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gerofthomas.org https://www.fingerofthomas.org/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객관적인 증거들 Fri, 01 Nov 2024 03:09:27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6.7 https://i0.wp.com/www.fingerofthomas.org/wp-content/uploads/2017/05/cropped-Jesus-is-love-1.gif?fit=32%2C32&ssl=1 Fingerofthomas.org https://www.fingerofthomas.org/ 32 32 70907946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재반론 https://www.fingerofthomas.org/%ec%b6%9c%ec%95%a0%ea%b5%bd%ec%9d%b4-%ec%97%ad%ec%82%ac%ec%a0%81-%ec%82%ac%ec%8b%a4%ec%9d%b4-%ec%95%84%eb%8b%88%eb%9d%bc%eb%8a%94-%ec%a3%bc%ec%9e%a5%ec%97%90-%eb%8c%80%ed%95%9c-%ec%9e%ac%eb%b0%98/?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c%25b6%259c%25ec%2595%25a0%25ea%25b5%25bd%25ec%259d%25b4-%25ec%2597%25ad%25ec%2582%25ac%25ec%25a0%2581-%25ec%2582%25ac%25ec%258b%25a4%25ec%259d%25b4-%25ec%2595%2584%25eb%258b%2588%25eb%259d%25bc%25eb%258a%2594-%25ec%25a3%25bc%25ec%259e%25a5%25ec%2597%2590-%25eb%258c%2580%25ed%2595%259c-%25ec%259e%25ac%25eb%25b0%2598 Fri, 01 Nov 2024 03:09:22 +0000 https://www.fingerofthomas.org/?p=12911 The post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재반론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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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팀 마호니의 패턴스 오브 에비던스라는 영화를 보고 출애굽의 여러 고고학적인 증거들과 기독교인들 또 성경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6개의 글로 소개하기도 했고, 영화를 직접 보고 싶은 한국 분들을 위해서 자막도 만들어서 이메일 주시는 분들께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전아모스라는 분의 반박 글이 있고, 이에 대한 저의 의견을 묻는 분들이 계셨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블로그/유튜브 활동을 예전처럼 할 수 없었고, 이 글에 대한 반박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전아모스 님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고, 더 이상 늦출수 없다는 생각에 재반론 글을 써야 겠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하나님께서 이 글에 대한 반박 자료들을 보내주셔서 공유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저는 전아모스라는 분이 누구인지 헥터 아발로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헥터 아발로스라는 분이 쓴 글 원문을 보지는 못하고 전 아모스님의 블로그 글만을 보고 반박을 합니다. 또 저는 패턴스 오브 에비던스를 변호하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를 포함해서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논거에 반박을 하고자 합니다.

헥터 아발로스의 비판에 내가 갖고 있는 불만

비단 헥터 아발로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진화론자, 유신 진화론자, 오랜 지구론자들의 토론 영상, 토론 글, 반론 글들을 보면 그들에게야 말로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패턴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증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독자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비본질적인 주장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에 집중하도록 한다는 인상을 자주 받습니다.

이 글도 그런 기조에서 많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의심을 이끌어 낼 수는 있으나 본질을 부정할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들어 데이비드 롤이 주장한 요셉 혹은 야곱의 집으로 생각되는 터에 대해서 아발로스는 12개의 기둥이나 12개의 무덤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반박하여 마치 데이비드 롤의 주장이 우연이거나 별것 아닌듯이 말합니다. 하지만 이 집에는 영화에서 소개한 이 집이 요셉 혹은 야곱의 집이어야 하는 뚜렷한 증거는 물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더 확실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이를 숨기거나 모르면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속의 야곱의 자손의 집이 진짜인 증거

여러분은 오목이나 장기를 둬 본적이 있습니까? 아주 초보와 두는게 아니라면 오목과 장기를 둘 때 하나의 공격만으로는 이길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적어도 두개나 세개의 공격이 한번에 이루어졌을 때 피할 길이 없고 그때야 이길수 있습니다. 법정에서나 이런 류의 토론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 하나의 증거만으로는 어느 쪽도 확신을 줄 수 없습니다. 여러개의 복합적인 증거들이 성경 기록과 일치하여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그냥 증거들을 하나 하나 떼어내어 이를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희박한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의심을 갖게 합니다.

예를들어 아발로스는 요셉의 석상이라고 주장되는 그 집에 있는 거대한 석상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롤은 그것이 요셉의 헤어스타일, 요셉의 피부톤, 요셉의 옷의 특징임을 설명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 수백명의 아시아 공직자들이 유사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다채로운 색의 외투를 입었다… 따라서 그의 머리카락 색은 아시아 출신에게만 유일한 것도 아니었다.”

여러분은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나요? 혹은 세종 대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나요? 우리 중 아무도 그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원짜리에 혹은 현충사에서 보는 그 분들의 초상화는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표준 영정일 뿐입니다. 수백년전 조선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과 장군의 얼굴도 모르는데 지금으로 부터 약 3,500년전 사람의 헤어스타일, 피부톤, 옷의 특징을 설명하라는 요구는 합당한가요? 이성적인가요?

이는 마치 예수님의 사망 진단서나 의료 기록을 갖고오면 십자가 사망과 부활을 믿겠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 없는 의문 제기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합니다.

004 요셉 총리 석상

아발로스는 이 석상의 주인공이 아시아 출신 즉 셈족이 아닐수도 있다고 넌지시 떠봅니다. 하지만 블로그의 글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집 하나가 F1지역 지층 d/2으로 지정된 북시리아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했고…”

즉 이 터에서 야곱이 온 시리아 스타일의 집 터가 발견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는 아발로스의 의미 없는 주장 즉 저 석상의 주인공이 아시아인이 아닐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부정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고고학자도 없구요.

물론 그는 이 집이 야곱의 것이라는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며 다른 증거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증거를 갖고 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위에 그가 아시아 출신이 아닐수도 있다는 석상입니다.

이집트에서 왠만큼 높은 지위에 있지 않았다면 사람의 두 배 크기의 석상을 지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발로스가 비판한 “북시리아 스타일”의 집터에는 처음 발굴시 궁전일 거라고 생각했던 하지만 구조상 궁전일 수 없었던 대 저택이 지어졌습니다. 아발로스는 이 증거들을 복합해서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따로 떼어 놓고 이건 이래서 아니고 저건 저래서 아니라고 말합니다.

북 시리아 스타일의 집 위에 지어진 대저택 그리고 그 저택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일반 사람의 두배가 넘는 거대한 셈족의 석상 이 것으로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추가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아발로스가 비판했던 12개의 주요한 무덤 중 하나에 금과 구리로 만든 북시리아 스타일의 단검 하나가 발견 됩니다.

이 단검의 주인은 Ruler of Retjenu 즉 레반트에서 온 통치자 입니다. (Retjenu는 이집트 어로 지금의 이스라엘/시리아/팔레스타인이 있는 레반트 지역을 의미합니다.)

Ruler of Retjenu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금으로 장식한 칼을 가지고 다닐만큼 그는 큰 부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단검의 주인공이 레반트의 통치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나요? 왜냐하면 이 단검과 함께 발견된 부장품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인장입니다.

조금 부서지긴 했지만 이 인장에는 인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만한 글이 있는데, 인장을 조금만 복원하면 The Ruler of Retjenu, Di-Sobek-em-hat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시내 광야에 유명한 터키옥(Turquois)과 구리 광산이 있는데, 이 곳에서 굉장히 많은 초기 히브리어로 쓰여진 석판들이 발견되었고 그중 하나가 Sinai 112로 알려진 아래의 그림과 글 입니다.

이 그림에는 나귀를 타고 있는 Hebeded이라는 한 사람과 그 나귀를 끌고 있는 아이, 아마도 아들이나 종으로 보이는 하지만 이름이 있는걸로 봐서는 종이 아닌듯한  Shekam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 그림의 제목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The Brother of the Ruler of Retjenu, Hebeded”입니다.

