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성과 경험, 지식을 지향하는 이성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 17세기부터 사람들은 조금씩 성경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 고고학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성경의 내용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가르치기 시작 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제한적인 지식으로 판단을 하려는 시도였고, 이를 성서 비평학(biblical Criticism)이라고 부릅니다. 성서 비평학은 성경을 누가 썼는지에 대한 자료 비평부터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하는 역사 비평까지 다양합니다.
이런 성서 비평은 성경에 있는 수 많은 기록들이 실제 사실이 아니며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들은 우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증거를 찾으면 신뢰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처럼 믿으라!’고 하신 말씀과는 정 반대되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 비평가들은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등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수 많은 성경들이 쓰여 진 연대가 성경이 주장하는 연대보다 훨씬 더 나중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예수님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의 발전은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수 많은 고고학적 발견은 성경의 내용을 정확히 입증해 주었을 뿐 아니라 성경을 토대로 진행한 연구를 통해 수 많은 고고학적 발견을 해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고고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넬슨 글루엑은 ‘실제로 지금까지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 낸 수십 가지의 고고학적 발굴은 한결 같이 성경의 역사 기록들을 개관적으로나 세부적으로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의 내용을 자세히 연구함으로 인하여 종종 놀라운 고고학의 발견들이 이루어졌습니다.’[1] 라고 고백 합니다.
그렇다면 성서 비평가들은 무엇을 의심했으며 그들의 의심은 어떻게 해명 되었을까요?
히브리어가 BC 6세기에 만들어 졌다고?
우선 성서 비평가들은 성경이 쓰여 진 연대부터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히브리어가 만들어 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욥기를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생각하고 BC 20~18세기쯤 쓰여 졌을 것으로 보는데 반해 성서 비평가들은 히브리어 문자가 BC 6세기 이전에 없었기에 최초의 성경은 BC 6세기경에 쓰여 졌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BC 10세기에 쓰여 진 히브리어 문서를 발견하고는 최초의 성경이 BC 10세기에 쓰여 졌다고 양보(?) 합니다.[2]
하지만 최근 고고학적 발견은 이들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함을 밝혀 냈습니다. 고고학자 더글라스 페트로비치는 아예 인류 최초의 알파벳이 히브리어라는 증거를 찾아낸 것 입니다. 그는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BC 18세기의 비석에서 ‘히브리’ 라는 초기 형태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찾아냈으며 그 알파벳이 이집트 상형 문자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 합니다.[3]
그러므로 히브리어가 최초의 알파벳인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히브리어가 BC 1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이 그 이전에 쓰여 졌을 리 없다는 주장은 근거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당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서술함으로 고고학적 정확성을 갖고 있다는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와 아브라함
성서 비평가들은 창세기의 수 많은 내용들을 모두 부정확한 것으로 취급했었습니다.
특히 독일의 신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모세 오경을 모세가 아닌 여러 명의 저자들이 BC 10세기~5세기에 당시의 배경을 토대로 작성하고 편집했다고 주장하는 JDPE 문서 가설을 주장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은 물론이고 창세기에 사용된 가나안이라는 지명 역시 후대의 것이며,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무덤을 팔았던 히타이트 족속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 했습니다.
