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서를 3명이 썼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이 태동하면서, 사람들은 많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한 많은 선지자, 사도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지키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신의 이성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려 하기 보다는 파헤치려고 하는 의도를 갖고 성경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자유주의 신학이 실제로 진리를 찾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을 찾기 위한 동기로 시작이 되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 동기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무시하게 하고, 그 신뢰성을 철저히 짓밟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어서 아무런 근거 없는 많은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은 다 부정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며, 많은 성경의 저자를 그대로가 아닌, 익명의 다른 저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신뢰성을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정확성에 놀라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들이 하나하나 성취 되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비평가들은 모세, 다니엘 등 성경의 저자에 대해 많은 공격을 했는데, 구약의 예언서 중 가장 뛰어나고 놀라운 예언, 특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가장 많이 기록 되어있는 이사야 서는 자유주의 신학에 많은 공격을 받은 책 중 하나입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사야 서를 이사야 이후의 다른 저자 혹은 저자들이 있다고 주장했고, 1872년 버나드 둠(Bernard Duhm)이 3 구분설을 내놓으면서 비평가들뿐 아니라 많은 크리스챤들도 이사야는 세 명이 저작했다고 믿게 됩니다. 1장에서 39장까지가 BC8세기에 활약한 이사야, 40장에서 54장까지가 고레스가 나타나기 몇 년 전에 즉 BC 590년에서 530년, 55장에서 66장까지가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질 때 쯤인 BC 550~BC500년 사이의 제 3 이사야로 구분합니다.
버나드 둠의 이사야 가 3명이라고 구분한 큰 이유를 간단하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사야 서의 40장~54장, 55장~66장까지의 표현된 시대가 다르다.
- 이사야 서의 문체와 표현법, 스타일, 주제, 구성이 다르다.
- 이사야 서 44장과 45장 고레스(키루스 대제)라는 분명한 이름을 기록해 놨다. 만약 진짜 이사야가 쓴 책이 맞다면 고레스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그 이름을 예언해 놓은 것이지만 그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그 비평을 믿어 버립니다. 실제로 이사야를 한번도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믿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서를 제대로 읽어 보고 묵상하고 연구하면 비평가 혹은 자유 신학자들의 주장은 무지하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저는 이사야 서는 BC 8세기에 살았던 이사야가 단독으로 쓴 책이라고 믿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 서는 그 처음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책입니다. 즉 이 책의 서론과 결론이 동일한 주제로 마무리 되어 있는 하나님의 책의 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서의 1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배반으로 인한 하나님의 한탄과 경고로 시작합니다. 특히 1:13~14에 보면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너희가 태우는 향이 역겹다. 너희가 초하루 축제일과 안식일과 특별 절기에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고, 거룩한 모임에 모여서 악한 짓을 하는 것도 견딜 수 없다. 정말로 나는 너희의 초하루 축제일과 특별 절기들이 역겹다. 그것들은 오히려 내게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지쳤다. <사 1:13~14>
초하루 축제일과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중심도 없이 의미도 없이 율법에 나와 있는 데로 예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한탄하며 그 초하루 축제일과 안식일이 역겹다고 표현하십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마지막 장인 66:23에 보면 서론에 대한 회복을 볼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앞에 영원히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 이와 같이 너희 이름과 너희 자손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안식일과 초하루 축제일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예배하러 올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사야 66:22~23>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주제인 모든 심판과 회복 후에 그전에 역겹다고 책망했던 안식일과 초하루 축제일이 모든 사람이 예배하러 오는 기쁨의 날 회복의 절기가 될 것 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신가요?
