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는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성전을 완성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책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사실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 즉 우리가 어떻게 지어지는 가에 대한 이야기가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 솔로몬의 책 내용입니다.
아가서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또 하나님은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 분의 백성을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약의 이야기도 결국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가서의 제목은 원어로 쉬르 하시림(שיר השירים) 인데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 입니다.
즉 하나님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 인거죠.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존재고 그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떻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신랑인 자기와 신부인 술람미로 비유해서 쓴 글 입니다.
사실 여기에서의 술람미는 솔로몬 입니다. 그래서 솔로몬(שְׁלֹמֹה)과 술람미(שׁוּלַמִּית)는 히브리어로 똑같은 단어의 남성형과 여성형 입니다. 즉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솔로몬이란 이름은 샬롬 즉 평강의 왕이고 술람미도 마찬가지 입니다. 즉 평강의 왕에 의해서 화평케 되는 어떤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입니다.
나중에 요한 계시록에 가면 화평 즉 평강의 왕이신 그 분의 이름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장 합니다. 그들이 받는 이름이 예수 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술람미라는 여자에게 어떻게 전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가 아가서의 이야기 입니다.
아가서의 기록 연대는 왕과 귀빈이 140명 밖에 안될 때 입니다. 그러므로 BC 970~960년 어간, 솔로몬이 왕이 된지 얼마 안됐을 때 쓴 것 입니다.
아가서는 많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해석을 뒷받침하는데 사용하거나 부부관계의 지침서 혹은 음란한 책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의 이야기 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절기 때 마다 낭독하는 책이 따로 있었는데, 아가서는 유월절에 전체를 낭독했습니다. 즉 아가서는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아가서를 읽으면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노래 중의 노래 곧 솔로몬의 노래라. <아가서 1:1>

솔로몬의 노래 아가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전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어 가시는가에 대한 노래 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성전 짓는 지혜의 이야기라고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사무엘 하의 나단의 신탁, 다윗 언약에 솔로몬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메시아로써 등장을 하기 때문에, 성전인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지어지는 가를 보시면 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입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 맞추시기 원하노니 당신의 사랑은 포도즙보다 더 낫나이다. <아가서 1:2>
우리가 아가서를 읽다보면 굉장히 내용이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만났다가 신부가 도망갔다가, 신부가 찾으러 다니고, 같이 동침하고 남편이 어디서 오고….
성경은 연대기 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묵시와 연결이 되어 있는데, 묵시라는 것은 영원속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 합니다. 그런데 이 묵시를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잠깐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역사라는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 입니다. 이미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완성 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 이기에 성경은 이를 시간별이 아닌 사건별 주제별로 기록할 때가 있는 것 입니다.
이는 마치 모든 시나리오가 완성 된 영화를 찍을 때 굳이 영화 속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촬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장소에서 극 초반의 신과 후반의 신을 찍어야 한다면 그 둘을 같은 날 찍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극중에서는 같은 날 찍은 두 신이 수년에서 수십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일로 표현 되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아가서도 보면 묵시 속에서 완료 되어 있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나왔다가 역사 속에서의 성도의 삶이 어떠한지를 묘사하는 에피소드가 나왔다가, 2절의 상황이 나왔다가, 막 뒤죽박죽 입니다.
그래서 이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풀어내지 않으면 풀리지가 않습니다.
2절은 술람미가 하는 이야기 입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미 키스를 한번 하고 가셨음을 의미 합니다. 그런데 그 입 맞춤을 기다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포도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어떤 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의 대표가 포도주라면 신랑과 신부의 입 맞춤이야 말로 그 어떤 세상적 즐거움 보다 좋다는 의미 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예수와 함께 존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시적으로는 재림 전까지 우리를 떠나 계신 상태 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분노하사 그분의 진노가 조금이라도 타오를 때에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로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2>
입맞춤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 입맞춤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이 바로 성도 하나님의 백성들 입니다.
그 성도들이 그 입맞춤, 내 진짜 신랑인 솔로몬의 입맞춤이 그립고 그립다! 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 입니다.
당신의 좋은 향유 냄새로 인하여 당신의 이름이 쏟아 부은 향유 같사오니 그러므로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가서 1:3>
기름은 무언가가 으깨져서 나오는 것 입니다. 여기서 메시아의 희생에 대한 암시가 나오는 것 입니다.
