 크기와 모양, 자재까지도 알려 주십니다. 각 지파들도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는게 아니라 어느 지파가 어느 쪽에 서고 어떻게 행진하는지 까지도 굉장히 자세하게 알려 주십니다.
물론 이는 성막의 모양과 각 기구들의 위치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하게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아주 노하셨을 것 입니다. 하나님은 허튼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그 모든 것은 상징이나 은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보기에 이해가 안가고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작은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 죽임을 당하거나 진노를 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1) 이상한 불을 사용한 나답과 아비후 (레위기 10장)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나담과 아비후의 경우 입니다. 불에 종류가 있을까요? 라이터 불이건 장작 불이건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불을 가져다가 향을 놓다가 불에 타서 죽게 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놓되 주께서 그들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이상한 불을 그분 앞에 드렸더니 불이 주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주 앞에서 죽으니라. <레위기 10:1~2>
얼마나 황당한 일 입니까? 하나님은 이일 후에 자식을 잃은 아론에게 슬픔을 표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작은 명령이 얼마나 큰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작은 부분도 무시할 수 없고 경외 해야 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12) 12명의 정탐꾼 (민수기 13장)
하나님은 출애굽 시킨 백성들에게 기적도 보여주시고 처벌도 하시며 히브리 백성들을 훈련 시키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오십니다. 그리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는데, 그들은 인간적인 관찰과 생각 논리를 통해 가나안 땅에 사람들이 너무나도 강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그 땅을 도저히 차지할 수 없을거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고 한 자신의 약속을 망각하고 스스로의 얕은 지식으로 차지할 수 없으리라 속단한 그들에게 광야에서 죽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또 불순종의 사람들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가나안 땅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나의 모든 생각과 지식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믿는 것 입니다. 나의 얄팍한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살릴수 있는 것 입니다.
13) 반석에 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반석을 친 모세 (민수기 20장)
히브리 백성들은 광야에서 계속해서 불평을 합니다.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더불어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의 눈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 <민수기 20:8>
모세는 이 명령을 들으며 어떤 기억을 떠올렸을 것 입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장면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주의 명령에 따라 신 광야에서 떠나 자기들의 여정대로 이동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거기에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으므로 백성이 모세와 다투며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우리가 마시게 하라.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주를 시험하느냐? 하니라. <출애굽기 17:1~2>
수십년 전에 이 일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막대기로 치라는 명령을 내리시며 그러면 물이 나올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반석을 막대기로 치자 물이 나와 백성들을 만족시켜 줍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분명히 반석을 보고 말 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바위를 두번 내리 칩니다.
이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물만 나오면 되는것 아닙니까? 우리가 듣고도 잊어버렸을 수 있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명령 하나에 순종하지 않은 댓가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12>
왜 일까요? 이 반석은 영생의 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홍해를 가른 그 하나님의 권능 그 막대기로 맞으신 것 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상하신 것 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한번으로 족한데도 모세는 바위를 두번이나 내리쳐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밀하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며 그 말씀은 무오하십니다.
14) 불뱀과 놋뱀 (민수기 21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은 끝이 없었고 이제는 걷는 길이 힘들어서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을 백성들 가운데 보냅니다. 그 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자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뱀을 제거해 달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뱀을 거두시고 모세에게 놋뱀을 장대에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뱀에 물려 죽기 직전의 사람들을 위해 도저히 믿기지 않고 이해하지 못할 해결책을 주십니다. 그것은 뱀에게 물린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란 말씀 입니다.
뱀을 쳐다보기만 한다고 해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둘째치고 뱀에 물린 사람이 뱀 모양을 보고 싶을까요?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뱀은 그냥 징그러운 동물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모두를 죄에 몰아 넣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그런 동물을 보고 싶었을까요? 그런 동물을 보는 것 만으로 치유가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나요? 하지만 성경은 그 말씀이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실제 효능을 발휘했음을 기록합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보면 살더라. <민수기 21:9>
이 놋뱀 역시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4~15>
15)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
12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보고를 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대로 들어가지 못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당시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워야 한다고 말한 갈렙과 여호수아 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가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정말 당시에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빼고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확인 합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자들 가운데 스무 살이 넘는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다만 그나스 족속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곳을 보리니 그들은 주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올라 그분께서 그들로 하여금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마침내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모두 소멸되었느니라. <민수기 32:11~13>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 입니다.
16) 여리고 성의 함락 (여호수아 6장)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가장 믿기 힘들어하는 기적은 무엇이 있을까요? 사실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이 홍해를 가른 모세의 기적과 여리고성의 함락 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 후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부터 강력한 요새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거대한 여리고 성 입니다.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여리고성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나게 거대한 성이었으며 견고한 방어 장치를 갖춘 요새였습니다.
