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점점 더 많은 사역자/신학생들이 성경이 말하는 젊은 지구론보다 세속 과학이 말하는 오랜 지구론을 더 신뢰하며 그 근거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강조하는 사역자들 중 정말로 과학적 증거를 이해하고 말하는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오랜 지구론이나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학 이론의 맹신에 의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랜 지구론을 지지하는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출애굽은 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되 묻고 싶습니다. “과학적 증거”를 통해 오랜 지구론을 지지하는 사역자 분들은 출애굽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어떤 증거를 갖고 계시며 제시하실 수 있으십니까?
현재의 주류 고고학은 출애굽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거 때문에 젊은 지구론을 부정해야 한다면 증거때문에 출애굽도 부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죠. 이는 완전한 이중잣대 입니다. 그냥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겠다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떤 분들은 창세기 1~11장의 경우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출애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11장에 여러 해석이 있을수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출애굽에 다른 해석이나 출애굽기 기록의 다른 목적이 있을수 없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 최대 유대교 종파의 지도자인 마이클 월피 랍비는 한 라디오 토크쇼에 나와서 자신은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출애굽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류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출애굽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는 어떤 증거들을 갖고 계십니까?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믿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증거 때문에 지구가 46억년 되었다고 말하면서 증거가 없어도 출애굽은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여러분들은 위선자입니다.
물론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무지와 편견, 고집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를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지구가 젊다라는 수많은 증거들 역시 편견때문에 또 무지때문에 무시하는 분들에게 왜 주류 고고학자들이 출애굽을 인정하지 않는지 그들의 실수와 무지와 증거없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실수 1: 모세와 다툰 왕 람세스
찰튼 헤스턴과 율 브린너 주연의 영화 십계는 출애굽에 대한 내용을 다룬 1956년작 영화입니다. 찰튼 헤스턴이 모세의 역을 맡았고 율 브린너는 이집트의 파라오 즉 람세스 역을 맡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의 왕을 람세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 있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 1:11>
즉 출애굽기 1장에 식량을 저장해 두는 저장성인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다는 구절 때문입니다. 라암셋은 람세스 2세때 건축이 되었으니 이 때의 바로는 람세스라는 논리이지요. 일견 논리적인것 같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창세기 47:11>
출애굽기 1장보다 400여년 전의 기록인 요셉이 총리인 시기 즉 창세기 47장에도 라암셋이라는 땅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논리라면 400년전의 파라오도 람세스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만 보고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일부는 무시해 놓고는 성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후대에 성경 사본에서 독자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고대의 지명대신 현재의 지명으로 대체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는게 훨씬 타당합니다. 그리고 주류 고고학자들은 이 너무나도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해서 출애굽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수 2: 열왕기상의 시삭은 누구인가?
이집트학(Egyptology)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면서 군대만 준비한게 아니라 역사학자, 미술가, 공학자들도 동행시켜서 이집트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시킨 것이 그 시작입니다. 60년대 이집트를 통치했던 나세르도 나폴레옹이 이집트 역사를 위해 공헌한 것에 대해서 인정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물론 당시 프랑스의 국교는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을 믿고 있었고, 샴폴리옹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는 한손에 성경을 들고 이집트를 찾았습니다. 특히 샴폴리옹은 처음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했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는 왕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었죠. 그는 이집트에서 자신의 해독이 맞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카낙으로 가서 쇼셍크 왕의 전쟁 기록이 있는 The Bubastite Portal에 가서 내용을 해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Yudah-ha-Malkuth 즉 유다 왕국이라는 뜻의 기록을 발견하고는 이를 역대하 12장의 내용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대하 12:2>
고대 이집트 문자나 고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 기록하기 때문에 Sysq(시삭)과 쇼셍크는 이름이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졌고 역대하 12장에 나오는 시삭은 22대 왕조의 쇼셍크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모든 이집트 연대의 기준이 됩니다. 즉 르호보암 5년인 BC 925 그 20년전인 BC945에 즉위한 쇼셍크 왕을 기준으로 모든 파라오들의 통치 기간을 계산해서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이집트 연대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20년 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한 초기보다 더 발전했을때 샴폴리옹이 유다 왕국이라고 해석했던 부분은 Yudah-ha-Malkuth가 아닌 Yad-ha-Melek 즉 왕의 손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 바뀌면서 역대하의 내용대로 쇼셍크가 유다를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보호해 주었던 여로보암의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그 주변 나라를 공격하되 유다만 빼고 공격을 한 것이 되버린 겁니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열왕기상 11:40>
시삭이 쇼셍크라면 왜 쇼셍크는 자신이 보호하던 여로보암은 공격하고 적대하던 르호보암의 유다는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성경은 시삭이 유다를 공격했다고 기록한 것일까요?
