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구원만을 가르치는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 Fingerofthomas.org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큰 이유는 우리에게 호흡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 보다도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 조차도 모른체 살아가고 또 죽어 갑니다.
요즘 저는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고, 항상 말씀을 생각하고 사모하고 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요한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고 있으며, 성경이 특히 복음서가 두루뭉술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정확한 목적을 갖고 성령님의 영감으로 완벽하게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 혼자 갖고 있는것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에 대한 여러개의 설교 말씀을 정리해서 공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읽으시고 요한복음을 묵상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실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구성을 네 부분으로 나누면 1장의 도입부와 21장의 결론 사이에 2장부터 12장 까지의 표적의 책과 13장 부터 20장 까지의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 저는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에 대한 하늘의 비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내용을 나누기 전에 저희는 먼저 표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드리는게 전체 글의 이해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표적 (σημεῖον) 이란 단어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이라는 뜻 입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화장실이 어딘지를 나타내는 표지판을 자주 보는데, 그 표지판이 화장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표지판은 화장실이 어디인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표지판을 보고 화장실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장실을 찾다가 20 m 더 가면 화장실이 나온다는 표지판을 보고 그 표지판에서 볼일을 본다면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을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의 표지판은 무언가를 가리키고 싶은 것이었지 그 표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적을 공부하면서 그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그 표적이 얘기하고 싶었던게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표적들을 통해서 하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요한복음 1장 마지막절과 20장 31절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1>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즉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생명을 얻을수 있어야 하며, 그 안에 포함된 일곱 표적 역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도 어떠한 암시를 받아 다음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듯, 예수님께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시며 2장의 표적의 책이 열립니다.
요한복음의 표적의 책에는 일곱개의 표적이 등장 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베데스다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사건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
실로암에서 났을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사건
베다니에서 죽은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표적의 책은 일관성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사건들 즉 표적들이 일어나면 사람들 특히 유대교인들의 오해가 나오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강해로 마무리 됩니다. 이를 통해 각 표적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본론으로 들어가기전에 살짝 힌트를 드리면 표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표적을 이 땅의 것으로 오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표적을 하늘의 것으로 강해하시면서 이 표적이 영생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에 대한 배경 지식을 설명해 드렸으니 첫번째 표적 부터 설명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첫번째 표적: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
예수님은 제자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혼인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쯤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 입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보통 1~2 주간 잔치를 벌이는데, 포도주는 잔치의 흥을 돋우는 가장 중요한 물품 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가 파장이 되버리고 잔치를 주최하는 쪽에서는 큰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것은 아주 당혹스런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리며 그의 능력을 사용해서 무언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시키는대로 순종하라고 명하자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유대인들의 관례에 따른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처음에 마리아가 잔치의 포도주가 급해서 포도주에 집중할 때는 예수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시지만 마리아가 포도주가 아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즉 예수님께 집중하자 예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 입니다. 우리의 수 많은 기도 역시 잔치집에 포도주처럼 세상의 필요나 나의 즐거움, 기쁨, 소원 성취에 집중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도 제목들에 대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대답하시지만 우리의 관심이 나의 소원이 아닌 예수님에게 집중 될때에 예수님은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는 것 입니다. 바꾸어 얘기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공급과 은혜를 단순히 이 세상의 것으로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이심을 인지하는 증거로 사용해야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항아리 6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은 그 항아리를 유대인의 결례에 따른 돌 항아리임을 굳이 밝힙니다.
유대인들은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 그리고 식사하기 전에 손과 몸을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이는 율법도 아니고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항아리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이 돌항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 지어지지 않은 형식 주의에 빠진 생명력 없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물도 없는 정결 예식 항아리, 복음과 상관없이 종교 행위를 열광적으로 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지금 요한은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데 결혼식을 예수님과 성도의 혼인 잔치로, 잔치 주관자를 인간의 능력이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의 대표 유대교로, 포도주는 기쁨, 잔치, 희락을 상징합니다. 지금 요한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빗대어 유대교를 진정한 기쁨을 상실한 잔치집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다른 말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을 형식만 남아 있는 유대교 즉 종교로 비유하고 있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결혼식장에 포도주나 만들려고 즉 너희에게 이 세상의 즐거움을 주기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위해서 왔으며 십자가에서 너희에게 내 보혈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외치고 계시는 것 입니다. 그 잔치집이 참 기쁨을 회복한 잔치집이 되기 위해서는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그분의 보혈 즉 포도주가 있어야 진짜 잔치집이 될 수 있음을 즉 예수님과 연합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이 사건의 진짜 메세지 입니다.