그러면 더 자세하게 파고 들어가겠습니다.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성경의 예언 중에 가장 놀라운 예언을 하나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저는 고레스의 예언을 꼽을것 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BC800~700에 이미 150년 후에 있을 왕의 이름과 그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표현한 예언은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예언의 존재 여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예언이 조작되었음을 밝히고 싶어하는 촉매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많은 비평가들이 이사야 서에 대해 공격하고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의 존재 여부를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44장 45장에 고레스라는 정확한 이름이 예언되어 있고 그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열왕기 상 13:2에 보면 300년 후에 태어날 요시야 왕의 이름과 그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이미 예언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150년 후에 어떤 왕의 이름이 무엇이 될 것 인지에 대해 선지자에게 얘기하고 그것을 적으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실제로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긴 서론을 통해 엄청난 예언을 주실 것임을 예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이요, 끝이다. 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누가 나처럼 선포하며 미리 말하겠는가? 만약 있다면 나와서 나와 견주어 보라고 하여라. 내가 옛날 사람들에게 미래 일을 미리 밝혀 주었듯이, 만약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말해 보게 하여라. <44:6~7>
그러나 나 여호와가 내 예언자들의 예언을 이루어지게 했다. 예루살렘을 가리켜 ‘사람들이 다시 여기에 살 것이다’라고 하였고, 유다의 성들을 가리켜 ‘이 성들이 다시 세워 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 내가 강을 향해 마르라고 말하면, 강이 마를 것이다. 나는 고레스를 가리켜 ‘그는 내 목자다. 그가 나의 모든 뜻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나는 예루살렘을 가리켜 ‘너는 다시 세워 질 것이다’라고 하였고, 성전을 가리켜 ‘너의 기초가 다시 놓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 44:26~28>
그리고 고레스에게 말씀하시는 듯한 명령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 종, 야곱 백성을 위함이요, 내가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 네가 아직 나를 몰랐을 때,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 나는 여호와다.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하나, 내가 너를 강하게 해 주겠다. <사 45.4~5>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고 하시며, 이름이 지어 지기 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표현, 네가 아직 나를 몰랐을 때.. 라는 표현으로 고레스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 일을 정해 놓으셨다는 표현으로 보았을 때, 이 일은 이사야가 150년전에 적은 예언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놀랍게도 성취된 수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레스의 예언처럼 굉장한 서론을 단 예언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비평가들의 생각처럼, 현재 있는 어떤 왕이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통찰력으로 쓴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대단한 예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사야 서의 시대적인 표현
앞에서 얘기한 버나드 둠의 비평은 이사야 서의 시대 배경이 다르다는 것에 근거해 있고, 그 예는 44:26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내가 다시 일으킬 것이다… 47:1의 바빌로니아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통치자가 아니다… 라는 예루살렘은 이미 부서졌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지금 이스라엘의 통치 중이라는 식의 표현(제2 이사야)과 66:6의 성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어 보아라, 성전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어 보아라… 라는 이미 성이 파괴 되었다가 재건된 듯한 표현으로 인함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서의 전체 내용은 이미 엄청난 예언들의 연속입니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 통치가 그 이전에 예언 되어 있기 때문에, 이사야는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의 통치를 사실 인양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와 동일한 잣대로 판단한다면 이사야 서는 1장부터 이사야가 쓴 글이 아니어야 합니다.
너희 땅이 황폐해 졌고, 너희 성들이 불타 버렸다. 너희가 보는 앞에서 원수들이 너희 땅을 약탈했고, 이방인에 의하여 멸망 당한 것처럼 너희 땅이 폐허가 되어 버렸다. 딸 시온이 마치 포도밭의 텅 빈 초막처럼 홀로 남았다. 수박밭의 원두막같이, 원수들에게 포위된 성같이 되어 버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백성 가운데 얼마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완전히 망했을 것이다. <이사야 1:7~9>
이미 1장부터 이사야는 성이 없어지고 불타 버렸음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예루살렘 성이 불탄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시온이 포도밭의 텅 빈 초막처럼 홀로 남았던 적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의 경고이자 예언일 뿐입니다. 만약 동일한 잣대라면 이사야 서 후반부의 표현도 이처럼 예언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비평가들은 이런 증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바벨론이 통치할 것이라는 예언은 39장에 있습니다. 이 예언은 히스기야 왕이 15년의 생명을 더 얻었다는 이야기 형식을 통해서 나타나 있는데,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에게 여호와의 전에 있는 보물들과 무기고들에 있는 방패와 무기들 등 각종 진기한 것들을 자랑하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아라, 장차 네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빌로니아에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네 조상들이 이 날까지 모아 놓은 모든 것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낳은 네 자녀들도 사로잡혀 갈 것이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왕의 왕궁에서 내시가 될 것이다.'” <사 39:6~7>
그 이후 43장부터는 시대가 바빌로니아가 망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40장 9절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두려워 말고 힘껏 외쳐라. 유다의 마을들을 향해 “보아라,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여라. <사 40:9>
말씀을 보면, 시온, 예루살렘, 유다의 마을들이 아직 존재함을 이야기 합니다. 소위 제2 이사야가 이 글을 쓸 때는 마을과 성읍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비평가들이 얘기하는 포로 시대가 아니 였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제 3 이사야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보고 싶습니다.