이는 시삭이 쇼셍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고고학자들은 해독이 완벽하지 않던 시대의 샴폴리옹의 잘못된 해석을 지금까지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실수 3: 내가 원하는 것만 진실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
고고학자들은 단순히 샴폴리옹의 잘못된 해석을 받아들이는 오류만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논리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성경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가 출애굽 480년 후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열왕기상 6:1>
하지만 주류 이집트 연대에 따르면 쇼셍크 1세와 람세스 2세는 약 200여년의 연대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기준삼아 만든 연대기에 오류가 있거나 성경에 등장하는 파라오가 오류라고 결론 내렸어야 합니다. 즉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믿을만한 사실로 인정을 하거나 모든 것을 다 믿을수 없는 픽션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신들에게 필요가 없는 것들은 버리는 이중잣대를 들이대었습니다.
성경은 완벽한 책입니다. 10+20+30+40=100이라는 식에 40을 4로 바꾸면 등식이 성립이 되지 않듯이 인간이 자기 멋대로 성경의 내용을 바꾸면 당연히 성경이 틀린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고고학자들은
- 성경을 기준 삼아 (잘못된 해석으로) 쇼셍크 1세의 연대를 945 BC로 정해 놓고
- 나머지 성경 내용을 모두 무시한 후
- 성경에 나오지 않는 출애굽때의 왕을 람세스 2세고 규정한 후
- 출애굽이 BC 13세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특정합니다.
- 그리고 BC 13세기에 출애굽이나 여리고 성의 정복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없자
- 성경이 거짓이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지요. 왜냐하면 6번이 참이라면 1번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순환 논리의 오류입니다.
그러면 ‘시삭’은 누구일까?
역대하 12장에 나오는 ‘시삭’이 쇼셍크 1세가 아니라면 어떤 파라오 일까요?
데이빗 롤은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이 출애굽때의 파라오라고 생각하는 람세스 2세가 ‘시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왜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할까요?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증거를 검증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첫번째 증거는 람세스 2세의 이름입니다.
람세스의 이름이라구요? 람세스와 시삭은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고대 이집트에서 람세스를 람세스라고 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완전한 착각입니다. 람세스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부르는 그리스식 이름일 뿐이고 람세스가 파라오였을때 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에게는 태어났을 때 지어진 이름과 왕으로써 불리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조의 이름이 이산이었던것처럼 람세스의 본명은 와시무리야 샤탑나리야 (Washmuariya Shatapnariay)였고, 그의 왕으로써의 이름은 리야마시샤 미아마나(Riyamashisha-Miamana) 였습니다.
그럼 당시에 그를 와시무리야 샤탑나리야, 리야마시샤 마아마나 라고 불렀을까요? 그게 그의 진짜 이름이긴 하지만 너무 긴 이름을 매번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람세스 2세를 “시샤”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문서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성경에도 그를 ‘시삭’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도 그를 시샤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고대 히브리어나 이집트 문자에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어떻게 불리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서가 있는데 이는 히타이트족의 문서입니다.
람세스는 히타이트 족과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둘 모두 상황이 여의치 못하자 카데쉬 전투 이후 휴전을 하게 됩니다. 그 휴전 조약이 진흙판에 새겨져 있는데 위에 설명한 람세스 2세의 이름 역시 이 진흙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흙판에는 람세스의 애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시샤”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역대하에 나온 이름은 시샤!가 아니라 시삭!입니다. 둘의 이름은 다른것이 아닌가요?
합리적인 질문이십니다.
이 반론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글자는 고대로 부터 계속해서 변형되어 왔습니다. 아래는 Q와 W의 변형의 역사인데, 막대 사탕 같은 모양의 글자는 BC 15세기에는 W였지만 BC 8세기에는 Q가 됩니다.