하지만 19~20세기에 발견 된 에블라 토판, 마리 토판, 누지 토판 등은 창세기에 BC 10세기~5세기의 이스라엘 사람이 알 수 없었던 BC 20~15세기의 문화가 정확하게 기록 되어 있음을 통해 문서 가설의 근거를 약화 시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자신의 재산을 종인 엘리에셀이 갖게 될 것이라며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누지 문서에는 당시에 자식이 없는 경우 자신의 종을 재산 상속자로 정하는 제도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가 자신의 종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레아와 라헬도 자신의 몸종을 야곱에게 보내어 자식들을 낳게 하는데,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자신의 종을 통해서 자식을 낳게 하는 제도 역시 누지 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야곱이 자신의 장인인 라반을 떠날 때 라헬이 아버지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서 가져 나옵니다. 그때 라반은 야곱을 건들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야곱을 따라가서 우상을 찾아내려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이 우상이 무엇이기에 이것 때문에 한 쪽은 숨기려고 하고 한 쪽은 찾으려고 하는가? 당시 라반과 라헬은 우상 숭배를 그렇게 심하게 했나? 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누지 문서에는 드라빔이 단순한 우상이 아니라 드라빔을 소유한 자가 집안의 상속권과 장자권을 갖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BC 20세기경 마리 왕궁에서 발굴 된 마리 문서도 창세기 내용이 당시의 문화와 일관됨을 말해 줍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장에 자기 종 엘리에셀이 자기 재산의 상속자가 될 거라고 불평하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는데, 삼 년 된 암송아지, 암 염소, 숫양 등의 동물들을 반으로 갈라 서로 마주보게 해 놓자,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 문서에 따르면 당시에 계약을 맺을 때 당나귀를 반으로 갈라 놓고 계약 당사자가 그 사이를 지나게 되며 이 계약을 어겼을 때에 당나귀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법적인 표시라는 것 입니다.
에블라 토판 역시 벨하우젠의 여러 주장들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해 줬습니다. 그는 가나안이라는 지명이 창세기의 배경이 되는 BC 20~18세기보다 훨씬 더 후대에 지어 졌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에블라 토판에는 가나안이라는 지명은 물론 당시에 아담, 하와, 아브라함, 에서, 미가엘, 이스마엘, 다윗, 사울 등 히브리어의 근원이라고 여겨 지는 많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만약 모세 오경이 벨하우젠의 주장대로 BC 10세기~5세기에 쓴 글이라면 BC 20~15세기의 문화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이런 고대 토판들의 발견은 창세기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증해 줌과 동시에 성경의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귀중한 문서 입니다.
출애굽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4]
야곱의 사랑을 받았던 요셉의 이야기, 또 홍해를 갈라 극적으로 히브리 인들이 탈출하도록 이끈 모세의 이야기는 꾸며 낸 신화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지금도 세속적 고고학자들은 출애굽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꾸며 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많은 기독교인들 심지어는 유대인 랍비 까지도 출애굽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많이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이 출애굽이 일어났다고 믿는 시기에 아무런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 입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고고학의 최고 권위자로 여겨지는 맨프레드는 성경의 고센 땅 즉 람세스 성 바로 아래에 있는 아바리스라는 지역에서 특별한 발굴을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야곱의 가족들과 아주 흡사한 사람들 즉 양을 치던 셈족 목동들이 파라오의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음을 나타내는 거주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인들의 이집트 정착이 BC 12세기 이후에야 있었다는 관념 때문에 맨프레드는 이들을 히브리 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고고학자 데이빗 롤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이집트에 이미 요셉이 총리로 살았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는 특히 특별한 집터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집트 식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시리아 스타일의 집이 있었던 곳에 시리아 스타일의 집이 철거되고 이집트 스타일의 궁전이 지어 집니다. 이 집에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마당, 주랑, 회의실, 옷을 입는 방까지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 집의 주인은 총리와 같이 아주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집에는 더 흥미로운 특징이 있었는데, 궁전 옆에는 12개의 기둥이 설치되어 있었고, 궁전 뒤에는 12개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그 위에 채플이 지어 지게 됩니다.