나를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리이다. 왕께서 나를 자신의 방들로 데려가셨으니 우리가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즙보다 더 많이 기억하리니 곧바른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아가서 1:4>
술람미인 나에게, 교회인 나에게 입 맞춤을 해주고 간 그 분이 향기로운 기름을 내 뿜는 분인데, 그 분은 자기의 으깨짐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기름입니다. 그래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왕이 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끄시나 나를 인도해 주세요! 우리가 왕을 따라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방이라는 단어는 에스더에도 나오는 왕비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의미 합니다.
지성소!
왕이 나를 자기의 방으로 데려가셨으니! 라는 것은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들어가는것 이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다 죽는 것을 의미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어떻게 이 왕이 술람미를 그 곳으로 데리고 가고 있냐는 것 입니다.
술람미가 스스로 가면 죽지만 왕이 데리고 가면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방이 뭐하는 곳이냐면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곳 입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것은 아가서에서 한 몸사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열이 되는데, 한 몸 사상이란 나중에 또 방이란 단어가 나오기도 하지만, 신랑과 신부가 있다고 해 봅시다. 최초의 신랑은 아담이고 최초의 신부는 하와 입니다. 그런데 원래 처음에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들어서 여자인 갈비뼈를 빼냈더니 남자가 된 것 입니다. 즉 사람은 남자 + 여자 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몸속에서 빠져나왔던 어떤 것이 다시 들어와서 사람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이렇게 만드시고 부부생활 같은 인류의 보편적 생활 관습들이 생겨난 것은 인간들이 막 만들어 낸게 아니라 한 몸이 되는 것을 표현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고 남자 안에서 갈비뼈를 빼 낸것 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옆구리가 뚫리고 심장을 막고 있는 갈비뼈가 나와 교회가 탄생합니다.
즉 예수로 말미암은 교회가 혼자서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막 살아서 예수님의 도움을 받고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이 없었으면 탄생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내가 당신의 비워진 그 곳으로 들어가야 나는 비로소 존재가 됩니다! 라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입니다.
이 이야기가 아가서 안에서 니가 내 안에 내가 니 안에, 솔로몬이 술람미 안에 술람미가 솔로몬 안에… 라는 반복 되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 입니다.
요한 복음 7장에 있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안으로 술람미가 어떻게 들어가게 되는가, 그리고 술람미가 솔로몬 밖으로 나가서는 어떻게 살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에피소드 들을 나열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검지만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들과도 같고 솔로몬의 휘장들과도 같으니라. <아가서 1:5>
여기서 예루살렘 여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나중에도 계속 등장하지만 이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교회 즉 술람미와 대척점에 있는 율법주의, 인본주의를 상징 합니다.
술람미는 내가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이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너희들은 굉장히 깨끗하고 (바리새인들 처럼) 멋지고 사람들이 볼 때 본받을 만하고 한데, 나는 이렇게 검고 게달의 장막 즉 유목민들의 다 떨어진 너덜너덜한 천막 같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아름답고 솔로몬의 휘장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께서 봐서 이쁜 옷을 주시며, 우리가 선악과를 먹고 인간끼리 합의하고 결정하여 멋지다고 규정한 옷을 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으라고 주신 옷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 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꾸 행위의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볼 때 시커멓고 게달의 장막 같이 너덜너덜 한 술람미를 신랑이 아름답다고 하고 솔로몬의 휘장이라고 불러주는 이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혼인 잔치에는 예복을 입지 않으면 다 쫓겨난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입혀주는 그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 말입니다.
민수기에서 모세가 이디오피아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자 아론과 미리암이 와서 모세를 비난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리암을 문둥병이 걸리게 하십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들이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 피를 덮어서 데리고 나오는데, 그런 모세가 어떻게 아프리카의 시커먼 여인과 결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인본주의라고 하는 것 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해가 나를 내리쬐어 내가 검기 때문에 나를 흘겨보지 말라.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내게 노하여 나를 포도원 지키는 자로 삼았거니와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아니하였노라. <아가서 1:6>
술람미는 자기가 밭에서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검다고 얘기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내 어머니의 자녀들 즉 배다른 형제들이 자신에게 일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유대주의와 그 안에서 나온 교회를 얘기하는 것 입니다.
유대주의와 교회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것 같지만 나온 배가 다른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일을 계속 시켰습니다. 솔로몬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되는 교회를 유대주의가 자신들의 포도원에 데려다가 죽도록 일을 시킨 것 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일을 하고 있는 당신들의 백성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술람미의 여인은 이복 형제들의 포도원을 관리 하느라 정작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포도원에 대한 구절이 이후에 나오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이후에 구절이 나오면 추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아가서 1:7>
이렇게 세상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습니다.