시샤와 시삭을 원시 시나이 문자 혹은 고대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둘은 거의 구분을 할 수 없지만 어느 시대에 읽느냐에 따라서 W로 혹은 Q로 읽히게 됩니다. BC 10세기 인물이었던 시샤 즉 람세스 2세는 당시에는 시샤라고 불렸겠지만 그의 기록을 읽던 후대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시삭’으로 읽게 되었을 것입니다.
람세스 2세가 출애굽 때의 파라오가 아니라 르호보암과 동시대의 파라오라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르넵타는 그의 조부였던 세티 1세 그리고 그의 부친이었던 람세스 2세 그리고 본인의 전쟁 기록을 자랑스럽게 비석에 새깁니다. 그리고 이 비석은 비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비석(The Israel Stela)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비석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 비석은 이스라엘을 당시 근동 지역의 주요한 국가로 기록하고 있으며 메르넵타 비석에는 그런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승전했음을 (그리고 그 지역의 다른 나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출애굽 때의 파라오가 메르넵타의 아버지인 람세스 2세였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기에 나라를 형성하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고 있을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보시면 더 확실하게 이 때의 이스라엘이 떠돌이 민족이 아닌 나름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다는 증거를 보실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유명한 아시켈론 벽에 있는 그림입니다. 아시켈론 벽에는 람세스 2세때의 전쟁 장면이 있는데, 가운데는 히타이트와의 조약이, 그 양쪽에는 야노암, 게셀, 아시켈론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쟁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스라엘의 전쟁화는 일부만 보존되어 있는데, 위의 그림은 아래에 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늠름한 이집트의 말과 마차가 지치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말과 마차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빨간 원 안을 보시면 거친 숨을 내쉬는 듯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집트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적군인 이스라엘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이루기 전 이집트의 노예로 있다가 애굽에서 나올때 저런 전차가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을 타고 다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울이 이스라엘을 왕으로 다스릴때도 마차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소유의 마차가 등장하는 것은 솔로몬 때 이후 입니다.
그러므로 람세스 2세는 솔로몬 혹은 그 후대의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역대하 12장 처럼 르호보암을 공격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들어 맞습니다.
증거는 더 있습니다.
BC 1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베를린 받침대의 내용 역시 이스라엘로 추정되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18대 왕조가 사용했던 조각상의 받침대로 쓰였던 이 돌판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람세스 2세는 절대로 출애굽때 이집트를 다스리던 파라오 일 수 없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논리적으로 이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내용을 입증해야 합니다.
- 쇼셍크 1세가 유다를 침략했다는 증거
- 람세스 2세가 재위하던 때에 이스라엘이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이집트에 살던 한 민족이었거나 광야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는 증거
- 람세스 2세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어떻게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국가가 마차 부대를 운영 했을 정도로 강력할 수 있었는가?
- 성경이 사실이 아니며 픽션에 불과하다면 성경을 통해 이집트 연대의 기준을 세운 것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
- 성경의 한 구절을 통해 이집트 연대의 기준을 세울 정도로 신뢰할 수 있다면 나머지 구절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는 출애굽 한지 480년이 되었던 때, 출애굽기 1장에도 라암셋 성의 건축이 언급되었지만 창세기 47장에도 라암셋 성이 건축되었다는 언급이 있는 내용 등)을 왜 성경대로 적용하지 않고 출애굽이 없었다고 판단해야 하는지?
- 이 글에는 소개하고 있지 않지만 패턴 오브 에비던스에 제기하고 있는 요셉, 출애굽, 여리고성 정복 등에 대한 증거들에 대한 반박
물론 데이비드 롤의 New Chronology도 기존 왕들의 연대에 대한 정리 등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연대에 대한 증거들 맥락들을 보면 주류 이집트학에서 제시하는 연대에 비해 훨씬 더 탄탄한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믿기 때문에 논리도 증거도 없이 억지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오류와 그 오류를 통해 내린 결론 그리고 이후 추가로 발견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주류 고고학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패턴으로 주류 과학계는 지구의 연대가 46억년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박에는 답할 수 없지만 지구가 절대로 46억년이 될 수 없다는 증거를 부정할 수 없지만 과학자들이 증거와 논리로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전과 이미지 메이킹으로 정치를 하고 있음에도 수 많은 신학자와 사역자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대신 인간의 오류가 가득한 거짓 논리를 신앙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