요한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오해하는 두 사람을 등장 시키는데 그 둘은 니고데모와 수가성의 여인 입니다. 이 둘은 굉장히 상반된 삶을 살았는데, 니고데모의 경우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엄하게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파에 엄청난 교육을 받고 지금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그것도 유대 최고의 가문에 엄청난 부자인 사람, 거기에 성품도 겸손하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가장 훌륭한 사람의 대표로 등장하는 반면 수가성의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취급했던 사마리아인에 그 사마리아인 중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난했으며, 남편을 다섯 이나 바꿀 만큼 처참한 삶을 살았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과 동거중인 도덕적으로도 형편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하지도 않는 가장 천한 사람의 대표로 양극단의 두 사람을 등장시켜 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예수님의 강해를 통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전하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요한은 니고데모의 등장 전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소개합니다. 씻을 물이 없었던 유대인의 관례에 따른 돌 항아리처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아닌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한 성전을 보신 예수님은 분노하시며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이를 제지하기 위해 나온 제사장들이 표적을 요구하자 이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제사장들이 이를 물리적인 성전으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의미로의 성전 즉 자신의 몸의 부활을 표적으로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것이 단순히 혼인 잔치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복음을 표적하셨듯이 영생을 주시기 위한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 입니다.
그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이 기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그들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아님을 암시하며 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를 등장시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 <요한복음 3:2>
그는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들을 봤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도 어리며 어떤 랍비 교육도 받지 않은 예수님께 공손하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으며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계심을 인정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부러움을 사기에 부족함 없는 니고데모 역시도 관례에 따른 돌 항아리처럼 구원을 스스로 이뤄낼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고 얘기하며 물 즉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심을 알려주시며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시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4~16>
구원의 방법은 인자가 반드시 광야의 뱀처럼 들려야 하며 이것을 통해 누구든지 인자를 믿는 자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3일만이 다시 세우시겠다는 성전, 광야의 뱀처럼 들리는 것은 십자가 보혈의 공로 즉 포도주를 얘기하는 것 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다가 예수님과의 연합 즉 혼인 잔치가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고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물 즉 성령이 들어가서 예수님의 보혈을 믿을수 있게 해주셔야 한다는 복음의 이야기를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계신 것 입니다.
그에 상반된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반대로 구원이나 영생에 대해 큰 관심도 없이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수가성의 여인을 일부로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인간 취급을 안했고 게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수가성의 여인은 놀라면서 왜 말을 거는지 반문하는데, 그 때 예수님은 뜬금없이 자신이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그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이 물을 육신의 물로 오해하고 예수님께 그 물을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수가성의 여인은 이 세상의 부족과 목마름을 남자로 채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뒀고 지금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동거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와 상처를 드러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수가성의 여인은 종교적인 얘기를 꺼내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게하고 이 예배는 한 곳에서만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율법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해결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큰 목마름을 느꼈던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장소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며, 그런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자, 그리고 그녀 역시 기다려온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자신을 찾아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물 항아리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우리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등장했던 도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을 기르기 위해 가져왔던 하지만 비어 있었던 돌 항아리에 성령님 곧 물이 등장하고, 그리스도 곧 보혈이 등장하게 되자 항아리를 버리고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서 자신을 왕따시키던 사람들에게 나아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역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과 우물가에서 만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만나신 장소 역시 가나의 혼인 잔치를 설명하는 장치로써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우물은 배우자를 만나는 운명의 장소로 자주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라헬을 만나는 야곱이나 십보라를 만나는 모세, 이삭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리브가를 만나는 아브라함의 종도 모두 우물에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우물가에서 수가성의 여인 마치 호세아의 아내 고멜 같이 부도덕하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죄인 즉 하나님의 백성을 신부로 맞이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물가로 찾아오셨습니다.
첫번째 표적에 대한 결론을 정리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의 가장 위에 있는 사람과 가장 아래 있는 사람의 대표로써 하늘 아래 사람 중 예수님의 칭의 없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만큼 선하고 잘난 사람도 없고 그와 반대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지 못할 만큼 못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가장 핵심 즉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며, 또 동시에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요한복음의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표적 :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살린 예수님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이 글의 초반에 요한복음의 표적들 뒤에 사람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강해가 등장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두번째 표적과 세번째 표적 이후의 강해와 오해가 5장에 붙어서 나와서 같이 소개를 해 드립니다. 마찬가지로 네번째와 다섯번째 표적도 같이 나눌 예정입니다.
4장에서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사건 뒤에 요한은 잠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함을 기록하고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고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4:44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대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음을 기록하는데, 그 바로 다음절에 요한은 보란듯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고관의 이야기는 이 모든 것이 열쇠가 되어서 풀리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즉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을 봤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를 연상케하며 단 하나의 기적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수가성의 여인 그리고 사마리아에 사람들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41~42>
예수님께서 첫번째 표적을 보여주신 가나에서 이 고관은 자신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으로 와서 아들의 병을 고쳐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고관을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고쳐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아니고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며 책망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는 이유를 나타내 보이신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고관에게 아들이 살았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자, 고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매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라. <요한복음 4:50>
지금 고관은 죽어가던 자기의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표적을 보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자, 그 말씀 만을 믿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이 고관은 결국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 그 같은 시간에 아들이 병에서 나았음을 듣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며 5장으로 넘어 갑니다.