너는 얼굴도 검고 여전히 더럽고, 여전히 변하지도 못한 그런 모습으로 니가 무슨 신부야? 니가 무슨 예수 믿는 놈이냐? 니가 무슨 교회냐? 라고 욕을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입 맞추고 간 기억이 나고 내 안에 성령이 들어와서 나를 만나주신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도 내가 한심하니까, 술람미가 교회가 쉴 곳을 찾는 것 입니다.
내 혼이 사랑하는 이 즉 솔로몬의 양떼를 쉬게 하는 곳, 즉 안식 하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구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런 핍박이나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으면 신랑과 함께 안식하는 곳을 간절히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로라도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7절 후반에 얼굴을 가린자는 창녀를 의미합니다. 다말이 유다와 통간을 하려 할 때 너울을 쓰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술람미는 사람들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신을 창녀 취급을 함을 호소하는 것 입니다. 분명히 술람미에게는 입 맞춰주고 간 신랑이 있는데, 내가 언제까지 이런 창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를 호소하는 것 입니다.
오 여자들 중에 가장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국을 따라 네 길로 나아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일지니라. <아가서 1:8>
그러자 술람미에게 온 답이 8절 입니다.
니가 모르겠다면 목자가 양을 치러 어떻게 갔는지 양 떼가 간 곳으로 따라가봐! 다 너처럼 창녀 취급 받으면서 갔단다! 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염소 새끼라는 것은 양떼와 비교해서 값어치 없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런 너의 모습, 값어치 없는 너의 실존을 네가 알고 깨달으라는 의미 입니다.
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말 무리에 비교하였노라. <아가서 1:9>
이제 솔로몬이 갑자기 등장하여 술람미에게 네가 파라오의 말에 비교한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말 많이 갖지 말라고 하고, 금 많이 갖지 말라고 하고, 여자 많이 갖지 말라고 했지만, 솔로몬은 모두 어겼습니다. 특히 솔로몬은 이집트에서 말을 수입해 왔는데, 이는 이집트의 말이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말을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여겼는데, 왕의 말들은 어디라도 왕이 가는 곳마다 함께 갔습니다. 심지어는 왕이 죽으면 왕의 말은 같이 순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가 아무리 돈을 많이 주더라도 자기가 타는 말은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라오의 말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파라오의 말들에 비교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 왕의 말보다도 더 귀한 존재 그것이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지금 이 여자는 자신은 게달의 장막같고 시커멓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창녀라고 조롱하니까 언제 나를 안식의 자리로 데려갈 거냐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신랑이 ‘아니야! 너는 이 세상 왕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말, 어떤 보물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야!’ 라고 말해주는 것 입니다.
앞으로 아가서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그렇게 귀한 나를 왜 여기에 두고 갔는지를 물어보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 입니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아가서 1:10>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라는 말을 직역하면 빰이 머리털로 가려져 있다는 의미 입니다. 그걸 당시에는 너울을 쓰다라는 말과 혼용해서 썼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면사포는 항상 신랑만 올려줘야 합니다. 그걸 머리로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는 의미는 이 머리를 신랑만 올릴 수 있다란 뜻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첫날밤에 신랑이 신부의 머리를 올려줬다고 표현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너는 이 세상 누구도 만지고 건들일 수 없는 내 아내로 찍었다는 뜻 입니다.
나중에 고린도서로 가면 여자들이 뭐를 쓰는 것은 내 위에 남자가 있다란 의미 입니다. 이게 없으면 머리를 길러야 하는데, 여자의 머리는 항상 나는 내가 순종할, 내가 속한 남자가 있어요! 란 뜻 입니다. 즉 술람미가 예수의 신부라는 뜻 입니다.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라는 구절을 잘 생각해 보면, 술람미는 지금 노예 신분 입니다. 노예가 목에 보석 목걸이를 할 수 있었을까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걸이는 누가 줬다는 것일까요? 신랑이 주고 간 것 입니다.