이들 모두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니라. 이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축복하되 각 사람의 복에 따라 그가 그들을 축복하였더라. <창세기 49:28>
그리고 이 궁전에는 아주 특별한 피라미드 무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오직 파라오와 왕비만이 피라미드에 묻힐 수 있었기에 이는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 무덤의 주인은 왕은 아니었지만 왕의 순장 방식으로 묻히는 영예를 얻은 것 입니다. 그 안에는 성인의 두 배 정도 크기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그 조각상의 주인은 붉은색 버섯 머리, 노란 피부, 부메랑 같은 던지는 지팡이를 갖고 있었으며 채색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자기의 모든 자식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으니 이는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더라. 그가 요셉을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라. <창세기 37:3>
이집트 학자 찰스 에일링은 무덤에 조각상이 있다는 자체는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성인의 두 배 크기의 커다란 조각상이 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며 이 무덤의 주인이 아주 아주 중요한 사람임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붉은색 버섯 머리, 부메랑 같은 던지는 지팡이, 노란 피부는 이 조각상의 주인이 팔레스타인 출신임을 알려 준다며 그가 요셉 혹은 요셉과 아주 똑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얘기합니다.
또 오늘날에도 나일강에서 파이윰 저수지까지 연결 되어 있는 운하가 있습니다. 이 운하의 이름은 Bahr Yussef 해석하면 ‘요셉의 물길’입니다. 놀라운 점은 물길을 돌리는 공사의 시작이 아바리스에 셈족이 정착하게 된 시기 또 12개의 기둥과 무덤이 있는 궁전이 있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운하의 이름은 요셉의 물길일까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이 운하의 공사를 맡은 사람의 이름이 요셉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의 다른 증거들은 없을까요? 수 많은 다른 증거들이 있지만 저는 현재 라이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집트인이 쓴 출애굽기 ‘이집트 현자의 경고(Admonition of Egyptian Sage)라는 문서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5]
라이덴 박물관 관장인 마틴 레이븐은 이푸워의 파피루스로 잘 알려 진 이 문서를 중앙 권력이 무너질 때 이집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기록한 문서라고 평가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성경의 출애굽에 등장하는 재앙들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이집트는 물이 땅에 떨어짐과 같이 무너진다! 그리고 땅에 물을 부은 자는 전능자에게 비참하게 붙잡힌다! … 강은 피이다! 그 물을 마시면 너의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물로 인해 갈증을 느낀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하시나이다. 보소서, 내가 내 손의 막대기로 강에 있는 물들을 치면 그것들이 피로 변하며 <출애굽기 7:17>
보리의 풍부함이 떠나갔고, 식량의 공급이 부족해 졌다! 폭풍의 어둠 속으로 피하던 귀족들이 굶주리고 고통 받는다.
아마와 보리가 상하였으니 이는 보리는 이삭이 패었고 아마는 꼬투리가 나왔기 때문이더라 <출애굽기 9:31>
그것들이 지면을 덮어서 아무도 능히 땅을 보지 못하리라, 메뚜기들이 네게 남아 있는 것 즉 우박을 피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또 들에서 너를 위해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고 <출애굽기 10:5>
보라! 역병이 땅을 쓸어 버린다! 피가 모든 곳에 있다. 죽음에 모자람이 없고, 그의 형제를 묻는 자들이 모든 곳에 있다! 이번 슬픔에 있는 내가 비통하구나! … 모든 곳에 울음이 있다! 애가와 함께 섞여 있구나!
한밤 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 즉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처음 난 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처음 난 자까지 다 치시고 또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들과 온 이집트 사람들이 일어나고 이집트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곳에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더라. <출애굽기 12:29~30>
마틴 레이븐은 신이 노하여 이집트를 벌했다는 내용을 포함하여 성경과 놀랍게 유사함을 인정하면서도 이 파피루스와 출애굽기를 연결시키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이 문서가 이푸워가 직접 목격한 것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이 내용이 너무 비현실적이기에 그럴 리 없다고 반문 합니다.
