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에 두 강도는 모두 예수님을 저주했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 셨을 때, 두 강도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이 얘기하는 두 강도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 <마태 복음 27:44>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 <마가 복음 15:32>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 복음 23:39~34>
두 강도는 모두 예수님을 비난했는가? 한 강도만 비난했는가?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서는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비난하지만 누가 복음에서는 둘 중 한명이 비난하고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선포 합니다. 이런 모순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죠. 순희와 영희는 아주 친한 친구 입니다. 그런데 순희이 영희에게 전화를 합니다.
“영희야, 나 어떻게 하지? 철수가 내가 좋다고 그러네? 사귀재…”
“어? 진짜?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되었다고 싫다고 그랬어…”
“아 그래? 잘했어.. 나도 걔 마음에 안들더라.”
그런데 다음 날 영희는 친구들에게서 철수와 순희이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순이 되는 이야기 일까요? 분명히 순희는 철수에게 안사귀겠다고 얘기했다고 들었는데… 순희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영희가 배신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통화 후에 밤에 철수가 다시 순희를 찾아와서 커다란 촛불 이벤트를 열었고, 이에 감동한 순희는 철수에게 마음을 열고 사귀기로 했을수 있습니다.
한 강도의 심경의 변화
성경에 나오는 두 강도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나 변증학자들은 이 구절을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시간 대에 있었던 다른 반응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 합니다. [^1] [^2] [^3]
저 역시 이에 동의 합니다. 즉 십자가에 달린 처음에 두 강도는 모두 예수님을 욕하고 비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둘 중에 한 강도는 이 분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분의 모습과 그 분 앞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 그리고 욕을 했지만 어딘가 모르는 찜찜함, 두려움, 성령님의 인도…
이를 통해 한 강도는 몇 시간 후에 자신의 죄인 됨과 이 분에게 죄가 없음을 확신하고, 다른 강도가 조롱하고 비난할 때 그를 꾸짖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 합니다. 그리고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비난할 때의 장면을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서, 그리고 한 강도가 회개하고 난 후의 장면을 누가 복음에서 기록한 것이죠.
그리고 이 두 장면을 모두 기록해야 할 복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인류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두 강도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두를 대표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입니다.
두 강도가 전하는 인간의 죄인됨과 구원의 메세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분명 아무죄도 없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분인데도 그 분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달라서 내가 바라는 것을 해주지 않으시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난 합니다. 이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죄성 입니다.
그런데 둘 중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 부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기도 하고, 택정함을 입은자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째튼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보며, 마음에 변화가 생깁니다.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한 사람, 지금 가장 악한 범죄자로 잡혀 십자가 형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의 모든 소망을 걸고 내 영혼을 맡기게 됩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 세상의 상식으로 말이 되지 않는 장면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 땅위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두 강도는 당시 가장 극형인 십자가 형을 당할 만큼 극악 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그게 나입니다. 그리고 그게 여러분 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져야 할 가장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한 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예수님께 부탁 합니다.
“예수님,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세요!”
미친 사람 아닙니까? 아니 지금 자기 몸도 못가누는 사람한테 자기를 기억해 달라니요? 그런데 바로 그 사람… 평생 악행만을 일삼다가 잡혀 십자가 형을 당하는 강도에게 즉 나에게, 그리고 아무 선행도 하지 않고, 할수도 없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약속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입니다. 나의 구세주를 알아보고 그 분을 믿는 것…
그것이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