즉 이 그림의 나귀를 타고 있는 남자는 금단검의 주인공 레반트의 통치자의 형제 Hebeded입니다. 그렇다면 Hebeded이 무슨 뜻일까요? 이 이름의 의미는 선택받지 못한, 눈밖에 난(Disfavoured)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분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자기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그것을 들며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아이가 맏아들이니 아버지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매 그의 아버지가 거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백성이 되고 그도 크게 되려니와 진실로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크게 되며 그의 씨가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 그들을 축복하며 이르되, 네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너를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에 두었더라. <창세기 48:17~20>

맏아들이지만 야곱의 축복을 받지 못한 므낫세가 그 주인공 입니다.

실제로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은 야곱의 장자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즉 Ruler of Retjenu는 에브라임이 되어야 하지요. 더 확실한 증거는 Hebeded의 나귀를 끌고 가는 아이에 있습니다. 그의 이름 세겜..

그는 므낫세의 손자 길르앗의 아들 즉 므낫세의 증손자입니다.

므낫세의 자손 중에서 남은 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곧 아비에셀의 자손과 헬렉의 자손과 아스리엘의 자손과 세겜의 자손과 헤벨의 자손과 스미다의 자손을 위해 제비를 뽑았더라. 이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의 남자 자손이더라. <여호수아 17:2>
 
이 터키옥 광산에는 그 외에도 다른 기록들이 많이 있는데 이를 고대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성경에 기록을 확증해주는 수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아래는 Sinai 375로 명명된 석회암 판과 이를 디지털로 탁본한 것인데, 이 석판에는 성경에 나오는 누군가의 이름이 있습니다.
 
 

석판의 내용을 번역하면 “광물의 관리자 아히사막 (Overseer of minerals, Ahisamach)”이 됩니다. 아히사막이 누구냐면 출애굽 후 성막을 지을때 그 안에 온갖 장식물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담당한 자가 아홀리압이고, 아홀리압은 아히사막의 아들입니다.또, 보라, 내가 그와 함께 단 지파에 속한 아히사막의 아들 아홀리압을 주었고 지혜로운 마음을 지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였으니

출애굽기 31:6

우리는 합리적으로 이런 추측이 가능하겠죠. 광물의 관리자인 아히사막이 이를 갖고 무언가 주물을 하고 여러 기술을 갖고 있다가 이를 그의 아들 아홀리압에게 전수했고 그가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Sinai 376 석판에는 또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또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며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주니라. 요셉이 나가서 온 이집트 땅을 돌아보니라.

창세기 41:45

요셉의 아내의 이름이 아스낫인데, “아스낫의 포도밭의 집과 그 안방이 새겨져 있다. 그 그림은 마치 실제와 같다.”라는 내용입니다.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왜 아발로스가 요셉이 아닐 것이다 혹은 셈족이 아닐수도 있다라고 한 곳에서 발견된 부장품과 그 부장품과 연결된 다른 석판 기록들에는 초기 히브리어가 쓰여져 있으며, 그 내용은 왜 성경과 연결되어 있고, 내용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이 나오나요?

이 모든 것이 동명이인이고 우연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대의 재설정에 대한 재반론

이 글의 시작은 고고학계가 주장하는 출애굽의 시기인 람세스 2세때의 통치시기 즉 기원전 12세기와 성경적 출애굽 시기 기원전 14세기를 두고 반론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런 의미없는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자기모순이 가득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하는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않는 토론에 적합하지 않은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처음부터 이해하셔야 하는 것은 아발로스는 “출애굽이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출애굽이 없었다라고 믿는 사람이 출애굽이 몇년도에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류는 달에 착륙한적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인류가 달에 착륙한 것은 1990년대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처음부터 자기 모순적인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출애굽이 기원전 12세기 혹은 람세스 2세의 통치때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성경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믿지 않지만 성경이 특정한 시대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믿습니다. 자기 유리한 말만 체리피킹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이들은 출애굽이 람세스 2세때 있었다고 말하나요?

그러므로 그들이 작업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그들을 괴롭게 하였더라. 그들이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도시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더라. <출애굽기 1:11>
 
이들이 라암셋이라는 이름의 국고 도시를 지었다는 성경 구절입니다. 만약 성경에 이 구절만 있었다면 그들의 주장이 맞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보다 400년 전을 설명한 창세기 47장에는 뭐라고 되어 있나요?
 
요셉이 파라오가 명령한 대로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을 정착시키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소유를 주되 그 땅의 가장 좋은 곳 즉 라암셋 땅에서 소유를 주며 <창세기 47:11>
 
라암셋 땅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이 아니라 요셉이 이집트로 입애굽을 했을 때가 람세스 2세때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람세스 2세가 통치하기 수백년 전에 람세스 2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이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요? 왜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믿지도 않으면서 출애굽기 1:11 말씀만 딱 믿고 창세기 47:11 말씀은 모른체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왜곡시켜야 성경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영화에서도 글에서도 지겹도로 설명했듯이 후대에 누군가가 당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명을 현대적으로 바꿔서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는게 가장 합리적입니다. 저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7~18세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람세스때 출애굽이 있었다는 주장은 부정되었습니다. 기원전 13세기의 즉 람세스보다 선대의 이집트 기록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레반트 땅에 정착하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외에도 다른 기록들 역시 람세스 시대보다 훨씬 더 전에 이스라엘이 성경대로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원전 12세기에 여리고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성경 기록이 부정확하다고 말하지만 기원전 12세기에는 이미 2세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그 성을 부섰기 때문에 당연히 여리고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대로 이루어진 일을 통해 성경을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발로스는 데이비드 롤이 람세스 2세의 통치 시기를 기원전 9세기로 왜곡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의미없는 흠집잡기에 불과합니다. 데이비드 롤의 주장을 무시하고 표준 연대대로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2세기에 파라오가 맞다고 가정해도 성경의 기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표준 연대가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점은 람세스 2세의 통치시기가 아닙니다. 요점은 실제 출애굽이 언제 있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왕상 6:1의 말씀대로 솔로몬이 통치한지 4년째가 출애굽 480년이 되는 때라는 기록을 근거로 출애굽이 기원전 1450년 즈음이라는 성경적 연대를 기준으로 삼고 문제를 풀어갑니다. 그리고 그 연대를 인정하는 순간 위에서 설명한 것들을 포함해서 수 많은 성경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발견을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의 파괴에 대해선 왜 언급이 없나?

아발로스의 반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자신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정말로 중요한 증거에 대한 반론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리고 성입니다.
기원전 14세기에 있었던 여리고성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적은 하나하나 다 성경과 일치 합니다.
 
여러분은 망치로 63빌딩을 완전히 무너뜨릴수 있나요? 몇년이 걸릴까요?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여리고성은 엄청난 요새였고 2중 성벽이 있는 당시 무기로는 무너뜨릴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은 고고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거인이 손가락으로 튕겨 낸 것처럼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발견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는 유월절 즉 지금으로 치면 3~4월 정도였고, 이 때는 이른 보리의 추수시기와 겹칩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은 수 개월간 공격한 것이 아니였고 단 7일만에 성벽이 무너지자 그 안으로 들어가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건들이지 말고 다 하나님께 바쳐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대의 전쟁도 마찬가지지만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입니다. 고대에는 곡식이 귀했기 때문에 성을 점령하고 그 안에 있는 곡식이나 다른 보급 물품을 약탈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리고 성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집집마다 가득 차있는 불에 탄 곡식 항아리 입니다.
 
이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루어지기 힘든 발견입니다.
첫번째로 엄청나게 튼튼한 여리고 성벽이 무너지는 것 부터가 비현실 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견한 증거는 무너진 시기가 수 개월 수년을 공격한 결과가 아니라 포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몇 개월만 여리고성을 포위하고 있었더라도 저 항아리는 텅텅 비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발견 된 곡식 항아리는 대부분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꽉 차 있었습니다. 이는 포위 된지 얼마 안되어 성이 정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두번째로 얼마 안되어 정복되었더라도 약탈로 인해 저 항아리는 비어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항아리는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발견하지 못한것이 아닙니다. 곡식들은 불에 타 있었고, 일부로 남겨둔 것입니다.
 