비평가들은 제 3 이사야의 시대 배경을 BC 515년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64장에는
주님의 거룩한 성들이 파괴되고, 시온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조차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이 여호와를 찬양하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이제는 불에 타 버렸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들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 64:10~11>
이라며 성이 파괴되었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고 없어서 광야가 되고 황무지가 되었다고 얘기하지만, 66장에는 위에 쓰였듯이 성과 성전이 존재함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전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재건과 예루살렘 성의 재건은 그 시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전의 재건은 다리오 왕의 시대인 BC 516년쯤 완공되었으나, 성전은 많은 방해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욕 상실 등으로 그 완공이 미뤄 지다가 느헤미야를 통해서 아닥사스다 왕의 시대 약 BC444~5년쯤 완공되었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성전을 짓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BC 538~536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64장과 66장 사이에는 적어도 90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어떤 한 사람의 경험에 의해서 이 모든 표현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까? 적어도 글을 쓸수 있는 나이를 20살정도로 잡았을때, 제 3이사야는 110년이상 살았어야 64장과 66장을 눈으로 보고 쓸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서 62장 9절에는 예루살렘에 성벽이 남아 있음을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62장과 64장사이에 또 100년여의 시간이 존재하게 됩니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죠.
신앙적인 색깔, 메세지, 문체의 다른 점…
사실 이 부분은 비평가들의 논문을 읽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표현들을 문제 삼아서 다른 사람이 썼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1장과 2장도 그 표현의 다른 점을 찾아서 다른 두 사람이 썼다고 주장하는 등 그 문체에 대한 꼬투리를 잘 잡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 서는 1장을 보면, 아주 젊어서부터 예언을 받기 시작하여, 오랜 기간 책을 쓴 것으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 (재위 BC 791~739년)때부터 히스기야 왕(재위 정확하지 않지만 BC715~687) 때까지입니다. 지금 각각 나이가 다르시겠지만, 자신이 10년에 썼던 글과 지금 쓰는 글의 문체나 스타일이 동일한 분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논리는 그런 스타일의 조그만 차이에도 이사야를 여러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낮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에 대해서도 이사야가 한 사람이라는 다양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39장과 40장의 차이
우선 39장과 40장의 글쓴 스타일 차이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이사야 서는 35장까지 예언을 다루며 안내하는 스타일로 글을 쓰다가 36장부터 히스기야 왕과 있었던 사건을 다루며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 당할 것임을 알리고 40장부터 다시 예언 (특별히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39장과 40장의 차이는 상당하며 그 예언이 하나하나 풀려 나가면서 시점도 바빌론이 통치한 이후로 넘어갑니다. 이사 야서를 읽어 보시면 39장과 40장의 차이보다 35장과 36장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여러 가지 같은 표현
이사야 서가 한 사람의 저작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표현이 조금 다를 수 있으나, 특정한 반복되는 표현이 39장 이전과 40장 이후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초 28번이 나오는데 1~39장까지 14번 40장 이후에 14번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서 외에는 7번밖에 나오지 않는 이사야의 고유한 표현입니다.
또 다른 표현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도 네 번이 나오는데 39장 이전에 두 번(17:13 & 29:5> 이후에 2번 <40:24 & 41:2>나옵니다.
또 제2 이사야 와 제3이사야로 구분된 48장과 57장 사이에 동일한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악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 57:21>
입니다. 이 동일한 구절은 48:22에도 나옵니다.
또 이사야 서에는 39장 이전과 이후 사이에 병행되는 표현(비슷한 표현)이 9번 나옵니다.