5장에서는 유대인의 명절로 인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일어난 사건이 등장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에도 주목해 봐야 합니다. 6장에서 유월절, 7장에서 초막절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5장에서는 유대인의 명절이라고만 하고 어떤 명절인지는 밝히지 않은 이유는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안식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함일 것일 겁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인데, 이 세 절기는 모두 안식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성회 즉 모든 남자들이 모여야 하는 절기 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표적이 한 명절에 그것도 안식일에 일어난 일임을 통해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또 그냥 절기 혹은 명절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70번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일반 유대인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사용합니다. 요한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이 사건이 유대교라는 종교를 예수님의 은혜와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넌지시 비춥니다.
장소적 배경을 보면 양 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양 문은 이름 그대로 양이 드나드는 물인데, 그냥 아무 양이 드나들었던 문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기 위한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었고, 베데스다는 자비 혹은 은혜라는 뜻의 헤스다(בית חסד)와 집이라는 뜻의 벳 (חסדא)의 합성어로 은혜의 집 혹은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의 장소 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연못에는 전설이 있었는데, 천사가 물을 휘저은 후 가장 먼저 들어 가는자는 누구든지 병이 낫는다는 것 입니다. 아마도 이 곳의 물이 온천수이거나 특별한 성분이 있어서 치료에 용의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이 곳에서 병을 고친 귀부인이 큰 돈을 기부했다는 비문이 발견됨으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대로 병자들이 병을 고치는 장소로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곳에 있던 많은 병자들 중 피부병이 있는 환자도 있었을 것이고 근육통이 있었던 환자도 있었을 텐데, 요한은 이 곳에 허약한 자, 눈먼 자, 다리저는 자, 몸이 오그라든 자들의 큰 무리가 있었다고만 얘기합니다.
수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무려 38년 동안 이 곳에서 물이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려는 한 남자를 만나 그와 대화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일어나 걸을수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연못물이 움직이고 가장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고 싶은지를 물어보십니다. 그 때 이 병자는 온전하게 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 대신 아무도 자기를 물 속에 넣어주지 않아서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즉 38년된 병자는 은혜의 집에서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병이 낫고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요한은 스스로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38년 된 병자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이 38년 된 병자 안에는 바리새인들도 있고, 제사장들도 있고, 우리도 있는 것 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의 기간이 삼십팔 년이라. 마침내 이때에 군사들의 모든 세대가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 군대 가운데서 소멸되었나니 <신명기 2:14>
이 사람들은 정탐꾼들을 보내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가나안 땅의 거인들을 이기지 못할거라고 한탄하고 모세를 원망하다가 율법을 받고 38년간 광야를 떠돌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으라고 명하시자, 이 병자가 온전하게 되어 자기 자리를 들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38년간 광야를 떠돌다가 자신을 신뢰하던 사람들이 다 죽고나서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스스로에게 어떤 능력이 없음에도 멍청하게 연못가에 들어가면 병이 나을거라고 소망을 갖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로 구원을 얻는 이야기가 오늘 세번째 표적이 설명하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필이면 이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분명히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문제 때문에 곤란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왜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병자를 고치셔야 했을까요? 이 표적뿐 아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표적을 보여주시다가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유대교 사람들은 안식일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가령 1,000보 이상을 걸으면 안된다거나 어떤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를 정해서 이를 어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데, 이는 율법이 결국 은혜의 예수님을 죽일수 밖에 없다는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결국 두번째와 세번째 표적의 메세지를 정리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베데스다 즉 은혜의 집을 제공하셨지만 안식일을 대표로한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불가능한 인간들이 죄로 인해 죽어가지만 그 사람들중 은혜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가 그를 세우시면 단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방법은 절대로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믿고 신뢰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특히 종교인들이 이를 어떻게 오해하는지 예수님께서 이를 어떻게 설명하시는지를 보시면 이 메세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네 자리를 나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하매 <요한복음 5:10>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하루 아침에 멀쩡하게 나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게 아니라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나르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고 책망합니다.
안식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이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셔서 안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님들이 여행 계획을 짜고, 돈을 모으고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워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한게 없지만 신나는 여행지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안식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쉼을 주고 생존을 위한 일에서 자유하라고 주신 것이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완전한 천국을 아주 약간이라도 맛보고 소망하라고 주신 것인데, 인간의 종교성은 이 안식일 마저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특별한 일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통해 안식일을 지켰냐 지키지 못했냐를 선악 판단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11>
첫번째로 고대 사회에서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던 일주일이라는 생활 싸이클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언약 백성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에는 안식일을 표징 즉 언약의 징표라고 하는 것 입니다.