왜? 어떤 이유로 여리고성을 공격한 군대는 성안에 가득 남아 있었던 곡식을 약탈하지 않고 남겨 두었을까요? 설명할 자신이 있나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설명할 수 있었다면 어설프게라도 글에 반박을 해 놓았겠죠. 하지만 여리고성에서 발견한 이 증거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푸워의 파피루스

세속 학자들은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출애굽을 연결짓는 것을 경계합니다. 위키피디아나 이푸워의 파피루스를 번역한 사이트들을 보면 한결같이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한 웹사이트에서는 이푸워의 파피루스의 영문 번역을 제공하며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비주류 역사학자들은 흔히 이 파피루스의 내용을 성경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와 비교합니다. 이집트 문헌과 성경의 유사점은 쉽게 발견되며, 히브리인들이 때때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추정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를 묘사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믿음의 도약을 필요로 합니다.
 
왜 이런 언급을 할까요? 왜냐하면 본인들이 생각해도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출애굽기의 기록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단순히 강이 피처럼 된다라는 구절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전체 내용에는 아발로스가 정리해 주었듯이 주요한 6가지 이상의 유사점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단순하거나 자주 일어날 수 없는 그리고 너무도 의아한 사건들입니다.
 
단일 사건 혹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가난한 자 혹은 노예 였던 자들이 주인의 부를 빼앗아 가고
농작물이 파괴되며 가축이 죽고
장자가 죽고 모든 곳에서 자신의 형제를 매장하고 있고
어둠이 온 땅을 덮고
이집트 전체가 파괴되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이집트에 강이 피로 변하고, 농작물이 파괴되며 가축이 죽고 장자들이 죽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면 그 피해를 노예였던 사람들 역시 받았어야 하고 더 심하게 받았어야 하는게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이집트가 이 난리인데 노예였던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었다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요?
 
이에 대해 아발로스는 이런 이집트에 대한 묘사를 각기 다른 자료에서도 찾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글에서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를 포함해서 부자들의 부를 노예가 가져가 부자는 가난해지고 노예는 부자가 된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껏해야 아가데의 저주에 표현 된 부가 흩어진다는 내용일 뿐입니다.
 
아발로스는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출애굽을 동일시 여겨야 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더더욱 동일시 될 수 없는 글들을 제시하며 출애굽을 부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망하면 부가 흩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복한 나라가 정복 당한 나라의 부를 가져가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죠. 하지만 이푸워의 파피루스의 글의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서울에 전쟁이 났고, 서울에 가뭄이 들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으면 부자던 가난한 자던 처참한 상황 가운데 있어야 하죠. 하지만 전쟁이 나고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고, 한강이 오염되어 아무도 마실수 없고, 전염병이 돌았는데, 노예는 부자가 되고 부자들은 그 부를 빼앗긴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푸워의 파피루스를 깊이 연구했던 미리암 리트하임은 이 내용인 현실적이지 않고 말이 안되기 때문에 자신은 이것이 실제 사건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푸워의 파피루스나 출애굽이나 현실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게 맞습니다. 그리고 아발로스는 이런 사건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가데의 저주와 비교하며 출애굽기와 차별되는 점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 아메넴하트 1세때 쓰여졌다고 알려진 이집트의 네페르티의 예언에만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집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말입니다.
“내가 혼란에 빠진 땅을 보여주노라
무장한 약자가 무장한 강자가 되나니…
사람들이 묘지에 살게 될 것이며
거지들이 부를 얻을 것이며….
노예가 존귀하게 되리라…”
 
예언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예언은 출애굽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아발로스가 출애굽을 부정하기 위해 제시한 네페르티의 예언은 사실은 출애굽을 더 확증해주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특별한 것은 단순히 이런 사건들을 나열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신교 사회인 이집트에서 이 사건들을 유일신의 벌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신교의 사회라고 하나의 신이 재앙을 통해 벌을 내린다는 개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일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푸워의 파피루스를 소장하고 있는 라이덴 박물관의 마틴 레이븐 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푸워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중앙 권력이 무너질 때 이집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표현한 보고서(Report) 입니다.”
하지만 이를 출애굽기와 비교하려고 하니 레이븐 소장은 자신의 발언을 뒤집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이집트 재앙에 대한 이야기가 관련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아주 간접적인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을 직접 목격한 바를 쓴 것처럼 보이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저는 이 사람이 이 모든것을 볼 수 없었다고 확신을 줘야 했습니다. 그는 상상한 것이거나 비슷한 류의 다른 책에서 영감을 얻어서 썼겠죠. (사실이라고 하기에) 너무 환상적입니다. 그는 이것을 본게 아니라 상상한 것입니다.”
 
레이븐 소장이 주장하는 이 글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근거는 무엇이죠? 본인이 생각하기에 너무 환상적인 즉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주관적 판단입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재앙을 일으킨다는 것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만한 사건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이븐 소장이 똑같은 잣대로 판단했을때 출애굽기도 환상적이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즉 출애굽기와 이푸워의 파피루스의 내용이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에는 구차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논리적으로 말했어야 하는것은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출애굽기의 내용은 굉장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건이 역사속에 일어났을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정도가 되야 할 것입니다.
 
아발로스는 글에서 이푸워가 글에 언급한 순서가 다르다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많은 사람들은 고대의 글을 보면서도 자꾸 현대 문학을 대입해 분석하려고 합니다.
 
 
 
 

계속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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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https://www.fingerofthomas.org/%ec%98%88%ec%88%98%eb%8b%98%ec%9d%80-%eb%b2%a0%eb%93%a4%eb%a0%88%ed%96%84%ec%97%90%ec%84%9c-%ed%83%9c%ec%96%b4%eb%82%98%ec%a7%80-%ec%95%8a%ec%95%98%eb%82%98/?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c%2598%2588%25ec%2588%2598%25eb%258b%2598%25ec%259d%2580-%25eb%25b2%25a0%25eb%2593%25a4%25eb%25a0%2588%25ed%2596%2584%25ec%2597%2590%25ec%2584%259c-%25ed%2583%259c%25ec%2596%25b4%25eb%2582%2598%25ec%25a7%2580-%25ec%2595%258a%25ec%2595%2598%25eb%2582%2598 Fri, 19 Jan 2024 10:02:36 +0000 https://www.fingerofthomas.org/?p=12870 The post 예수님은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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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에 대한 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한 역사학자가 예수님은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당시에 인구조사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 역사학자는 왜 그렇게 주장을 하셨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 2장을 봐야 합니다.