실제로 영향력 있는 이집트 학자였던 고 매리암 릭타인은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단정짓습니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이집트 현자의 경고에 설명된 혼돈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며 그러므로 역사적일 수 없다. 한쪽에서 땅은 전적인 결핍을 당했다고 얘기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가난한 자가 멋진 옷을 입음으로 부자가 된다고 묘사 된다. 자기 주인의 소유였던 것을 가져감으로…’
저는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역사적 일 수 없다는 매리암 릭타인의 이유를 들었을 때, 전율이 돋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고 놀라운 책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옷을 벗는다. 노예들이 찾아 내는 대로 가져간다. 금, 청금석, 은, 터키옥이 여자 노예들의 목에 걸린다.
이제 백성의 귀에 고하여 모든 남녀가 각각 자기 이웃에게 은 보석과 금 보석을 빌리게 하라, 하시니라.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 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또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 앞과 백성의 눈 앞에서 심히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 <출애굽기 11:2~3>
또 이푸워의 파피루스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 역시 13대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두디모세 왕의 시대에 신이 이집트인을 벌하셨다! 고 기록 합니다. 이 기록은 굉장히 특이한데 그 이유는 여러 신들을 믿었던 이집트인들이 주로 사용해야 하는 ‘신들’ 이란 표현 대신 단수인 ‘신’이 이집트를 벌했다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출애굽기에 있었던 재앙들과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집트 군대를 그 안에 수장시켰다는 성경 기록을 지지하는 증거들이며, 고고학자 데이빗 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 이면서도 여러 가지 고고학적 발견들 속에서 역사 속의 모세와 출애굽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
불순종으로 인한 40년간의 광야 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넙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가나안 땅의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국가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정복했다고 기록 합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있을까요?
20세기 초반 에른스트 셀린이 이끄는 독일 팀과 존 가스탱이 이끄는 영국 팀이 여리고 성의 발굴을 시작했고, 이내 성경에 부합하는 여리고 성 파괴의 흔적을 발견 합니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중간 청동기 직후에 가나안 땅의 주요 도시들이 갑자기 파괴 된 흔적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파괴되었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1950년대 여리고 성이 발견 되었을 때, 이 성은 이중으로 된 높은 방어벽이 있는 공격하게 아주 어려운 성이었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도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멸망했고, 옹벽의 기초를 포함해 진흙 벽돌까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버렸습니다.
캐서린 케년의 발굴 리포트는 이를 아주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진 후 적들은 도시에 불을 질렀으며 케년은 도시 안에 있는 벽과 건물들이 불에 타기 전에 무너진 것도 분명하다고 보고 합니다. 아주 높은 온도에서 터 버린 두꺼운 층을 발견 했기에 부정할 수 없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매 백성이 그렇게 외치니라.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리므로 백성이 각각 곧장 자기 앞으로 나아가 도시로 들어가 도시를 점령하고 <여호수아 6:20>
그들이 도시와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불로 태웠으나 은과 금 그리고 놋과 쇠 기구들은 주의 집의 보고에 두었더라 <여호수아 6:24>
또 여리고 성의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특이한 점은 도시 내 거의 대부분의 집들에는 많은 항아리들이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 입니다. 그리고 이 발견은 여리고 성을 파괴한 것이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임을 강력하게 증거 합니다.
첫 번째, 가득 찬 저장 항아리는 추수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의미 합니다. 성경은 여리고 성의 정복이 유월절 직후 즉 봄에 있었다고 기록하며 요단 계곡에서는 곡물 추수를 봄철에 합니다.
두 번째, 가득 찬 저장 항아리는 포위 기간이 굉장히 짧았거나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여리고 성처럼 거대하고 강력한 방어를 갖춘 성에서 벌어졌다고 믿기 힘든 일입니다. 고대 시대에 이런 성을 정복 하려면 적어도 수개월에서 몇 년이 걸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7일 만에 정복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 번째, 당시에 곡식은 굉장히 귀한 자원이며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곡식들이 발견 되었다면 이를 정복한 군대는 모든 곡식들을 모아 자신들의 군량미로 썼어야 합니다. 특히 캐서린 케년은 여리고 성이 기원전 1,550년쯤 이집트에 의해서 파괴 되었다고 추측했는데, 당시 이집트의 군대가 가나안 땅에 왔거나 정복했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이집트는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에서 곡식을 얼만큼 약탈 했는지 자세히 기록할 정도로 약탈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 이집트 군대라면 이렇게 많은 곡식들은 당연히 사라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이 이스라엘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곡식들이 남겨 져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여리고 성에 있는 것들 중 아무것도 약탈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 입니다.