또 거기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맺은 언약의 징표로 ‘안식일’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야말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주’인 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에스겔 20:12 – 쉬운말 성경>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 입니다. 타락한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 입니다. 즉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으로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성경은 유독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장면을 많이 등장시키는 것 입니다. 진짜 안식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새 창조를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기만 하면 복 받을거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즉 영생이란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을 하신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 설명을 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무슨 일들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요한복음 5:19>
인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이시면서도 겸손하게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할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것이 있을까요? 요한복음 5장은 계속해서 안식일을 매개체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로이니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인본주의에 빠진 인간들에게 그것을 포기하고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하는것 입니다.
또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그 은혜를 받아들여 영생을 얻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요한복음 5:24>
그리고 말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시는 분이 아버지라고 하시며 그 근거가 성경이라고 다시 얘기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고 그 말씀안에 영생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평생 성경만 연구해 온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7~40>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것이 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 5:46~47>
안식일을 예로 들어 율법 즉 성경이 사실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신 것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성경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계속 지키려 했지만 그들은 38년 된 병자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임을 가리키는 것 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수 없을뿐 아니라 스스로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바리새인들 처럼 성경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의 능력으로 성경을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났고 그들의 성경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인간들은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지식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창조주 이시며 구원자이신 우리의 유일한 소망, 은혜가 넘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그 분이 주실 영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의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표적 :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가장 유명한 사건을 들으라면 오병이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아이가 갖고 있던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만 5,000명이 넘게 배부르게 먹이신 이 기적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잘 아는 사건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 표적의 의미를 단순히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을 배부르고 기분좋게 했다! 정도로 축소 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당시에 사람들도 했었으며 예수님은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시고 나무라시기 까지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걷는 기적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거나 쇼를 하신게 아닙니다. 그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복음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5장이 유대인의 명절에 일어난 사건이었던것 처럼 6장이 유대인들의 명절 유월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벌어진 7장의 사건과 함께 유대 절기의 참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것임을 인지하고 본문을 읽어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는데,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5장에서 기적이 아닌 말씀을 봐야 한다는 예수님의 강해에도 사람들은 각 표적의 참된 의미인 영생의 메세지 대신 자기의 눈에 신기하고 이 땅에서 당장 도움이 되는 기적에 주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더 심해 집니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오해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강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로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그 양식을 위해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그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봉인하셨느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26~27>
다시 얘기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세상의 떡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재밋는 것은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스스로를 하늘의 떡으로써 이 세상에 만족을 위해 온것이 아님을 나타내자,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랐던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 입니다.
우선 처음에 말씀드린 유월절에 대해서 언급을 하자면 요한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켜 복음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이 두 표적을 본 사람들 역시 이를 출애굽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진실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모세가 신명기에서 얘기한 대언자 곧 그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신명기 18:15>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통해서 인간의 타락 이전의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꿈꿨었고, 출애굽이 그들의 꿈을 이뤄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듯이 자신들의 타락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제 2의 출애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이 예언을 근거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제 2의 출애굽을 재현할 것이라고 보고 그 대언자는 다윗 왕국과 같이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보면,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장소적 배경을 보면, 요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사건이 빈들이라고 밝히는데 빈들에 사용된 헬라어는 에레모스(Ἔρημός) 즉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이신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인 사건을 연상하게 되고 이 표적으로 보고 예수님이 바로 그 대언자라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던 것 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걸어가시는 사건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맞물려 유대인들의 생각을 공고히 해줬을 것 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예언을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그 대언자이심을 알아차렸는데 한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그들은 메시아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단 것 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영원히 세울것이라는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도 예수님의 표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분처럼, 나에게 돈을 주시고 좋은 성적이 나오게 해주시고,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우리들의 이런 오해가 결국 나와 하나님을 멀어지게 만드며 제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왕 삼기 위해 예수님을 찾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산으로 떠나십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만난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으시고 매몰차게 이들의 잘못된 의중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썩어 없어질 이 땅의 양식이 아닌 영원한 하늘의 양식을 위해서 수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요? 어떤 수고를 할까요? 라고 묻자 착한 일을 하여라, 다른 사람을 도와라, 금식해라, 헌금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어라!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반복하고 반복해서 자신이 생명의 빵이며 자신을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번째로 위에 설명드렸듯이 홍해를 건너가게 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써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역시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은혜로 얻어지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어부로써 수십년간 배를 몰아온 전문가들 입니다. 그런데 날이 어둡고 큰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심해지자 바다 위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 것을 보자 두려워 하지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자 반갑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배가 곧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능력이나 능숙함이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할 때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 즉 천국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 하십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이 바다에 빠질 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을수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셔 말씀하실때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알아보는 자들이 영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정론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하시는데, 말씀은 분명하게 인간에게는 구원의 좁은 길을 스스로 알아 믿을 능력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알려줍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6:44>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도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65>
이는 5장에서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듣는 자들이 살 것이라는 말씀 즉 어떠한 의지나 의식도 없는 죽은 자들이 사는 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시고 음성을 듣도록 해주시는 것에 달려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 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실망해서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소원 성취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정의가 회복되지 않는다고 느껴지고 내가 바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의 비젼이 무엇인지에 전혀 관심이 없이 나의 꿈, 나의 소망, 나의 비젼을 위해 살다가 예수님이 아닌 무당이 그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고 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맡기지 않은 자들 입니다.