고고학자인 Bryan Wood에 따르면 여리고 성은 아주 견고한 성이며 엄청난 양의 흙이 둑을 만들어 도시를 두르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둑의 바닥에는 15m 높이의 옹벽이 있고, 그 위에는 6m 높이의 진흙 벽돌로 만들어진 성벽이 있고 그 위에 또 6m 높이의 진흙 벽돌로 성벽을 만들어 놓은 성경대로 아주 견고한 성이라고 얘기 합니다.
그런데 이 성을 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은 성을 돌라는 것이 었습니다. 첫 6일 동안 아무 말 없이 성벽을 돌고, 마지막 7일째 되는날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를 지르라는 것 이었습니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되는 상식 밖의 작전 입니다. 누가 봐도 이런 방법으로 전쟁에 승리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인간의 지식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순종 이었습니다.
또 다행히 여호수아는 그 말씀을 비유나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 했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어린 아이 같은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17) 아간의 죄 (여호수아 7장)
여리고 성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칠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아이성을 쳐들어 갑니다. 그들은 사람도 많이 갈 필요 없이 2~3,000명만 전쟁에 데려갑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했던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하고 만 것 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자만이나 방심이나 군사의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여리고성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파괴하라는 체렘의 명령을 어긴 아간의 죄로 설명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저주받은 물건으로 인해 범법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에 속한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 중에서 취하였기 때문이라.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 자손을 향해 타오르니라. <여호수아 7:1>
아간은 모든 물건을 하나님의 창고에 넣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좋은 옷과 금붙이를 숨기고 말았습니다. 완벽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수백만 인구 중 아간 한명의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한사람의 작은 불순종 때문에 온 민족이 위험에 빠졌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18)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 (사무엘상 15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울이 아말렉과 맞서 싸울때,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남기지 말며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기와 젖먹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매 <사무엘상 15:3>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살찐 짐승들을 살려 두엇을 뿐 아니라 왕 아각도 죽이지 않고 사로 잡았습니다. 인간이 볼때, 살찐 짐승을 죽여서 버리는 것 보다 남겨서 먹는게 이득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그게 맞습니다. 적국의 왕을 죽이는게 아니라 살려 주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자비로우며 온유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 선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되었던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 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아말렉 족속의 살찐 짐승들을 죽이지 않고 남겼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슬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 <사무엘상 15:22~23>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댓가로 자신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사실상 폐위되게 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얘기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과 논리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 입니다.
19) 선지자 사무엘의 거짓말 (사무엘상 16장)
그 순종의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 16장 이야기 입니다. 사울을 폐위 시킨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 진정한 왕에게 기름을 부으러 가라고 사무엘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걱정하며 자신이 새 왕에게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을 알면 사울이 자신을 죽일거라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시키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그것을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희생물 드리는 일에 청하라. 네가 행할 일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니 너는 내가 네게 지명하는 자에게 나를 위해 기름을 부을지니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6:2~3>
새로 왕이 될 자에게 기름을 부으러 가는 사람에게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다고 핑계 대라는 것 입니다.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였지만, 신약을 아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지금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예수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왕이 되고 그가 희생양으로써 십자가에 박혀야 할 것을 예표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본인이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는 것이 맞았습니다.
사무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한 바에 순종했다고 기록 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예표가 되어 우리에게 믿음의 강력한 증거를 더해 줍니다.
20)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만져 죽은 웃사 (사무엘하 6장, 역대하 15장)
성경을 처음 읽다보면 하나님 너무 하시다! 라고 생각 될 만한 장면들이 몇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웃사의 이야기 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를 원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 소들이 수레를 안정적으로 끌지 않게 되자, 하나님의 궤가 떨어질 뻔 합니다. 결국 웃사가 다급하게 손으로 하나님의 궤를 붙들어 떨어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결국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왜 웃사는 죽게 되었을까요? 왜 하나님이 분노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궤를 나르는 정확한 방법을 명령하셨기 때문 입니다.
진영이 앞으로 나아갈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것을 끝마치거든 고핫의 아들들이 와서 그것을 나를지니라.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지니 그들이 죽을까 염려하노라. 회중의 성막에 있는 이것들이 고핫의 아들들이 나를 짐이니라. <민수기 4:15>
고핫의 아들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속한 일 곧 성소에서 섬기는 일이 그들의 어깨로 나르는 것이기 때문이더라. <민수기 7:9>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궤를 막대기를 껴서 어깨로 나르고 하나님의 궤를 만지면 죽는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한 웃사에게 분노하신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특히 신성한 무언가를 수레에 끌고 오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 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일까요?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명령하신 방법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죽음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말씀이 아닌 이방신들의 방식으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의 메세지 입니다.
하나님은 허투루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경외하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의 작은 명령도 허투루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신뢰와 순종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조금 과학적인 지식이 발전해다고 해서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반박하고 재단 합니다. 이는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자연 첫 과목을 들은 아이가 아인슈타인에게 당신의 이론은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해석과 인본주의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구원이 아닌 사망을 가져 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요한 계시록 22:18~19>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지 마십시오. 인간의 무지한 지식 대신 전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