너희는 반드시 저주받은 물건으로부터 너희 자신을 멀리하라. 너희가 저주받은 물건 중에서 취하여 너희 자신을 저주받게 하며 또 이스라엘 진영을 저주 거리로 만들고 괴롭게 할까 염려하노라. <여호수아 6:18>
성경은 오직 아간 만이 이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었으며 그 외 모든 백성들은 이에 순종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멸망시킨 여리고 성이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던 그곳에는 약탈의 흔적이 없어야 하고, 20세기에 발굴 된 여리고 성은 정확하게 그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에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여리고 성에 있는 물건을 건들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간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훨씬 작은 아이성 정복에 실패하지만, 아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고 난 이후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며 가나안의 도시들을 하나 하나 정복하게 시작합니다.
그러자 하솔의 왕 야빈은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왕들을 모아 이스라엘에 대항하려 합니다.
하솔 왕 야빈이 그 일들에 대하여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또 산지의 북쪽과 긴네롯 남쪽의 평야와 골짜기와 서쪽으로 도르의 경계에 있던 왕들과 동쪽과 서쪽의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산지의 여부스 족속과 미스바 땅의 헤르몬 밑에 거하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매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는데 사람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매우 많았더라. <여호수아 11:1~4>
하지만 여호수아는 결국 하솔을 정복해 불로 태우고 야빈을 칼로 쳐 죽입니다.
하솔이 예전에는 그 모든 왕국들의 머리였으므로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 하솔을 빼앗고 그것의 왕을 칼로 치니라. 그들이 그 안에 있던 모든 혼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숨 쉬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그가 하솔을 불태웠으며 <여호수아 11:10~11>
고고학자들은 이 구절들에 대한 발견에도 성공 합니다. 여리고 성의 멸망과 같은 시대에 이스라엘의 하솔에서도 거대한 불에 탄 층을 발견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주 특별한 증거를 발견하는데, 중간 청동기 시대에 있는 고대 하솔의 왕궁에서 ‘야빈’이라고 불리는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석판을 발견 합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발견입니다. 일반적으로 발굴 된 물건이나 흔적들에는 곡식이 가득 찬 항아리처럼 왜 이런 물건과 흔적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추론과 해석이 필요하지만 글자가 있는 증거 특히 수 천년 전 쓰여진 성경에 나와 있는 이름이 적혀 있는 석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히타이트 문명과 철 병거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과 관련한 또 다른 재미있는 논쟁이 있습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성경에 헷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는 히타이트 문명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성경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며 히타이트 족속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특히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는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에게 철 병거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철이 이런 식으로 사용 되었을 리 없다며 성경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히타이트 문명에 대한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고, 철 병거는 히타이트 문명을 상징하는 물품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은 당대에 쓰여 진 글이 맞으며 역사적으로 아주 정확하며 신뢰할 만한 기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주장들은 반복 됩니다. 고고학적인 발굴이 전무하여 성경의 기록을 비판하던 고고학자들이 성경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자신의 비판을 철회해야 했던 사례들 말 입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
민수기를 보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한 모압과 미디안의 왕 발락이 주술가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사자들을 보내되 자기 백성의 자손들의 땅에 속한 강 옆의 브돌로 보내어 그를 부르게 하고 이르되, 보라, 이집트에서 나온 한 백성이 있는데, 보라, 그들이 지면을 덮고 내 맞은편에 거하노라. 내게는 그들이 너무 강하니 그러므로 이제 원하건대 와서 나를 위해 이 백성을 저주하라. 혹시 내가 우세하면 우리가 그들을 쳐서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대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줄을 내가 아노라. <민수기 22:5~6>