하나님 처럼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꿈과 위치가 위협 당하면 2세 이하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인 헤롯처럼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의도를 갖는 죄인 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루어 줄 것 같아서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것을 이뤄줄 의향이 없음을 확인하자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다니려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더라. <요한복음 7:1>
요한은 5장의 안식일, 6장의 유월절에 이어 7장과 8장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해서 동일한 메세지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오해하는 이스라엘을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메시아가 아니라 초막절이 상징하고 있는 구원을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7장과 8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막절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 남성들은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는 성전에 나가야 하는데, 이는 출애굽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 절기들을 통해서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구원의 역사에 감사하고 이 출애굽이 가리키고 있는 진짜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소망하라고 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의미로써만 절기들을 지켜 왔습니다. 이는 마치 선생님께서 오늘 배운 것을 다시 생각하고 이해하라고 숙제를 내주셨는데, 배운 내용에 대한 이해에는 관심도 없이 전과에서 답만 베껴서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과 같은 것 입니다.
초막절은 이름 그대로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살던 때를 기억하라고 해서 주어진 절기 입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것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그들로 하여금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세대들이 알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위기 23:42~4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 3가지 의식을 행해야 했는데, 첫번째로 일주일 간 텐트를 치고 사는 것입니다. 텐트 특히 성막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두번째로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서 성전을 제단에 부어서 성전 제단에서 물이 흘러 넘치게 해야 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반석의 생수로 먹이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초막절 기간 동안 성전에 커다란 촛대를 세우고 그 불을 항상 밝게 켜야 했습니다. 이 역시도 광야에서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에서 자신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초막절이 이 상징적인 행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장막을 치신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구절 중 거하신다라는 단어의 원어는 스케누(σκηνόω) 인데, 이 단어는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라는 의미 입니다. 우리를 저주 받은 이 땅에서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참장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탄의 어떤 공격으로 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1:3~4>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모든 눈물과 저주가 사라지는 천국에서의 삶을 초막절이 담고 있었던 것 입니다.
또 성전 제단에서 흘려 보내야 했던 실로암 연못의 물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므리바에서 반석의 물은 물이 없어서 죽을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에게 부어질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 <고린도전서 10:4>
그 뒤에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그 집의 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그 집의 문지방 밑에서부터 물들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더라. 이는 그 집의 앞면이 동쪽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더라. 그 물들이 그 집의 오른쪽 곧 제단의 남쪽 편에서부터 내려오더라. 그때에 그가 나를 북쪽을 향한 문의 길에서 데려다가 바깥 길로 인도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길 옆의 바깥문에 이르렀는데, 보라, 거기서 오른쪽에서 물들이 흘러나오더라… 그때에 그가 내게 이르되, 이 물들이 동쪽 지역을 향해 흘러나와 사막으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가리니 그것들이 바다로 들어갈 때에 그 물들이 치유되리라. 그 강들이 이르는 곳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살고 또 물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는 이 물들이 거기에 이르므로 그것들이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라. 그 강이 이르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살리라. 또 어부들이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그 강 위에 서리니 그 지역들이 그물을 치는 곳이 되리라. 그 지역들의 물고기가 그것들의 종류대로 대해의 물고기같이 심히 많으리라. 그러나 그 지역들의 수렁과 늪지대들은 치유되지 아니하고 소금에게 넘겨지리라. 또 그 강가의 둑 위에는 이쪽과 저쪽에 먹을 것을 맺는 모든 나무가 자라되 그것들의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것이 자기의 달들에 따라 새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물들을 성소에서 내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의 열매는 먹을 것이 되며 잎사귀는 약이 되리라. <에스겔 47:1~12>
잘 읽어 보시면 성전에서 흘러 넘치는 물이 만물을 살리며 흐릅니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래서 7장 37절에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자신이 초막절의 주인이며 완성이심을 밝히시는 것 입니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7:37~38>
우리가 그냥 읽었을 때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말씀이었던 것 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실로암에서 물을 떠다가 성전에 붓고 있었을 것 입니다. 주님은 그 앞에 서서 이 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들에게 너희들 절기를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마셔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고 계신것 입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 모든 것이 천국에서 완성되어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을 내게 보여 주니라. 그 도시의 거리 한가운데와 강의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그것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달마다 자기 열매를 냈으며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
에스겔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들이 등장해서 설명합니다. 그게 바로 새하늘과 새땅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어 있음을 요한이 알려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초막절에 성전을 밝히던 촛불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2>
이 말씀도 아무렇게나 뜬금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밝히는 가득한 촛불 앞에서 저 촛불의 실체가 나라고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9장에서 생명의 빛으로써 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고치시는 것 입니다.