그 때에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 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2>
우리는 현재 서기 2023년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기는 무엇을 기준하나요? 바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래서 영문으로 기원 전을 BC 즉 before christ 기원 후를 AD (Anno domini: 주님의 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구분합니다.
이 서기에 따르면 예수님의 탄생은 AD 1년이 되어야 하지만 서기를 만들 당시에 오류로 인해서 현재 예수님이 AD 1년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데, 정작 이 헤롯은 역사적으로 기원전 4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 부분의 역사학자나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기원전 8~4년 정도에 태어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인데요. 누가복음 2장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햄으로 오게 된 계기가 구레뇨의 첫 번째 인구조사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구레뇨는 기원 후 6년에 시리아의 지방 총독 (Legate)으로 부임합니다. 누가봐도 모순되지요?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누가는 구레뇨의 인구조사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우선 누가가 혹시 구레뇨의 인구 조사에 대해 잘 몰랐는지에 대해 먼저 체크해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실수 했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누가는 신약에서 2권의 책을 썼는데 첫번째가 누가복음이고 두 번째가 사도 행전입니다. 그리고 사도 행전 5장에서 누가는 분명히 구레뇨가 총독일 때의 인구 조사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인구 조사를 할 때 갈릴리의 유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백성들을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 역시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5:36>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발언을 인용해서 인구 조사때 유다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 유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고대 전쟁사에도 언급이 되는데 유다가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민족을 배반하는 일이라며 마치 독립군과 같이 사람들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누가는 인구 조사의 시기에 대해 헷갈린 것은 아닙니다.
  • 아우구스투스가 온 세상에 내린 칙명

그러면 이제 누가 복음의 2 구절에 대해 설명해 봐야 할 것 입니다. 논란이 되는 구절은 누가 복음 2장의 1절과 2절인데 1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그 때에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 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1>

역사학자들이 이 구절에서 문제 삼는 것은 “그 때에”라는 단어를 토대로 아우구스투스가 온 나라에 즉 로마가 점령하고 있던 모든 나라에 동시에 인구 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맞는 얘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통신이나 교통이 발달 한 것도 아니고 로마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런 명령이 동시에 전달 될 수도 또 동시에 실행될 수 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 기록이 모든 로마 점령지가 한 시점에 “요이 땅!”해서 인구 조사를 동시에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2000년 전 쓰여진 성경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책을 독해하는 방식을 따르려 하지만 지금과 당시 글을 쓰는 방식은 굉장히 다릅니다.

비단 성경 뿐 아니라 어떠한 역사책을 봐도 그리고 그 시기가 오래되면 오래 될 수록 육하원칙에 따라서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글을 쓰는 스타일대로 씁니다. 그래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자세하지 않고 친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복음 2장 1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가 그 때에라고 말하는 것은 한 시점이 아니라 몇년에 걸친… 개념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2020년대를 사는 우리가 일제 시대에… 라고 말하면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일제 치하 36년 중 어느 시점 혹은 그 전체를 걸친 시대를 다 아우를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인구 조사를 하도록 명령을 내린것에 포인트를 두지 않고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할 때에 모든 나라에 조세를 위한 인구 조사를 명령했냐… 라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는 역사적으로 사실입니다.

분명히 그 때에 로마의 점령하에 있던 모든 나라는 조세를 위한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 구레뇨가 총독일 때에 인구 조사가 언제 있었을까?

이제 1절보다 더 논란이 되는 2절에 대해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

역사적으로 구레뇨 혹은 퀴리니우스는 실제로 시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했었었고, 다만 그 시기는 위에 설명했듯이 서기 6~12년 동안 통치를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기원전 4~6년과 차이가 나는 것 아닌가요?

바로 이 이유로 일부 역사 학자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으며 예수님이 베들레햄에서 태어났다는 성경의 기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항상 과학자나 역사학자들에게 느끼는 불만은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비판적으로 보며, 확실한 증거도 없이 거짓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이론에 비교해서 이중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과학자들은 대부분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외계인이 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나요? 단 하나도 없으며 엄밀히 과학적으로 따지면 외계인은 커녕 외계 생명체가 발생하는 것도 굉장히 희박한 확률을 갖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사는 우주가 생명체가 생존하게 적합하게 될 확률 역시 극도로 희박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떠한 이성적인 논리적인 증거도 없이 그런 희박한 확률의 사건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분명한 이중 잣대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의 주관적인 부분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증거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 모순이라는 주장에 대한 첫 번째 해결책

제가 생각하는 해석을 설명하기에 앞서 조금 다른 관점의 설명을 먼저 드려보고 싶습니다. 이 해석은 저명한 신학자 N.T.Wright나 F.F Bruce등이 주장하는 것으로 누가복음 2:2의 첫번째라고 번역된 πρώτη(프로테)를 ‘첫번째’가 아닌 ‘이전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프로토스에는 첫번째라는 뜻 이외에도 그 전에, 가장 중요한 등의 다른 의미도 갖고 있는데, 이 단어를 이전에라고 번역한다면 시기상의 모순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이전에라고 번역하기에는 문법상의 그리고 어감상의 부자연스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전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싶었다면 πριν(프린)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이고 또 크게 상관이 없는 구레뇨 시대때의 인구조사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 왜 누가는 첫번째 호적 조사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모순되 보이는 이 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경 구절을 자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읽으면 넘어갈 수 있지만 누가는 구레뇨가 총독으로 있을때의 “첫번째” 호적 조사라고 언급했습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한 쇼츠 영상을 봤는데, 미래 대한민국에 인구가 줄어들어 학교 전체의 학생이 한 명 밖에 안남은 상황을 풍자했고 이 학생은 전교 1등이자 가장 성적이 우수하고 모든 것이 다 1등인 우수생이라는 유머였습니다. 이 것이 우스운 이유는 우리가 보통 참가자가 1명밖에 없을때 그 사람을 1등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구레뇨 시대의 호적 조사가 어려번 있었다면 “첫번째” 호적 조사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번째라는 단어 안에는 주어진 상황 이 경우 구레뇨가 총독일 때, 또 다른 인구 조사가 있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면 이 당시에 인구조사가 여러번 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당시 인구조사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으로 로마가 지배하는 땅에서는 보통 한 세대가 성인이 되는 14~15년에 한번씩 아무도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7세기에 쓰여진 Chronicon Paschale에 따르면 이 세금 징수를 위한 인구조사는 줄리어스 시져에 의해 기원전 49년부터 시되었고, 서기 42년 클라우디우스 때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 더 확실한 기록이 있나요?

사실 위에 언급한 책들은 세금 징수를 위한 인구 조사가 14~15년에 한번씩 있었다고 했을뿐 정확하게 언제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 인구조사가 있었음을 직접적인 기록은 없을까요?

우린 너무나도 확실한 기록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쓴 The deeds of the divine Augustus라는 문서가 성경의 기록을 지지합니다. 이 기록 8항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8년, 기원전 8년 기원후 14년에 3번 인구 조사를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가 방송에서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일반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수 밖에 없을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성경을 부정하는 주장에 대한 증거를 찾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기록을 살펴 본다면 성경의 기록은 항상 정확했고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조사를 할 때도 도와주셨지만 제가 찾지도 않고 예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신실하게 저에게 증거를 제시해 주셨고, 이를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조사를 할 때에 저는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 인구조사가 있었다라는 역사적 사실만 배운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께 묻고 궁금해 할 때에 그 마음을 아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임을 함께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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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년 vs 46억년 –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 태양계 편 https://www.fingerofthomas.org/6%ec%b2%9c%eb%85%84-vs-46%ec%96%b5%eb%85%84-%eb%8b%b9%ec%8b%a0%ec%9d%b4-%eb%93%a4%ec%96%b4%eb%b3%b4%ec%a7%80-%eb%aa%bb%ed%95%9c-%ec%9d%b4%ec%95%bc%ea%b8%b0-%ed%83%9c%ec%96%91%ea%b3%84/?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6%25ec%25b2%259c%25eb%2585%2584-vs-46%25ec%2596%25b5%25eb%2585%2584-%25eb%258b%25b9%25ec%258b%25a0%25ec%259d%25b4-%25eb%2593%25a4%25ec%2596%25b4%25eb%25b3%25b4%25ec%25a7%2580-%25eb%25aa%25bb%25ed%2595%259c-%25ec%259d%25b4%25ec%2595%25bc%25ea%25b8%25b0-%25ed%2583%259c%25ec%2596%2591%25ea%25b3%2584 Fri, 09 Jun 2023 02:18:44 +0000 https://www.fingerofthomas.org/?p=12834 The post 6천년 vs 46억년 –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 태양계 편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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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과학의 시대에 지구의 나이가 46억년 되었다는 상식과도 같은 연대에 맞서서 성경대로 이 세상이 6천년 되었다고 주장하면 미쳤다는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 분들은 지구가 46억년 되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무엇인지 검증해 보셨나요?

