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 복음 3:16~17>
3장 시작 부터 있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끝나고 16절 부터는 요한이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는 내용이 시작 됩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씩은 들어 봤을만한, 그만큼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모두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 입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기독교의 교의 (Dogma)는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찾아오셨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의
첫번째 교의는 보내심의 교의(the sending formular)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며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신게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교리인가? 라며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인간을 먼저 찾아온 종교가 있나요? 어떤 종교가 신이 사람을 찾아 왔다고 얘기하나요? 고등 종교들 중에서도 없습니다. 이 땅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인간이 찾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만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보내심의 교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 사상이 들어 있고, 또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 받아서 그 분의 뜻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Sending Formular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써의 자격이 없게 되는 것 입니다. 선재하지도 않았고, 권세도 없는자가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17절에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렌( ἀπέστειλεν)은 내쫓다, 유기 시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유기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죄를 지어 원수된 인간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교의
3장 16절에 들어 있는 두번째 교의는 내어줌의 교리 (Giving up Formula)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것 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 유기 시키셨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감동이 없지만, 이는 사실 문제인 것 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너무 무뎌져서 그렇지만, 이런 내용들 보다 더욱 감동을 주는 구절은 성경에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버리고 내어 주셨다는 이 말씀에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않되는데도, 엉뚱한 설교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런 진리를 듣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지칭하는데, 독생자라는 뜻의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ῆ) 외아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독특한 것, 사랑 받는 것, 유일무이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독종자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 외아들의 제사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장 귀한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2:2>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라고 부릅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는 유일 무이한 독생자 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교회에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너무 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라고 부르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나 사랑하는 독생자를 원수 되었던 자들을 위해 이 땅으로 유기 시켜 버리신 것 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로마서 5:8>
우리는 이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신 것 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먼저 흘러 나온 것 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얘기하는 3장 16절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남아 있기에 사랑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의 흉내, 용서의 흉내를 낼 수 있듯이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이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예수를 모르더라도 사랑의 모습 또는 단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자기 중심적 입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에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변합니다. 또 인간의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 입니다.
결국 그 죄인들의 사랑은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멕시코 영화 중에 아모레스 페로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치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전직 대학 교수인데 혁명에 참여 했다가 20년간 복역을 하고 나와서 살인 청부업을 하며 삽니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을 위해서 돈을 열심히 모읍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있는 개들을 여러 마리 데려다가 쓰레기 같은 집에서 키웁니다. 그러다 교통 사고 현장에서 투견에 쓰던 총상을 입은 개를 하나 발견 합니다. 코피라는 투견에서 맹위를 떨치던 개였는데, 치료를 해주고 다른 개들과 같이 키웁니다.
그런데 치보가 자신에게 청탁이 들어온 사람을 살해하고 들어 왔더니 코피라는 투견개가 자식처럼 키우던 다른 개들을 물어 죽인 것 입니다. 그래서 치보는 총을 들어 코피를 겨누는데, 문뜩 자기 자신과 코피를 오버랩 해서 비교 합니다. 코피는 주인을 위해서 다른 개들을 목숨걸고 물어 죽였던 투견개 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살인 청부 업자 였죠.
자기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막 죽이며 다녀 놓고는 이 개가 자신이 사랑하는 개들을 죽였다고 개를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개도 아까운 것이고 남의 것은 사람이어도 죽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기 딸을 위해서 돈을 모은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말 입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의 사랑과 일관성을 갖는 하나님의 사랑
이 영화를 만든 이나리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사랑과 이기주의를 또 타락을 얘기하고 싶어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모습이며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완전한 사랑에 대한 증거 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변치 않는 속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 변치 않는 속성을 사랑으로 갖고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 나와야 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 졌을 때, 그 사랑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 비춰지게 되는 것이지 우리안에서 절대로 진정한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사랑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 그 사랑을 입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인가요? 우리가 회개하고 착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 부터 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이 꼭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터 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하고, 베드로 전서 1장에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예정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고,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창세 전에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요한 계시록 13:8>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 입니다. 즉 어린 양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창세 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 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는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세워진 것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하시고 역사의 저편에서 그 십자가의 효력을 이 세상으로 뿜어 내고 계셨던 것 입니다. 십자가는 역사를 너머 영원에 서 있고, 이 십자가의 효력은 전 역사에 미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이 단순히 민족적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섰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주님은 창세 전에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것 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셋은요? 에녹은요? 이들은 하나님 나라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온다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거죠.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룻이나 라합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있다는 것은 구원 계획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았다는 메세지를 성경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것 이었음을 힌트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 입니다.
지금 이 구절이 어디에서 나오냐면, 선민 사상의 정점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유대교와 그 형식 주의를 박살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너희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사랑하신 다는 메세지를 요한은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