나 주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붙잡고 너를 지키며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들의 빛이 되게 내주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며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오고 어둠 속에 앉은 자들을 감옥 집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 42:6~7>
이 역시 요한은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완성하신 빛에 대해 기록 합니다.
그 도시는 해와 달이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23~24>
이렇게 초막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이는 오병이어의 표적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단순히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당시 예수님을 찾아온 이스라엘 사람들 처럼 다시 한번 떡을 주세요! 다시 한번 기적을 일으켜 주세요!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어지러운 이 세상 조율 한번 해주세요! 라고 예수님께 부탁하라고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영생에 관한 것이며 천국에 관한 것이며 사도 요한은 이미 이 완성을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갖도록 해줍니다.
이제 여섯번째 표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과 말씀들이 영생에 대한 것임을 명확하게 하는 구절 두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24>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그인 줄을 알며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내가 이것들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요한복음의 여섯번째 표적 : 날 때 부터 보지 못했던 자의 눈을 뜨게하심
이미 지난 다섯개의 표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으셨다면, 앞으로 등장할 두가지 표적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그를 통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임을 아실수 있으실 겁니다. 사실 성경을 자세히 묵상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도, 이런 기적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관점에서 하시는 설교를 많이 들어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합니다. 예를들어 많은 분들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자기가 먹을 빵과 물고기를 모두 드린 아이의 마음을 본받자 등의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설교를 하시지만, 사실 표적들이 담아내는 메세지는 너희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내용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의 눈을 뜨게하시는 표적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의 죄 때문에 눈이 멀었는지,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멀었는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눈이 먼 이유를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이 구절을 읽음으로 우리는 이번 표적 역시 눈을 뜨게하는 자체가 아닌 그 너머에 더 심오한 메세지가 숨어 있음을 의식하고 읽어야 할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에서 강해를 한 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I AM” 때문에 유대인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자 몸을 피해 성전 밖으로 나가면서 끝나는 8장 다음에 붙어 있습니다. 7장과 8장에서 초막절에 대한 배경과 초막절에 있는 세가지 의식 즉 장막을 치고 사는 것, 실로암에서 물을 퍼다가 성전에 부어 흐르게 하는 것, 성전에 촛불을 가득 밝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드렸는데, 오늘 소경의 눈을 뜨게하는 사건은 그에 대해 더 깊게 설명하는 표적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9:5>
예수님은 소경을 고치시기 전에 빛으로써의 자신을 선포하시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앞 못보던 자의 눈을 볼수 있게 해주셨구나! 정도로 끝나는 메세지가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세상 죄인들의 눈에 빛을 비추셔서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구원의 이야기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요한은 앞 못보는 소경이 날 때 부터 보지 못했음을 얘기합니다. 즉 예수님은 어쩌다가 눈이 멀게된 사람이 아니라 태어났을때 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 즉 다윗의 표현을 빌어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죄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볼수 있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태어날 때 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고 했을때에 보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에이돈(εἶδεν)은 알다, 경험하다라는 뜻과 같이 쓰입니다. 즉 예수님이 소경을 봤을때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다라는 의미보다도 그 사람을 이미 아셨으며 사실상 그 사람을 찾아갔다라는 의미에서 에이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도 몰랐고 예수님을 부르지도 눈을 뜨게 해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 입니다. 나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도 어떻게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태초부터 아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게 구원의 방법이며 이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소경을 고치실까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내어졌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자기 길로 가서 씻고 보게 되어 왔더라. <요한복음 9:6~7>
흙은 저주 받은 죄인들과 그들의 죄를 총칭하는 소재였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세기 3:14>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자신과 흙을 즉 저주를 섞어 버리는 것 입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 즉 환부에 붙여져서 결국 실로암 물에 빠져서 죽는 모양으로 구원이 이루어 짐을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8장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9장에서 소경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고 소개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 붙입니다. 그리고 9장에서 유대인들은 소경이 보지 못했다가 보게 된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네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하매 <요한복음 8:13>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에 관한 일 곧 그가 눈멀었다가 시력을 받은 것을 믿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시력을 받은 사람의 부모를 불러 <요한복음 9:18>
또 8장에서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증거하심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증언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얘기하고, 9장에서는 소경의 부모가 아들에 대해 증언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가 나도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8~19>
그의 부모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난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요한복음 9:20>
또 8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9장에서는 눈 뜬 소경을 유대교에서 쫓아 냅니다.
