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와 천주교는 다른 종교 입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같은 성경을 본다고 하지만, 개신교와 천주교는 너무 다릅니다. 저 역시 초신자 때, 어차피 같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이 둘의 교리는 너무나도 다르며, 전혀 같은 종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이글은 아마 천주교 신자분들이 보시기에 마음이 불편하실 수도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이는 구원의 문제와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구원은 개신교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천주교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얻을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 <로마서 3:24~28>
천주교 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분들이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저는 성당을 다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천주교의 교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천주교의 가르침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 입니다.
사실 인터넷이나 책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비교하는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 또 개신교의 입장에서 쓴 그 글들에는 겉에서 드러나 보이는 차이점에 대해서 부터 깊은 교리의 부분, 또 역사적 사실과 예배의 방식 까지 설명되어 있는데, 저는 그분들과 조금 다른 관점에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에 대해 설명드려보고 싶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
개신교와 천주교가 다른 교리를 가질수 밖에 없는 가장 깊숙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말씀드리면 권위의 차이 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인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여러 부분들에 대해서 개신교와 천주교는 다른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작은 차이가 모든 다름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개신교는 모든 기준을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을 했던 마틴 루터는 도저히 성경이 요구하는 선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자, 신경 쇄약에 걸릴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학을 하면서까지 그 죄를 떨쳐 버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죄를 떨쳐버리지 못하다가, 로마서 1장에 있는 구절들을 통해,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개신교를 지탱하는 솔라들
그렇게 시작된 루터의 신앙은 세 가지 솔라(오직)로 대변됩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그리고 이것이 발전되어 종교 개혁의 가장 대표적인 가치, 즉 ‘천주교’와 구분되는 신앙 체계로 다섯 가지 솔라(Sola)가 세워집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모든 것의 기준과 권위,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만 있다는 것이 개신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사상입니다.
천주교가 인정하는 권위들
그에 비해 천주교는 세 가지의 권위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성경, 두번째는 전통, 세번째는 교황 입니다. 성경은 개신교와 같은 입장이니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구요. 전통에 대해서는 기록되지 않은 전통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주교는 교황 즉 교회의 황제를 교회의 가장 위에 두고, 그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 합니다. (물론 교황이 하는 모든 말이 무오하다는 뜻이 아니라 교황이 확정하고 무오하다고 선언하는 경우에 한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선포 합니다.
우선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 합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한복음 1:1>
이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얘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과 계시의 방법 등이 말씀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특히 신약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계속해서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또 구약의 예언이 성취됨을 강조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처녀였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 (이사야 7:14), 예수님께서 베들레햄에서 태어나는 것 (미가서 5:2) 등 많은 부분들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을 읽고 그에 관해 얘기하시며 (누가복음 4장), 구약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마가복음 11:2) 십자가에서도 뼈가 꺾이지 아니함을 통해 (민수기 9:12, 시편 34:20)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기록한 책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요한복음 5:39>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들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5:46~47>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누가복음 24:25>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같이 기록되었은즉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셋째 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며 <누가복음 24:44~46>
예수님께서 직접 성경 기록이 자신에 대한 것이며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의 지각을 열어서 성경 기록을 깨닫게 하시고 이를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른일을 하지 않으셨고 오직 성경에 예언된 모든 것을 성취 하시는 것에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 입니다.
사도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성경을 통해 선포 합니다.
사도들도 이를 인정하고 성경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자기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사도행전 17:2>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믿고 또 그리스 사람인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리하더라. <사도행전 17:11~12>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 안에서 말하였으되 그 안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므로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15~16>
천주교가 이야기 하는 전통에 대한 성경 기록
그렇다면 천주교가 이야기하는 전통은 어떤가요? 성경은 전통에 대해서 두가지를 얘기하는데, 첫번째는 고린도전서 11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과 3장에서 나오는 우리가 가르치는 전통을 따르라는 명령이고 두번째는 마태복음 15장, 갈라디아서 1장, 골로새서 2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전통을 통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다고 책망을 받거나 바울이 후회하는 또 따르면 안된다고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즉 사도들이 얘기하는 전통을 따라야 하지만 그와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전통도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천주교가 가르치는 전통이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들의 전통은 로마가 국교로 인정되고 성경과 관계가 없는 교리가 하나 둘 씩 세워지면서 생겨난 전통이지 사도들이 전수한 전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그들의 전통은 말씀에 어긋나는 것 입니다.
예를들면 마리아 무염시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일생동안 어떤 순간에도 죄가 없었다고 하는 주장인데, 1854년 피우스 9세 교황이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무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하게 너무도 많은 성경 구절과 상충 됩니다.