저는 지난 10여년간 성경이 사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검토해 봤고, 우리에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검증에 대한 태도만 있다면 너무도 쉽게 지구가 46억년 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가지 증거 중에서 Spike Psarris가 제작한 “What you aren’t being told about – Vol 1 Solar system”편을 번역하였습니다.

이 영상에는 태양계 내에서 관찰된 사례들이 어떻게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고 오랜 지구론을 부정하는지 설명합니다.

이 영상은 아래 링크에서 구매가 가능합니다. 영상을 구매 하신 후 come2jesusnz@gmail.com 으로 이메일을 주시면 번역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라면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영상 구매 링크

이 영상에서는 여러분이 들어보지 못한 왜 지구는 46억년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들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합니다.

성경이 진리인지 알고 싶으신 분부터 성경을 믿는 또라이들이 무슨 증거를 제시하는지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까지 이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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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도 없는 출애굽을 왜 믿어야 하나? https://www.fingerofthomas.org/%ec%a6%9d%ea%b1%b0%eb%8f%84-%ec%97%86%eb%8a%94-%ec%b6%9c%ec%95%a0%ea%b5%bd%ec%9d%84-%ec%99%9c-%eb%af%bf%ec%96%b4%ec%95%bc-%ed%95%98%eb%82%98/?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c%25a6%259d%25ea%25b1%25b0%25eb%258f%2584-%25ec%2597%2586%25eb%258a%2594-%25ec%25b6%259c%25ec%2595%25a0%25ea%25b5%25bd%25ec%259d%2584-%25ec%2599%259c-%25eb%25af%25bf%25ec%2596%25b4%25ec%2595%25bc-%25ed%2595%2598%25eb%2582%2598 Tue, 04 May 2021 00:25:46 +0000 https://www.fingerofthomas.org/?p=12708 The post 증거도 없는 출애굽을 왜 믿어야 하나?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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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David Rohl의 강의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최근들어 점점 더 많은 사역자/신학생들이 성경이 말하는 젊은 지구론보다 세속 과학이 말하는 오랜 지구론을 더 신뢰하며 그 근거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강조하는 사역자들 중 정말로 과학적 증거를 이해하고 말하는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오랜 지구론이나 유신 진화론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학 이론의 맹신에 의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랜 지구론을 지지하는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출애굽은 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되 묻고 싶습니다. “과학적 증거”를 통해 오랜 지구론을 지지하는 사역자 분들은 출애굽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어떤 증거를 갖고 계시며 제시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스라엘 고고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이스라엘 필켈스타인 교수는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임을 부정합니다. Patterns of Evidence 에서 이미지 캡쳐

현재의 주류 고고학은 출애굽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거 때문에 젊은 지구론을 부정해야 한다면 증거때문에 출애굽도 부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죠. 이는 완전한 이중잣대 입니다. 그냥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겠다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떤 분들은 창세기 1~11장의 경우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출애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11장에 여러 해석이 있을수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출애굽에 다른 해석이나 출애굽기 기록의 다른 목적이 있을수 없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 최대 유대교 종파의 지도자인 마이클 월피 랍비는 한 라디오 토크쇼에 나와서 자신은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출애굽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류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출애굽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는 어떤 증거들을 갖고 계십니까?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믿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증거 때문에 지구가 46억년 되었다고 말하면서 증거가 없어도 출애굽은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여러분들은 위선자입니다.

물론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무지와 편견, 고집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를 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지구가 젊다라는 수많은 증거들 역시 편견때문에 또 무지때문에 무시하는 분들에게 왜 주류 고고학자들이 출애굽을 인정하지 않는지 그들의 실수와 무지와 증거없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실수 1: 모세와 다툰 왕 람세스

찰튼 헤스턴과 율 브린너 주연의 영화 십계는 출애굽에 대한 내용을 다룬 1956년작 영화입니다. 찰튼 헤스턴이 모세의 역을 맡았고 율 브린너는 이집트의 파라오 즉 람세스 역을 맡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의 왕을 람세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 있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 1:11>

즉 출애굽기 1장에 식량을 저장해 두는 저장성인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다는 구절 때문입니다. 라암셋은 람세스 2세때 건축이 되었으니 이 때의 바로는 람세스라는 논리이지요. 일견 논리적인것 같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창세기 47:11> 

출애굽기 1장보다 400여년 전의 기록인 요셉이 총리인 시기 즉 창세기 47장에도 라암셋이라는 땅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논리라면 400년전의 파라오도 람세스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만 보고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일부는 무시해 놓고는 성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후대에 성경 사본에서 독자들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고대의 지명대신 현재의 지명으로 대체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는게 훨씬 타당합니다. 그리고 주류 고고학자들은 이 너무나도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해서 출애굽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수 2: 열왕기상의 시삭은 누구인가?

이집트학(Egyptology)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면서 군대만 준비한게 아니라 역사학자, 미술가, 공학자들도 동행시켜서 이집트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시킨 것이 그 시작입니다. 60년대 이집트를 통치했던 나세르도 나폴레옹이 이집트 역사를 위해 공헌한 것에 대해서 인정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물론 당시 프랑스의 국교는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을 믿고 있었고, 샴폴리옹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는 한손에 성경을 들고 이집트를 찾았습니다. 특히 샴폴리옹은 처음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했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는 왕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었죠. 그는 이집트에서 자신의 해독이 맞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카낙으로 가서 쇼셍크 왕의 전쟁 기록이 있는 The Bubastite Portal에 가서 내용을 해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Yudah-ha-Malkuth 즉 유다 왕국이라는 뜻의 기록을 발견하고는 이를 역대하 12장의 내용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대하 12:2>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고대 이집트 문자나 고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 기록하기 때문에 Sysq(시삭)과 쇼셍크는 이름이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졌고 역대하 12장에 나오는 시삭은 22대 왕조의 쇼셍크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모든 이집트 연대의 기준이 됩니다. 즉 르호보암 5년인 BC 925 그 20년전인 BC945에 즉위한 쇼셍크 왕을 기준으로 모든 파라오들의 통치 기간을 계산해서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이집트 연대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20년 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한 초기보다 더 발전했을때 샴폴리옹이 유다 왕국이라고 해석했던 부분은 Yudah-ha-Malkuth가 아닌 Yad-ha-Melek 즉 왕의 손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 바뀌면서 역대하의 내용대로 쇼셍크가 유다를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보호해 주었던 여로보암의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그 주변 나라를 공격하되 유다만 빼고 공격을 한 것이 되버린 겁니다.

쇼셍크의 정복 원정 리스트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열왕기상 11:40>

시삭이 쇼셍크라면 왜 쇼셍크는 자신이 보호하던 여로보암은 공격하고 적대하던 르호보암의 유다는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성경은 시삭이 유다를 공격했다고 기록한 것일까요?

이는 시삭이 쇼셍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고고학자들은 해독이 완벽하지 않던 시대의 샴폴리옹의 잘못된 해석을 지금까지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실수 3: 내가 원하는 것만 진실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

고고학자들은 단순히 샴폴리옹의 잘못된 해석을 받아들이는 오류만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논리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성경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가 출애굽 480년 후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열왕기상 6:1>

하지만 주류 이집트 연대에 따르면 쇼셍크 1세와 람세스 2세는 약 200여년의 연대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기준삼아 만든 연대기에 오류가 있거나 성경에 등장하는 파라오가 오류라고 결론 내렸어야 합니다. 즉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믿을만한 사실로 인정을 하거나 모든 것을 다 믿을수 없는 픽션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신들에게 필요가 없는 것들은 버리는 이중잣대를 들이대었습니다.