8장에서는 자신을 보내심을 받은자라고 설명하시고 9장에서 소경은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내어졌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자기 길로 가서 씻고 보게 되어 왔더라. <요한복음 9:7>
이렇게 8장과 9장은 굉장히 흡사한 구조로 전개되는데 가장 놀랍게도 하나님께만 쓰이는 단어인 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라는 단어를 소경이 사용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눈먼 것을 본 사람들이 이르되,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하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는 그와 비슷하다, 하나 그는, 내가 그로다, 하니라. <요한복음 9:8~9>
요한은 지금 의도적으로 비슷한 구조와 단어들을 사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즉 다른 말로 더러운 티끌과 이겨지셔서 죄인의 환부에 붙여지시고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이 되셔서 실로암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소경이 그대로 판박이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자가 그 눈에 진흙을 이겨서 바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소경이란 것을 세상에 광고하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낮아진 모습으로 실로암에 보내어지는 것 입니다. 소경은 자기를 보내신 분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면서 그는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실로암에 도달 합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여 있는 곳 즉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곳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그 가장 낮은 곳에 조롱과 멸시의 모습으로 내려가서 자기를 보내신 명령에 따라 무릎을 꿇고 눈을 씻는 것 입니다.
하늘 보좌에 있던 예수님께서 이 낮은 땅위에 보내심을 받은 그대로 내려오셔서 죄인의 추한 몸을 입으시고 침과 흙이 이겨지듯이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갖은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보내신 이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십자가 까지 지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소경의 삶에 그대로 전가가 되고 있음을 8장과 9장의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즉 성도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야 함을 그리고 그럴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
즉 성도의 삶이란 가장 낮은 실로암 못까지 가면서 그곳에서 조롱과 멸시와 비난을 들으며 그럼에도 보내신 분의 명령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며 이런 삶을 성경에서는 자기 부인의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 입니다.
그렇게 소경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 말고 자신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결국 그들에게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그가 쫓겨 남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시며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내어 믿을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날때 부터 눈멀었던 소경은 빛이신 예수님의 보내심으로 앞을 볼 수 있게되었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구원의 방법 즉 하나님의 일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눈멀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눈멀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예수님은 자기들이 눈멀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고 얘기하지 않고 눈 멀게 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7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햄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랐음을 근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무지에 의한 착각이지 사실이 아닌 것 입니다. 그 후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치리자나 바리새인들 중에 그를 믿은 자가 있느냐? 오직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로다, 하거늘 <요한복음 7:48~49>
자신이 율법을 잘 안다고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이 사실은 눈먼 소경과 같은 처지에 있고, 그들이 무시하고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던 소경은 예수님이라는 빛에 의해 볼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위대한 인간의 힘으로 세상의 창조도 알 수 있고 구원의 방법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빛이신 말씀이신 예수님이 아니면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시는 편 입니까?
요한복음의 일곱번째 표적 : 죽은 나사로를 살리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표적에 당도했습니다. 표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정리해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 분이 이 땅에서 이루려고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표지판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표적들을 그 나타난 현상만 보고 오해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특히 이스라엘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해주실 잘못된 메시아로 생각했고,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거절하며 예수님이 진짜 주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를 강해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 피날레를 장식하는 일곱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을까요? 우선 나사로의 이름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 혹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함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두번째로 복음서에는 또 다른 나사로가 나오는데, 누가복음 16장에서 나오는 거지 나사로 입니다. 이 비유 끝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부자가 나사로를 살려주셔서 자기 친족들이 회개 하게 해달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그 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6:31>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해서 누가복음에서 했던 비유를 그대로 증명해 보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 내셔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되자 종교 지도자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은 물론 나사로도 죽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부터 계속해서 말씀하시던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 즉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 즉 성경을 보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자들이 살아나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나타나 기적을 일으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냐며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제한된 관념만을 갖고 판단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 입니다.
이제 마지막 표적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표적 역시 예수님께서 죽은자의 부활을 통해 자신을 믿는자의 영원한 생명을 얻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 입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요한은 이 표적을 가깝게는 첫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를 빗대어 그리고 멀게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12 지파를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과 대조해서 이 표적이 구약때 부터 예언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 즉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 <요한복음 11:25~26>
요한복음의 11장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던 여인임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는 곧바로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것 입니다.
11장 앞에 붙어 있는 10장 39절에서 42절까지의 내용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으나 벗어났고 예수님은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푸셨던 장소로 가서 머무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등장합니다. 이는 사실 요한복음 1장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놓은 것 입니다.
