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다 아내 사라의 권유로 여종인 하갈과 동침을 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였습니다.
100세가 된 아브라함과 99세가 된 사라는 자신들에게 더 이상 아들을 낳을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을 내려 놓았을때 아들을 얻는데 그가 이삭 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복음의 어떤 메타포를 갖고 있을까?
성경은 실제로 일어났거나 일어날 사건 외에 그 사건 뒤에 숨겨져 있는 메타포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사이에는 어떤 메타포가 있을까요?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노예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났고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들은 풍유니라.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인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 종이 되게 하는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요,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으로 자기 아이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느니라.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2~25>
우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힘과 능력으로 낳은 아이 즉 율법을 상징 합니다. 우리는 자꾸 무언가를 우리 힘으로 이루려고 합니다. 심지어 구원 마저도 우리의 선행과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약속을 의미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데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유로운 어머니를 통한 약속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 합니다.
사라가 보니 이집트 사람 하갈의 아들 곧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이삭을 희롱하더라. <창세기 21:9>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브라함의 진짜 아들이 태어나자 아마도 모든 사랑을 이삭이 독차지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이삭을 놀리고 괴롭혔겠죠.
은혜를 놀리는 율법
이것은 세상이 갖고 있는 관점입니다. 세상은 은혜를 싫어하며 핍박 합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 선행을 베풀어 내가 칭찬받기에 또 구원받기에 그래서 천국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의지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기 원하는 것을 값싼 복음이라며 터부시 합니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희롱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붙잡아 넘긴것은 당시 율법주의자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칭찬받을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든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의 힘과 능력 율법 지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수 있으며, 가인에게 죽임당한 아벨과 마찬가지로 이삭은 이스마엘에게 희롱을 당합니다.
하지만 결국 율법주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 것이며 예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노예 여자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 노예 여자의 아들이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느니라. <갈라디아서 4:29~30>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작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유하게 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상속받을 것이며 예수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심지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에게 그런 특권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따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디도서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