성경은 완벽한 책입니다. 10+20+30+40=100이라는 식에 40을 4로 바꾸면 등식이 성립이 되지 않듯이 인간이 자기 멋대로 성경의 내용을 바꾸면 당연히 성경이 틀린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고고학자들은

  1. 성경을 기준 삼아 (잘못된 해석으로) 쇼셍크 1세의 연대를 945 BC로 정해 놓고
  2. 나머지 성경 내용을 모두 무시한 후
  3. 성경에 나오지 않는 출애굽때의 왕을 람세스 2세고 규정한 후
  4. 출애굽이 BC 13세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특정합니다.
  5. 그리고 BC 13세기에 출애굽이나 여리고 성의 정복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없자
  6. 성경이 거짓이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지요. 왜냐하면 6번이 참이라면 1번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순환 논리의 오류입니다.

그러면 ‘시삭’은 누구일까? 

역대하 12장에 나오는 ‘시삭’이 쇼셍크 1세가 아니라면 어떤 파라오 일까요?

데이빗 롤은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이 출애굽때의 파라오라고 생각하는 람세스 2세가 ‘시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왜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할까요?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증거를 검증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첫번째 증거는 람세스 2세의 이름입니다.

람세스의 이름이라구요? 람세스와 시삭은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고대 이집트에서 람세스를 람세스라고 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완전한 착각입니다. 람세스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부르는 그리스식 이름일 뿐이고 람세스가 파라오였을때 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에게는 태어났을 때 지어진 이름과 왕으로써 불리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조의 이름이 이산이었던것처럼 람세스의 본명은 와시무리야 샤탑나리야 (Washmuariya Shatapnariay)였고, 그의 왕으로써의 이름은 리야마시샤 미아마나(Riyamashisha-Miamana) 였습니다.

그럼 당시에 그를 와시무리야 샤탑나리야, 리야마시샤 마아마나 라고 불렀을까요? 그게 그의 진짜 이름이긴 하지만 너무 긴 이름을 매번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람세스 2세를 “시샤”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문서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성경에도 그를 ‘시삭’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도 그를 시샤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고대 히브리어나 이집트 문자에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어떻게 불리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문서가 있는데 이는 히타이트족의 문서입니다.

람세스는 히타이트 족과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둘 모두 상황이 여의치 못하자 카데쉬 전투 이후 휴전을 하게 됩니다. 그 휴전 조약이 진흙판에 새겨져 있는데 위에 설명한 람세스 2세의 이름 역시 이 진흙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흙판에는 람세스의 애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시샤”입니다.

람세스 2세의 이름은 시샤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하지만 성경의 역대하에 나온 이름은 시샤!가 아니라 시삭!입니다. 둘의 이름은 다른것이 아닌가요?

합리적인 질문이십니다.

이 반론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Q와 W의 변형의 역사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글자는 고대로 부터 계속해서 변형되어 왔습니다. 아래는 Q와 W의 변형의 역사인데, 막대 사탕 같은 모양의 글자는 BC 15세기에는 W였지만 BC 8세기에는 Q가 됩니다.

시샤와 시삭을 원시 시나이 문자 혹은 고대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시샤와 시삭 - 원시 히브리어로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둘은 거의 구분을 할 수 없지만 어느 시대에 읽느냐에 따라서 W로 혹은 Q로 읽히게 됩니다. BC 10세기 인물이었던 시샤 즉 람세스 2세는 당시에는 시샤라고 불렸겠지만 그의 기록을 읽던 후대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시삭’으로 읽게 되었을 것입니다.

람세스 2세가 출애굽 때의 파라오가 아니라 르호보암과 동시대의 파라오라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르넵타는 그의 조부였던 세티 1세 그리고 그의 부친이었던 람세스 2세 그리고 본인의 전쟁 기록을 자랑스럽게 비석에 새깁니다. 그리고 이 비석은 비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비석(The Israel Stela)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비석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메르넵타의 이스라엘 비석 - 이스라엘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이 비석은 이스라엘을 당시 근동 지역의 주요한 국가로 기록하고 있으며 메르넵타 비석에는 그런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승전했음을 (그리고 그 지역의 다른 나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출애굽 때의 파라오가 메르넵타의 아버지인 람세스 2세였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기에 나라를 형성하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고 있을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보시면 더 확실하게 이 때의 이스라엘이 떠돌이 민족이 아닌 나름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다는 증거를 보실수 있습니다.

아시켈론 벽 - 이스라엘 - 복구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위의 사진은 유명한 아시켈론 벽에 있는 그림입니다. 아시켈론 벽에는 람세스 2세때의 전쟁 장면이 있는데, 가운데는 히타이트와의 조약이, 그 양쪽에는 야노암, 게셀, 아시켈론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쟁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스라엘의 전쟁화는 일부만 보존되어 있는데, 위의 그림은 아래에 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늠름한 이집트의 말과 마차가 지치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말과 마차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친 말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빨간 원 안을 보시면 거친 숨을 내쉬는 듯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집트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적군인 이스라엘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이루기 전 이집트의 노예로 있다가 애굽에서 나올때 저런 전차가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을 타고 다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울이 이스라엘을 왕으로 다스릴때도 마차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소유의 마차가 등장하는 것은 솔로몬 때 이후 입니다.

그러므로 람세스 2세는 솔로몬 혹은 그 후대의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역대하 12장 처럼 르호보암을 공격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들어 맞습니다.

증거는 더 있습니다.

베를린 받침대

The Biblical Exodus…. Fairytale or Historical Fact?에서 이미지 캡쳐

BC 1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베를린 받침대의 내용 역시 이스라엘로 추정되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18대 왕조가 사용했던 조각상의 받침대로 쓰였던 이 돌판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람세스 2세는 절대로 출애굽때 이집트를 다스리던 파라오 일 수 없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논리적으로 이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내용을 입증해야 합니다.

  • 쇼셍크 1세가 유다를 침략했다는 증거
  • 람세스 2세가 재위하던 때에 이스라엘이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이집트에 살던 한 민족이었거나 광야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는 증거
  • 람세스 2세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어떻게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국가가 마차 부대를 운영 했을 정도로 강력할 수 있었는가?
  • 성경이 사실이 아니며 픽션에 불과하다면 성경을 통해 이집트 연대의 기준을 세운 것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
  • 성경의 한 구절을 통해 이집트 연대의 기준을 세울 정도로 신뢰할 수 있다면 나머지 구절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는 출애굽 한지 480년이 되었던 때, 출애굽기 1장에도 라암셋 성의 건축이 언급되었지만 창세기 47장에도 라암셋 성이 건축되었다는 언급이 있는 내용 등)을 왜 성경대로 적용하지 않고 출애굽이 없었다고 판단해야 하는지?
  • 이 글에는 소개하고 있지 않지만 패턴 오브 에비던스에 제기하고 있는 요셉, 출애굽, 여리고성 정복 등에 대한 증거들에 대한 반박

물론 데이비드 롤의 New Chronology도 기존 왕들의 연대에 대한 정리 등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연대에 대한 증거들 맥락들을 보면 주류 이집트학에서 제시하는 연대에 비해 훨씬 더 탄탄한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믿기 때문에 논리도 증거도 없이 억지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오류와 그 오류를 통해 내린 결론 그리고 이후 추가로 발견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주류 고고학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패턴으로 주류 과학계는 지구의 연대가 46억년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박에는 답할 수 없지만 지구가 절대로 46억년이 될 수 없다는 증거를 부정할 수 없지만 과학자들이 증거와 논리로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전과 이미지 메이킹으로 정치를 하고 있음에도 수 많은 신학자와 사역자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대신 인간의 오류가 가득한 거짓 논리를 신앙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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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빠진 크리스천들 – 성경이 말하는 정치 참여 https://www.fingerofthomas.org/%ec%a0%95%ec%b9%98%ec%97%90-%eb%b9%a0%ec%a7%84-%ed%81%ac%eb%a6%ac%ec%8a%a4%ec%b2%9c%eb%93%a4-%ec%84%b1%ea%b2%bd%ec%9d%b4-%eb%a7%90%ed%95%98%eb%8a%94-%ec%a0%95%ec%b9%98-%ec%b0%b8%ec%97%ac/?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c%25a0%2595%25ec%25b9%2598%25ec%2597%2590-%25eb%25b9%25a0%25ec%25a7%2584-%25ed%2581%25ac%25eb%25a6%25ac%25ec%258a%25a4%25ec%25b2%259c%25eb%2593%25a4-%25ec%2584%25b1%25ea%25b2%25bd%25ec%259d%25b4-%25eb%25a7%2590%25ed%2595%2598%25eb%258a%2594-%25ec%25a0%2595%25ec%25b9%2598-%25ec%25b0%25b8%25ec%2597%25ac Thu, 28 May 2020 10:29:03 +0000 https://www.fingerofthomas.org/?p=12570 The post 정치에 빠진 크리스천들 – 성경이 말하는 정치 참여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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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래 전부터 꼭 써야겠다고 생각한 글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부터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 운동까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며 서로를 대적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제 주위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보수이던 진보이던 정치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습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죽일듯이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오늘은 기독교인들이 정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성경은 정치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 운동을 비난하는 진보측의 모순