빛이 오셨는데 그 빛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절당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증거하는 누군가가 등장하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뒤 7일째 되던 날 일어난 가나의 혼인잔치의 표적이 즉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에서의 포도주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했듯이 지금 동일한 구조로 일곱 번째 표적으로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는 것 입니다. 즉 요한은 첫번째와 마지막 표적이 같은 메세지를 담고 있는 다른 사건임을 표현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같은 구조를 사용하는 것 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잔치도 아니며 이는 슬픔인데, 여기에 예상치도 못하게 포도주가 생김으로 슬픔의 잔치가 기쁨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은 슬픔인데 불가항력적 은혜가 쏟아져서 그가 살아났습니다. 기쁨이죠. 둘 다 슬픔에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나며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들어가 있는 것 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포도주로 기쁨의 잔치가 되었고, 나사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제로 부활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의 출애굽 사건, 교회의 구속 사건이 그림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 입니다.
다시 요르단 건너편 곧 요한이 처음에 침례를 주던 곳으로 가셔서 거기 거하시니 <요한복음 10:40>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가기 전에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동쪽에서 이 세상 그 누구도 무너뜨릴수 없는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듯이 요단강 동쪽에서 12지파를 상징하는 12 제자들을 데리고 세상의 권세와 사망을 무너뜨리기 강을 건너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는 예슈아 즉 예수 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온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시팀에서 떠나 요르단에 이르렀고 그들이 건너기 전에 거기서 머물렀더라. 사흘 뒤에 관리들이 군대를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언약 궤와 그 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을 보거든 너희 처소를 떠나 그것의 뒤를 따르라. <여호수아 3:1~3>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고 셋째날에 강을 건넜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시죠.
셋째 날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있었고 <요한복음 2:1>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가 병들었다는 것을 들으신 뒤에 자신이 계시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고 <요한복음 11:6>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가실때에도 나사로에게 갈 때도 3일째에 떠나셨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또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 홍해를 건넌 출애굽 사건과 비견이 된다는 것을 얘기 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홍해를 우리 앞에서 마르게 하신 것 같이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건널 때까지 요르단의 물들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셨나니 <여호수아 4:23>
이는 모세가 홍해를 가른 사건, 여호수아의 요단강 도하 사건, 가나의 혼인 잔치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사건이 모두 같은 메세지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은 모세가 상대했던 절대 권력의 파라오, 여호수아가 무너뜨렸던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도 상대할 수 없는 사망을 어떻게 예수님의 능력으로 박살 내시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사건 바로 다음에 주님의 유월절이 등장하는 것 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게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유월절이 등장합니다. 즉 죽음에 붙들려 있던 나사로가 죽음에서 풀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에는 주님의 유월절 즉 어린양의 십자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함이 드러나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자 마자 처음 지킨 것이 유월절인 것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길갈에 진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 여리고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다음 날에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되 바로 그 날에 누룩 없는 납작한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여호수아 5:10~11>
사망에 사로 잡혀 죽을수 밖에 없는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약속의 땅인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것은 무죄한 어린양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임을 알려주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이 모형으로 보여지는 것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이라는 것 입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상징하며 나사로의 부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죽어 있고 죽을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남을 상징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있던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그렇게 그들의 죽음이 되어 죽었다 다시 살아남을 상징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리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11:4>
그래서 나사로는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완전히 죽어야 했으며 예수님이 병에 걸렸다고 말씀을 들었음에도 이틀을 더 기다리신 것 입니다. 이는 죽음에 묶여 완전히 죽은 인간의 상태와 완전히 죽어서 장사 지낸바 된 예수님의 상태를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단순히 병이나 고쳐주기 위해서 혹은 죽은 자를 살려서 이 땅에서 더 오래 살게 하기 위해 오신게 아니란 뜻 입니다. 그리고 이게 진짜 사랑입니다. 어차피 100년 뒤면 죽을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곳에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백성들에게 영생의 메세지를 전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그 진짜 메세지를 놓치면 안되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즉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은 이 말씀을 알아 듣습니다.
그렇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어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한 양이 바로 마리아 입니다. 그래서 12장에서 마리아가 300 데나리온 오늘날로 치면 몇만불 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는 것 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후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종교 지도자들이 명절때에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명절이 지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유월절에 예수 그리스도 즉 어린양을 잡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표적 뒤에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13장에서는 때가 왔음을 아셨으며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 입니다.
이제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던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이는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언 했듯이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백성 전체가 멸망치 않는 방법이며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줄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더라. <요한복음 11:5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바라는 이 세상의 것을 예수님께 구했거나 그것을 바라며 예수님을 왕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놨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비해 너무도 터무니 없는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 영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돈을 주지 않으셨거나, 부모님이 이혼해서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거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거나… 등등등
또 하나님을 계속 믿는것 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해주고, 우리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게 해주시고, 우리나라가 부자가 되고 강대국이 되게 해달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아니거니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던 그분이 선하시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꿈과 나의 비젼이 무엇이던 그것이 하나님의 비젼과 반대 된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비젼은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택하신 마지막 한 사람이 그 구원을 이뤘을 때 우리가 고대하는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게 되십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내가 진정 예수님을 내 삶의 왕으로 모셨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