1:5~6 & 53:4~5 / 6:1 & 52:13. 57:15 / 6:12 & 62:4 / 11:1 & 53:1~2
11:6~9 & 65:25 / 11:12 & 49:22 / 35:10 & 51:11
특히 1:18, 41:1 43:26 & 44:22사이의 표현의 유사성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다. “오너라, 우리 서로 이야기해 보자. 너희 죄가 심하게 얼룩졌을지라도 눈처럼 깨끗해 질 것이며, 너희 죄가 진홍색처럼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희어 질 것이다. <사 1:18>
바다 건너 나라들아, 내 앞에 조용히 있어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여라. 가까이 와서 말해 보아라. 함께 모여서 누가 옳은지 가려 보자 <41:1>
그러나 너희는 나를 기억해야 한다. 만나서 누가 옳은지 가려 보자. 너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 <사 43:26>
내가 짙은 구름과 같은 너희 죄악을 지워 버렸고, 안개와 같은 너희 죄를 사라지게 하였다. 내가 너희를 구했으니 내게로 돌아오너라. <사 44:22>
하나님이 서로 얘기해 보고 가려 보자고 하는 구절은 구약에서도 흔하게 나오는 구절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사야 서에서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죄를 씻게 하기 위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자, 이야기 해보자고 합니다. 또 하나님 앞으로 왔을 때 죄를 씻기고 죄를 없앨 것이라는 표현도 동일합니다.
전혀 다른 메세지…
비평가들이 얘기하는 제2 제 3 이사야의 근거 중의 하나는 전혀 다른 메세지라는 것에 있습니다. 1장부터 39장은 심판에 대한 메세지로, 40장에서 54장은 회복에 대한 메세지로, 55장부터 66장까지는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의 메세지로 나눠 놓고, 서로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선 이사야 서를 읽어 보면 이사야 서 내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1이사야, 제2 이사야, 제 3 이사야 구분 없이,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4장, 7장, 11장, 32장, 33장 17절, 40장, 49장, 가장 유명한 52장 & 53장, 61장, 63장…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위에서 얘기한 1~39장에는 심판에 대한 메세지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메시아(예수님)에 대한 메세지 외에도 9:1~7, 25장 회복, 26장 찬양, 30:1~9, 33장 구원, 35등 계속해서 희망적인 메세지와 회복의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또 그렇다면 반대로 40장에서 54장까지는 회복의 메세지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50장은 심판에 대한 메세지이고, 51:17이후 역시 심판에 대한 메세지 입니다.
제3 이사야가 썼다는 57장에도 3절부터 13절 까지는 우상숭배 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58장 역시 잘못된 동기의 금식에 대한 책망의 메세지가 있고 59장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우상숭배?
제3 이사야가 존재했다면, 그는 포로기 이후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재건하는 시기의 사람이고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예언이어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57장에 제3 이사야는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사실 포로 생활 동안 바벨론 땅에 적응한 이스라엘 사람 중 많은 이들은 예루살렘에 가기보다는 이주해 있는 바벨론 땅에 정착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면 폐허가 되어 있는 땅을 다시 회복시켜야 하고, 집, 성 등 모든 것을 다시 재건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알고 있었고, 꼭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소수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예루살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청해서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특별한 열정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에스라 서에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감격에 젖어,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그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다른 어떤 예언서에도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시편 등을 통해서 인간들은 죄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증거에 대해서는 의심하며 믿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증거에 대해서는 검증해 보지도 않고 믿어 버립니다.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의 존재를 믿는 분들 중에 이사야 서를 제대로 읽어 본 분이 몇 분이나 될까요? 읽어 보셨다면, 제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묵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어떻게든 감추어 사람들을 죄악으로 이끄는 사람들…… 마치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 할 수 있다는 거짓 메세지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뉴에이지의 영…
이스라엘의 구약, 타나크는 위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아무리 훌륭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예언이더라도, 자기의 이름으로 쓴 책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그것을 말씀 (Scripture)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사야 서는 예언서 중 가장 위대한 예언이 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는 책으로, 사탄은 이 책의 권위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사야 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쓴 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 책은 이사야가 쓴 예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복음 13:14, 마가복음 7:6>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자유 신학자들이 예수님보다 위대합니까? 자유 신학자들의 비논리적인 추측을 믿고 지옥에 떨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세상입니까? 양다리 걸치지 말고 하나만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