그런데 목걸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면, 목이 곧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내 멍에를 매라고 합니다. 멍에는 목에다 매는 것인데, 이는 선악과를 먹고 교만해진 뻣뻣한 목에 목걸이를 걸어준 다는 것은 너는 네것이다! 라는 뜻 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교만한 목은 꺾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열 드라크마는 목걸이 입니다. 이는 결혼시 패물로 받은 것인데, 그 중 한 드라크마라도 없어지면 패물로의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죽어라고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자기 신랑 것입니다! 라는 뜻인데 그것을 못찾으면 쫓겨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여자는 사람 취급도 못받았던 때였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사람 취급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자기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해야만 사람 취급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 과부가 되는 것은 정말로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의 신부들을 부르면서 그 목에 멍에를 걸어 버립니다. 근데 내 멍에를 매라고 해놓고 이게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이 끌고 가는 길이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쉬울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키는대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되서 무조건 끌고 가는 곳 입니다.
멍에를 씌워서 하나님이 원치 않은 곳으로 알아서 끌고 가겠다고 하는 것 입니다. 즉 술람미의 목에 그 구슬 꿰미가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너를 위하여 은 단추를 박은 금 옷자락을 만들어 주리라. <아가서 1:11>
위 성경에는 은 단추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로 보면 네쿠도위(נקדות) 즉 귀고리 라는 의미 입니다.
구약에서 귀고리는 언제 사용 됩니까? 종들이 7년이 지나 자유인이 될 수 있었음에도 주인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살겠다고 선언할때 귀를 뚫습니다.
왕께서 자신의 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내 나드 향유가 그것의 향내를 풍기는구나. <아가서 1:12>
여기서 자신의 상이란 것은 왕만 들어가는 방의 침대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식탁이라는 의미로도 같이 사용 합니다. 그런데 왕이 여기 앉았더니 술람미에게서 나드 기름의 향유가 풍긴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나드 향유는 어디서 나올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은 것이 나드 기름 입니다.
침상이라는 것은 솔로몬과 술람미가 함께 자서 부부가 되는 곳 입니다. 이렇게 침상에서 하나가 되고, 또 식탁에 앉아서 같이 먹으며 하나가 되자 신부의 몸에서 나드 향유가 터져 나오는 것 입니다.
마리아가 나드 향유를 왜 예수님의 발에 쏟았을까요? 감사해서요! 원래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였는데, 아무도 자신을 사람 취급해 주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나를 신부 취급해준 예수님께 그녀가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깨서 예수님께 부어 버린 것 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아가서 1:13>
옛날 조선 시대에도 잘 씻지를 못하기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나니까 사향 주머니를 가슴골에 넣고 다녔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가슴 가운데 몰약을 넣었습니다. 이처럼 나는 창녀같이 더럽고 냄새가 나지만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나의 향기가 되더라는 것 입니다.
몰약은 원래 시체 썩는 냄새를 막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즉 나는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 죄인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도 나에게서 좋은 향기 내 신랑이 좋아하는 향기가 나는데 그 향기의 원인이 또 내 신랑이라는 것 입니다. 내 신랑이 나의 더러운 냄새를 다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냄새가 나는 내가 향기나는 아름다운 신부로 여겨지는 것 입니다.
14절에는 고벨화 꽃송이가 나오는데, 고벨화는 세 가지 색을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 꽃이라고 불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내 남편은 엔게디 고원 즉 다윗이 위험할 때마다 피했던 곳에 있는 메시아, 나를 구원해주고 나의 피난처가 되실 유일한 분이라는 의미 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런 개념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아가서를 유월절에 읽어주면 이대로 다 이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개념을 모르니까 해석을 해야 하는것입니다.
아, 나의 애인, 당신은 멋져. 오, 당신은 정말 멋져. 우리의 침대는 푸른 풀밭이라네. 우리 집 들보는 백향목, 우리 집 서까래는 전나무라네 <아가서 1:16~17>
이제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 합니다.
15절에는 술람미의 눈이 비둘기 같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비둘기는 평화를 전해주는 새 이기도 하지만 사물을 하나밖에 못보는 새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둘기 눈 같다는 것은 나 밖에 보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건 묵시 속에서 완료될 일이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가 아닌 돈을 봅니다. 세상의 힘을 봅니다.
비둘기는 비둘기인데 다른 것을 보고 있잖습니까? 그 눈을 예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너는 비둘기! 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16절 17절에 나오는 백향목, 전나무는 성전을 지을 때 사용하는 나무 입니다. 이런 나무들은 1,000년 이상 살고 냄새가 독해서 벌레가 싫어해서 성전을 지을때 쓰는 나무 입니다. 즉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성전이다라는 것 입니다.
니가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창녀니 게달의 장막이니 흑인이니 이런 소리를 듣고 니가 그런 말에 그렇게 흔들린다 할지라도 너와 내가 거할 성전은 영원한다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