성경에 모순 되는 천주교의 전통들 – 마리아의 무염시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그들보다 나으냐? 결코 아니라. 우리는 앞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검증하여 그들이 다 죄 아래 있음을 입증하였느니라.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9~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로마서 5:12>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가 그분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며 또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 1서 1:10>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마태복음 15:6>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망이란 죄의 결과 입니다. 그렇기에 평생 죄가 없었던 마리아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이의가 제기 되자 할말이 없어진 천주교는 1950년 피우스 12세를 통해 마리아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주장을 펴며 이 역시 공식적인 교황의 선언이기에 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천주교가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가 쓴 베드로서의 내용
저는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의 1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가 어떤 말씀을 남겼는지 적어드리고 싶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풀은 마르고 그것의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24~2:2>
천주교인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이 맞거나 전통이 맞거나, 둘 다 맞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은 말씀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 입니다.
이제 근본 원인에서 벗어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구원관 입니다. 이 부분은 천주교가 (엄밀히 따지면 교황청이) 이단으로 정죄 받을 수 밖에없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됩니다. (혹시 천주교 신자가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다른 종교를 비난한다고 흥분하지 마시고, 직접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을 통해 침착하게 확인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천주교는 개신교와 다른 구원관을 갖고 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떠나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위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듯이 생명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을 통해 들어오지 않는 모든 이들이 도둑이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리고 사도들 역시 이 말씀을 받아 오직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 <로마서 3:27~28>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여러번 강조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이는 개신교가 주장하는 구원관의 핵심 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즉 구원의 원리는 인간이 도저히 하나님의 율법에 맞춰서 살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대표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완벽한 삶을 사시고 우리의 대표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으셨고, 그 십자가가 나의 것임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완벽한 의를 전가해준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구원관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구원관을 계속 바뀌어 왔으며, 엄밀히 따지면 한 번도 성경적이였던 적이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천주교의 구원관은 선행 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분들이 아니라고 얘기할 것 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천주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에 필요함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잘 보시면 천주교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에 이르러 주어진다고 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아시다시피 연옥의 교리가 있습니다. 즉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서 천국, 연옥, 지옥에 가게 되는데, 죄 없이 깨끗한 사람은 천국, 중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죄를 지었지만 지옥에 갈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거나 회개한 사람은 연옥에서 일종의 정화 과정을 거쳐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을 압니다. 그는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 입니다. 당시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가장 악독한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극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한명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로 가실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너는 커다란 죄를 지었기에 연옥에 가서 정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가장 악독한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연옥에 가야 하는 것일까요?
천주교의 구원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 천주교의 구원관이 잘못된 이유는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15세기 카톨릭의 밖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던 교리가, 칼 라너가 제안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천주교는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도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에 대해 긍정하며 무신론자들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많은 혼란을 가져다 준 바 있습니다.
왜 이런 교리가 나오게 되었냐면,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따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뜻에 하나님의 뜻을 끼워 맞추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세종 대왕은 지옥에 가나요?” 같은 성경이 얘기해 주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대답을 해주려다 보니까, 성경을 벗어나는 답을 계속해서 내놓는 것 입니다.
천주교의 구원관은 기본 가정 부터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으며 단 한 사람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단 한 사람도 스스로 천국에 갈 자격을 갖춘자가 없다고 얘기 합니다. 구약의 전체 내용이 이 이야기 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민족 유대인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었지만 그들은 지키지 못해 결국 멸망하게 되는 이야기, 또 그 이후에 그들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보겠다고 정결한 삶을 사는 바리새인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은 회칠한 무덤일 뿐이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선악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됩니다. 즉 인간의 죄악과 소망 없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핵심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가장 훌륭한 인간의 대표입니다. 그는 부자였고, 권세가 있었으며, 당시 최고 엘리트였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바리새인 이었고, 하나님을 따르고 싶어하는 진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3>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사도 바울 역시 스스로를 율법으로 흠이 없는자이며 만약 행위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자기보다 나은 자는 없을거라고 얘기하지만, 자신의 선행은 배설물 같을 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 합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빌립보서 3:8~9>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인간의 최선의 선행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악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며, 유일하게 나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에게 원죄가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원죄가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속아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 진정으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리아에 대한 비성경적인 태도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또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마리아에 대한 태도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그녀가 평생 처녀였다, 원죄도 없었으며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 부활해서 육신과 영이 함께 승천했다, 우리의 죄를 사했다 라는 등의 성경에 있지않으며 오히려 성경과 상충되는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모두 얘기하고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마리아에 대한 부분은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만 적도록 하겠습니다.
위에도 적었듯이 천주교는 마리아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성경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이교도적인 사상입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우상시 하는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정의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모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했을 때에도 그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개신교의 경우에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어머니” 혹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나 같은 존재 아니냐고 반문하실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머니와 예수의 어머니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신학적으로는 이런 말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며,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를 의미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고 반문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에 기간 동안 단 한번도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성경 역시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라고 기록할뿐, ‘그리스도의 어머니’나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경은 마리아를 특별한 위치에 두고 기록한적이 없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복된 여자임은 맞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1:27~2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니라. <마태복음 11:11>
즉 복 있는 사람은 마리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이며, 가장 높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세례 요한이지 마리아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구속하는가?
그럼에도 천주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뿐 아니라 공속자라고도 부릅니다.