최근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님이 문재인 대통령 하야 운동을 하며 청와대 근처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저는 이를 지지하는 분들도 보고 비난하는 분들도 봅니다. 특히 믿지 않는 분들이 이를 비난하며 개신교에 안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권 때, 박근혜 정권 때 수 개월간 촛불 집회를 열며 광화문 거리에 아예 교통 통제를 하고 그것이 민심이며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환호했었기 때문입니다. 진보를 지지하고 보수를 반대하는 집회는 민주주의이고 그 반대는 비난의 대상이 되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그 이유를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 길에서 어른들이 욕을 하고 그것이 아이들의 교육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때는 아이들에게 욕을 들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풍선을 발로 차면서 아이들에게 욕을 하도록 시키기도 했습니다.

진보 측에서 전광훈 목사의 집회를 반대하는 것은 철저한 이기주의로 인해서 내가 믿는 바만 진리이고 나를 반대하는 모든 것들은 악이라는 비민주적이며 독재적인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진보 측 사람들의 주장이나 댓글들을 보면 어떠한 논리도 없이 보수는 악이며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보수가 아니더라도 조국 전 장관처럼 문재인 정권에 방해가 되는 윤석열 총장 같은 분도 논리나 근거없이 비난하고 저주합니다.

그들은 인권을 중요시 여기며 아무리 다수가 이기는 민주주의라도 소수의 의견과 소수가 존중 받아야 한다며 동성애나 동성 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소수 특히 본인들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그 어려움을 이겨낸 경험이 있는 어르신들을 무시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 운동을 지지하는 측의 모순

전광훈 - 정치에 빠진 크리스천

credit: Wikipedia Hanf21111

그렇다고 제가 전광훈 목사님의 집회를 지지할까요? 아니요, 오히려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삶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거짓이더라도 성경은 진리라는 Sola Scriptura 즉 오직 말씀이라는 신조로 살아갑니다. 전광훈 목사님이 한기총의 대표라면 아니 적어도 목사라면 말씀을 따라 살고 그 말씀이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혹은 다른 그 누구라도 세워진 권세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그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이며 그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문재인 대통령이 하나님을 안다(혹은 모른다)라는 뜻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잘살게 될거다 (혹은 못살게 될거다)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냥 이 권세가 하나님에 정하시고 세우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기독교인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좋던 싫던 그 권세를 인정하고 거스르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그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심판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한기총 회장을 비롯해서 그 휘하에 있는 목사들 장로들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에 대한 경외없이 그를 지지하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썼던 때는 지금 같은 인권 개념은 아예 없었던 때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당시 왕이나 황제들에 비하면 김정은은 천사와 같이 보일 정도로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디모데 전서 2:1~2>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대통령을 하야하라고 집회하는게 아니라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대통령을 내가 지지하던 반대하던 그가 기독교에 친화적이던 적대적이던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정치에 목숨을 걸까요? 왜냐하면 정권이 세워지고 그 정권이 나아가는 방향이 나의 삶을 바꾼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나라의 권력을 쥐고 그 나라가 움직여야 하는 방향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제적이던 사회적이던 나라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불신자들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말그대로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하나님을 배우고 다른 이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을 전하는 사명을 갖고 사는 곳이지 여기서 내가 호위호식하면서 떵떵 거리고 살려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보다 이 세상 나라의 정치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믿는바가 (그것이 보수적이던 진보적이던)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믿음으로 다른 이들을 거리낌 없이 비난하며 삽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제자들의 관심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성령께서 오실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무엇을 예수님께 물었을까요?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사도행전 1:6>

지금 우리에게 정치적인 소원이 있듯이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성경(구약)에서 예언되어 있다고 의심치 않고 믿었던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년간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렸고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며 그가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환영했습니다. 유월절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환호했지만 십자가에서의 연약한 모습을 보자 분노했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또 메시아면 너나 구해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당장 나의 삶이고 당장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고 그런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고 예수님의 명령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7~8>

이 세상에서의 일은 너희 알바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명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이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 생활에 크게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치인들과 정치싸움을 하지 않으셨으며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이 세상적인 만족과 이 세상에서의 구원 즉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로 기대를 받았을 때 그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이 이 세상의 무언가를 위해서 온것이 아니라 하늘의 무언가를 위해서 왔음을 설명하셨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으셨으며 이 세상에서의 권력과 힘에 관심이 많던 제자들에게도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나라가 공산화 되도 된다는 말인가요?

625 이후 한국 기독교계는 철저한 반공 교육을 했습니다. 그것은 일면 이해가 갑니다. 철저한 무신론적인 사상에서 시작한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권세는 정치인들에게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나라가 공산화가 되길 원치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온갖 죄와 악행, 회개 없음, 불순종 등이 또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아지고 우리 나라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 처벌로 공산화를 시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죄로 가득찬 남유다에 바빌론을 들어 정복케 하시고 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하박국 1:6>

그렇다면 공산화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하는 것은 정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크리스천은 정치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정치를 하듯이 무례하게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김정은이 대통령이 되거나 북한에 우리가 살아도 그렇게 해야 하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저 말씀을 하실때나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김정은에 비할바 없이 난폭하고 잔악한 시대에 더 잔혹한 왕이나 통치자들이 다스리던 시대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기도 하십니다. 커다란 착각이십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체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국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라의 주인되는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 즉 돈이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민주주의에서는 적어도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냐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되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습니까? 종교의 자유란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종교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창조주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왕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어떤 정치 체제에서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북한에 살아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고 제가 정치가 가장 잘 발달 되어 있고 돈을 가장 많이 버는 나라에 살아도 하나님이 없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지향하는 바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상관이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분들은 저의 의도를 오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머리에 각인되어 있는 고정 관념 안에서만 이 글을 이해하려고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우선 크리스천이 정치가가 되거나 정치 참여를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국회의원이 되거나 정치 참여를 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의 시스템 안에서 누릴수 있는 권리이며 또 어떤 분들에게는 주어진 명령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을 무시한 활동이라면 이는 곧 악이며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우리는 나 자신도 얼마든지 악의 편에서 활동하는 사람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정치 활동이나 참여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앞서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무엇에 대해 얘기하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국회의원을 잘 뽑아서 우리 지역구가 더 잘되거나 나라가 부강해 지는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내가 고생하고 힘들어지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우리의 마음 속 중심을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고 동성애와 같은 죄를 깨닫게 하거나 이 세상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수 있게 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내가 잘먹고 잘살기 위함인가?