브올의 아들 발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지만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짓게 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1967년 요르단의 데이르 알라에서 발람에 대한 문서가 발견 됩니다.[6] 그리고 이 문서의 제목은 ‘브올의 아들 발람으로 부터의 경고들, 그는 신들의 예언자였다.’ 입니다. 이 후에도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구절이 처음 4줄에서만 3번 등장하는 등, 성경에 등장하는 발람이 실존 인물이었으며 그는 정말로 저주에 능한(?) 주술사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왕과 같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사람들뿐 아니라 발람과 같은 조금 특별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신뢰할 만한 책이며 벨하우젠과 같이 문서 가설을 내세워 성경이 주장하는 것 보다 더 후대에 쓰여 졌을 거라는 비평가들의 주장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다윗의 실존
고고학자들은 심지어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수 많은 시편을 남긴 다윗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역시 다윗의 실존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1993년 이스라엘 북부의 텔 단에서 BC 9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윗 왕가의 비문이 발견 되었고 하사엘로 추정되는 왕이 오므리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며 자신과 연합한 왕을 ‘다윗가(家)의 왕’으로 표현 함으로 다윗의 존재를 확증 합니다.
텔 단 석판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였고, 다윗 집안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를 죽였다…’
그리고 이는 열왕기상 8장과 9장 내용과 일관성을 갖습니다.
이런 증거들을 통해 1995년 12월 타임지에서는 다윗 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무신론자들의 비판이 더 이상 지지 받지 못함을 커버 스토리로 기사화 하기도 했습니다.[7]
또 다른 고고학적 발견은 다윗뿐 아니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이름이 기록된 물병을 발견함으로 사무엘서의 기록이 정확함을 확증해 줍니다.[8]
하나님을 의지했던 히스기야와 그를 공격한 산헤립
열왕기하 18장에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13절부터는 당시 최강 대국 이었던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근처의 모든 나라를 정복한 앗시리아에 두려움을 느낀 히스기야가 성전에 있던 금을 포함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보물들을 다 주었음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드리고 또 선지자 이사야에게 신하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었으며 앗시리아가 유다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그들을 벌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앗시리아의 군사들을 쳐서 죽이고 산헤립이 유다를 떠나서 니느웨에 거하였으며 자신의 신 니스록의 집에서 경배할 때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져 죽였으며 산헤립의 아들인 엣살핫돈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외의 고고학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요?
1853년 이라크 니느웨에서 테일러 프리즘을 발굴합니다. 그리고 프리즘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멍에로 항복하지 않은 유다의 히스기야에 대해 말하면, 나는 그의 46개의 성들을 포위했으며… 나는 그의 성소인 예루살렘에서 그를 새장에 든 새와 같이 가뒀고, 아무도 그 성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나와 싸우지 않았고 나의 성소인 니느웨에 30 달란트의 금과 800 달란트의 은, 최고의 안티몬, 커다란 적석 (red stone), 상아로 장식되어 있는 침상과 의자들… 그의 궁에 있는 딸들과 여자들, 남녀 가수들을 보냈다. 거는 나에 대한 존경과 공물을 위한 사신을 보냈다.’[9]
이 기록에는 성경과 똑같이 히스기야 왕이 금과 은 등의 공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면 당연히 기록되었어야 할 정복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역사학자들은 산헤립이 유다를 정복하지 못하고 물러 갔다는 성경의 내용을 사실로 인정 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산헤립 다음의 왕인 엣살핫돈의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은 정말로 자신의 아들이자 엣살핫돈의 형인 아드람멜렉에 의해 죽었으며, 엣살핫돈은 자신의 형과 6주간 내전을 벌인 뒤 승리했고 BC 681에 왕에 등극함을 그리고 동생은 아라랏으로 도망함을 기록 합니다. [10]
다니엘을 세 번째 통치자로 삼겠다던 벨사살
다음 챕터에서 소개해 드리겠지만 다니엘서는 예언의 정확함 때문에 특히 많은 비평가들의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후라는 주장까지 나왔을 정도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태 복음 24:15에서 다니엘에 대해 언급하셨고, 또 고고학적으로 다니엘서는 당시 바벨론과 메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서술 함으로써 다니엘서가 후대에 쓰여 졌을 수 없다는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 5장에는 벨사살이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벨사살이라는 이름도 발견되지 않았고, 다른 고대 문서들에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나보니더스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이 부정확하다고 비평했습니다.