공속자라는 공동 구속자 입니다. 즉 마리아 역시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역할에 참여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마리아는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 시키기 위해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셨으며,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주신다고 선언 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은 그에 정 반대로 얘기하십니다.
그분께서 아직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보라,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이 그분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더라. 그때에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선생님의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2:46~50>
이 말은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마리아가 예수님의 공생애나 구원 사역과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존재 임을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려는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마리아의 이름은 한 절도 찾아 볼 수 없으며 복음서 이후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곳은 사도 행전에서 다른 무리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과,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명을 위한 표현이자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신 가장 첫 복음의 성취를 선포하는 표현 “여자에게서 나시고” 한절일 뿐입니다.
죽은 마리아에게 기도 하는 천주교인들
또 천주교인들은 마리아에게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마리아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마리아가 기도를 들어줄 능력은 없지만,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부탁하여 우리의 기도가 더 잘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 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도 없지만 이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죽은자에게 기도하는 일 입니다.
주문을 외우는 사람과 귀신을 불러 내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영에게 물어 보는 사람도 없게 하시오. 여호와께서는 이런 일들을 싫어하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여러분 앞에서 몰아 내신 것도 바로 그런 못된 일들 때문이었소. <신명기 18:11~12 – 쉬운성경>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고 공경을 하는 이유를 마리아를 중보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아주 분명하게, 그런 중보자는 없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얘기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 12:24>
그렇기에 성경은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때때로 기도를 마리아에게 하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배척하는 것임과 동시에 마리아를 하나님보다 더 상위에 놓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우상 숭배 합니다.
이는 성경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여신을 떠올리게 하며, 천주교가 그 우상 숭배의 전통을 이어 나간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아시다시피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여러가지 이교도의 전통을 기독교 내에 침투시켜 당시 이교를 믿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안에 흡수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태양신의 예배일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이라는 크리스마스로, 유월절 대신 여신인 아스다롯을 기리던 4월을 부활절(영어로 이스터)로, 만듭니다. 그런 과정에서 로마가 섬기던 여신들의 역할을 대신 할 존재가 필요했고, 이를 마리아가 맡았다는 주장들과 근거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종교의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 진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과 반대되는 것에서 돌아서야 할 것 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성경과 비교해 보시고, 그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면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나야 할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는 천주교의 미사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부분은 미사에 대한 것 입니다.
개신교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천주교는 미사를 드립니다. 이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개신교가 드리는 예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 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여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우리의 창조 목적이자 구원의 목적, 더 나아가 존재의 목적이라고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먼저 신뢰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1:11~12>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1>
천주교는 매주 제사를 드리지만 성경은 모든 제사가 이미 그쳤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미사의 성격은 다릅니다. 천주교는 매주 마다 성체 성사(성찬식)를 합니다. 성체 성사를 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매주 미사때 신부님이 축사하시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를 구약 때 드리던 희생 제사라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성체 성사 (성찬식)를 드리는 걸까요? 이는 성경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 것이 내 몸이고, 포도주를 주시며 이 것이 내 피니 이것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22:19>
문제는 그 행함의 목적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를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받아들이고, 매주 희생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제2 바티칸 회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써 희생되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 될 때 마다 우리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성경에 대한 엄청난 곡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희생 제사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표였을 뿐이고, 예수님은 단 한번의 완전한 희생 제사로 모든 구원의 사역을 이미 이루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는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 입니다.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므로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기는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히브리서 9: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5~26>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0:10~12>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7~18>
즉 다시 말해 천주교가 매주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은 엄밀히 얘기하면 십자가의 완전한 죄사함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천주교냐 개신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천주교에 대해 쓰고 싶은 더 많은 부분들이 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여기에서 마치려 합니다.
제가 쓴 모든 것을 다 잊으시더라도 단 한가지 만을 기억하고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천주교인이던 개신교인이던 정교회인이던, 모든 크리스천의 신앙과 삶의 기준은 말씀이 되어야하며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이외에 다른 기준을 가질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말씀 대신 다른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천주교의 시스템이나 직책은 성경에 단 한차례도 안나옵니다. 교황? 추기경? 주교? 이런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장로라고 부르는 베드로를 1대 교황이라고 왜곡합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전서 5: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갑,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
그런데 천주교는 이 모든 것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유일한 공격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우리의 전신 갑주에는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가 없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인들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미혹이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영적 전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많은 천주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않으며 성경 읽기를 권면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앙의 기준에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천주교인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강하게 전하는 개신교인들을 비난합니다. 당연합니다. 무신론자들도 자신의 양심대로 선하게 살면 구원받는데 뭐하러 갈등을 일으키고 서로 불편해지는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명령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입니다.
저는 많은 천주교인 분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며 이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려는 마음을 갖고 계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의 진심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상식에 맞추어 변개된 가짜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복음이 필요하며 그에 맞추어서 우리를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그 진리이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구절 두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리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아니하고 배우지도 아니하였으며 다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느니라. <갈라디아서 1:10~12>
저는 천주교냐 개신교냐라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백성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성경이 확고히 기록하고 있는 진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백성이 되기를 정말로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