하지만 1854년 이라크의 우르 지역에서는 나보니더스의 원통이 발견됩니다. 이 원통에는 벨사살이 나보니더스 왕의 아들로서 3년째에 군사권을 큰 아들에게 주고 왕권도 주었으며 나보니더스는 주변국들 정벌을 위해 장기간 나라 밖으로 나가 있었다는 내용이 발견 됩니다.[11]
이를 통해 우리는 다니엘서에 있는 의아한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는데, 벨사살은 겁에 질려 이 글자를 해석하는 자에게 왕국의 셋째 치리자로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왕은 자신의 중요한 명령을 수행하는 자에게 나라의 둘째 치리자를 삼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바로 아래 벼슬을 주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벨사살은 특이하게 셋째 치리자로 삼는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벨사살 스스로가 왕이긴 하지만 공동 통치자로써 두 번째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명령한 고레스 왕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 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8>
BC 8~7세기의 선지자 이사야는 엄청난 예언을 합니다. 그것은 200년 후에나 태어날 고레스라는 왕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며 그가 이스라엘을 해방 시킬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필요한 물품들까지 제공했다고 기록 합니다.
성경 비평가들은 당연히 이런 성경의 기록을 허무맹랑한 것이라며 비판 합니다. 당시에 강력한 왕이었던 고레스가 순순히 자신의 소유인 포로들을 보내 주고 성전을 짓도록 물품까지 공급해 준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879년 고레스의 원통이 발굴되면서 성경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확증해 줍니다.
고레스의 원통에는
‘나는 고레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 정정 당당한 왕, 사방의 왕이며 위대한 왕 안샨의 왕이신 캄비세스의 아들이며… 고레스의 손자이며…
나는 오랫동안 황폐 되어 온 성소들과 그 안에 있던 신상들을 티그리스 강 저편에 신성한 도성들로 귀환 시켰으며 그들을 위하여 영구적인 성소들을 지어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모아서 저들의 거주지로 귀환 시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레스의 원통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역사 학계에서 세계 최초의 인권 헌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또 성경을 꾸며 낸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에게 성경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 통하고 있습니다.[12]
요한 복음 그대로 발견 된 베데스다 연못
요한 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베데스다 연못이 등장 합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베데스다 연못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잘 몰랐던 후대의 사람이 꾸며 낸 것이라고 주장 했습니다.
하지만 1,888년 성 안나 교회에서 베데스다 연못이 발견되었으며 요한 복음이 묘사한 그대로의 모습을 갖고 있고 이 연못에 치료의 효과로 인해 이 곳에 병원 시설이 있었음도 밝혀 냈습니다.
요한 복음은 베데스다 연못이 양의 문 근처에 기둥이 다섯 개 있는 연못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양의 문 근처에서 발견 된 현장에서는 다섯 개의 기둥이 있었음이 확인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이 곳에는 요한 복음에 설명 된 대로 연못에 치료의 효능이 있었다는 증거로 그리스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 있었고 AD 200년쯤에는 폼페이아 루킬리아라는 로마 여인이 치료를 받고 기부금을 냈다는 비문도 발견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비평가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정확성을 인정 받은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으며, 이제는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못한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