이 세상에는 전자를 위해 정치 참여를 하는 많은 크리스천도 있고 후자를 위해 정치 참여를 하는 크리스천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말씀에 내 마음과 행동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게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내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대로만 산다면 과거에 살았던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이 세상은 이미 너무나도 살기 좋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회 문제는 인간들이 특히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게을렀기 때문이지 내가 정치 참여에 게을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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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툰이 숨기는 중간 단계 화석에 대한 반대 증거들 – 1편 https://www.fingerofthomas.org/%eb%b6%81%ed%88%b0%ec%9d%b4-%ec%88%a8%ea%b8%b0%eb%8a%94-%ec%a4%91%ea%b0%84-%eb%8b%a8%ea%b3%84-%ed%99%94%ec%84%9d%ec%97%90-%eb%8c%80%ed%95%9c-%eb%b0%98%eb%8c%80-%ec%a6%9d%ea%b1%b0-1/?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b%25b6%2581%25ed%2588%25b0%25ec%259d%25b4-%25ec%2588%25a8%25ea%25b8%25b0%25eb%258a%2594-%25ec%25a4%2591%25ea%25b0%2584-%25eb%258b%25a8%25ea%25b3%2584-%25ed%2599%2594%25ec%2584%259d%25ec%2597%2590-%25eb%258c%2580%25ed%2595%259c-%25eb%25b0%2598%25eb%258c%2580-%25ec%25a6%259d%25ea%25b1%25b0-1 Wed, 13 May 2020 11:29:23 +0000 https://www.fingerofthomas.org/?p=12578 The post 북툰이 숨기는 중간 단계 화석에 대한 반대 증거들 – 1편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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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많은 분들이 저에게 북툰의 중간 단계 화석에 대한 영상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사실 빨리 반박을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개인적인 일들로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고, 겨우 시간을 내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일단 중간 단계 화석을 시원하게 보여드린다는 이 영상은 솔직히 굉장히 잘 만든 영상입니다. 진화론을 잘 모르는 분들이 봤을때 이해가 쏙쏙 가도록 간결하고 시원하게 설명하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기꾼들이  시원하고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혹해서 넘어가는 것과 다를게 없습니다.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하고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꼭 북툰의 영상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이글을 통해 진화론의 모순이나 오류에 대해서 전반적인 설명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제 글은 영상만큼 간결하지 않고 설명도 길어서 읽으시며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실겁니다. 이미 진화론에 젖어 무작정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을 조금 깨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과학이란 무엇이냐?’라는 기준을 세우고 싶습니다. 그 기준은 “반복적인 연구, 실험, 관찰에 의한 결과를 주관적인 관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하고 싶으며 어떠한 과학자라도 이 기준에 반대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진화의 메커니즘

가장 먼저 진화론이 무엇인가부터 다시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모든 생물은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DNA에 있는 유전 정보를 통해서 생물의 신체 등이 형성됩니다. 진화라는 것은 이 유전 정보가 바뀌어서 다른 형태의 신체를 가진 생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진화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화가 단순히 변화를 의미한다면 진화는 분명히 일어납니다. 즉 생물의 변화는 분명히 일어납니다. 이는 과학적인 사실이며 오늘날에도 발견되는 부분입니다.

생명 나무와 생명 과수원

위 그림을 보시면 진화론이 말하는 생명 나무와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생명 과수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이론은 비슷한 부분이 있고 다른 부분이 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니 짧게 줄이면 창조론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대진화를 부정하며 소진화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또 커다란 의미의 자연 선택도 인정합니다.

특히 대진화 중에서도 유전 정보가 증가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진화론자들은 대진화 역시 소진화와 같은 메커니즘을 갖고 있으며 무작위의 돌연변이가 합쳐져서 새로운 종류의 생물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진화론이 불가능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작위의 돌연변이가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내는것이 확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비싼 돈을 주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샀다고 생각해보죠. 그게 윈도우 10이던 엑셀이던, 스타 크래프트던, 롤이던 테트리스던 상관없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그냥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능을 가진 (아마도 많이 똑똑한) 누군가가 긴시간 노력해서 프로그램 언어를 사용하여 힘들게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이제 그 프로그램 언어를 하나씩 하나씩 “무작위로” 바꾼다고 생각해 봅시다. 프로그램 언어를 모두 한번씩 무작위로 바꿨을때 그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작동할까요? 아니면 에러가 나기 시작하더니 작동하지 않게 될까요? 누구라도 저와 내기하셔도 됩니다. 당연히 그 프로그램은 처음에 비해 열등한 프로그램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100번 하면 100번, 10억번 하면 10억번, 열등한 프로그램을 낳는 똑같은 결과가 나올것이며, 그 관찰한 그대로를 결론 내리는 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상식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자연 선택은 그 낮은 확률의 사건을 이뤄낼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면 진화론자들은 꼭 자연선택에 대해 얘기합니다. 나무 위키는 자연 선택은 진화를 일으키는 주된 원동력이라고 주장합니다.[^1] 하지만 이는완전한 거짓말입니다. 자연 선택은 어떤 것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선택은 옵션이 주어졌을때 가능한 것이지 옵션이 없다면 선택도 하지 못합니다.

자동차 공장에 불량품을 아무리 효과적으로 제거해도 자동차가 비행기가 되지 않습니다. 자동차 공장을 비행기 공장으로 바꾸려면 공학자 등 수 많은 사람과 인력이 지적으로 공장을 바꿔야 합니다. 자연 선택은 진화를 일으키는 주된 원동력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생물들 중 자연에 적응하지 못한 (사실은 재수가 없어서 죽은) 개체들을 제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무작위의 돌연변이가 실제로 하는 일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 질병 증가그러면 무작위의 돌연변이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X-Ray를 찍는 방에 있는 경고 문구를 보셨을 것입니다. 방사능 표시가 있고 특히 임산부는 조심하라는 문구가 있죠.

왜 임산부들이 X-Ray를 찍을때 조심해야 할까요? 물론 극미량이기 때문에 한 두번은 큰 영향을 끼치지 않겠지만 방사선이 우리 몸에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그 돌연변이 때문에 장애아를 낳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곳이 핵발전소의 폭발이 있었던 체르노빌과 원전 사고가 있었던 일본의 후쿠시마입니다.

옆의 자료에 보실수 있듯이 원전 사고 이전과 이후 질병 발생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아 갑상선 암의 경우 20~50배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2]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사능이 우리 몸의 돌연변이를 증가 시켰고 그 돌연 변이의 증가가 정상적인 유전 정보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피폭된 사람들의 몸은 제대로 기능을 못하게 되었고 암 발병이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돌연변이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우리 몸은 제대로 기능을 못하게 되지 더 발전된 형태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게 과학입니다. 다량의 방사능에 100명을 피폭 시키던 10000명을 피폭 시키던 그들의 몸은 더 나빠지지 갑자기 거미줄을 쏘게 되거나 달리기가 빨라지지 않습니다.

초파리의 돌연변이 - 진화론

그리고 사람은 아니지만 진화론자들은 초파리에게 같은 실험을 했고, 그 결과는 창조론자들이 예상한 그대로 나왔습니다.

1927년 뮐러는 X-Ray를 이용해 초파리에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켰고 수 많은 초파리들중 단 한마리도 다른 종류로 바뀌거나 더 발전된 형태의 초파리가 되지 않고 날개가 기능을 못하게 되거나 더듬이가 나와야 할 자리에 다리가 나오거나 눈이 아예 없는등 비정상적인 초파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프로그램 언어를 무작위로 바꾸면 에러가 나다가 아예 작동을 안하게 되듯이 생명의 유전 정보의 DNA 서열을 바꾸면 비정상적인 생물이 나오게 됩니다.

이게 과학이고 이게 상식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과학적인 사실과 상식적인 사실을 중간 단계 화석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정상적인 생물의 화석만 발견하나요?

진화론자들은 너무나도 정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의 진짜 질문들에는 답을 안하고 자신들이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만 화려한 영상과 간결한 설명으로 사람들을 속이려 들기 때문입니다.

확률적으로 이론적으로 실험적으로 무작위의 돌연변이의 축적은 비정상적인 개체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은 수많은 비정상적인 개체 중 정말 어쩌다가 발생한 정상적인 개체가 살아 남아서 진화를 이어나간다고 가르칩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도 진화의 한 단계로써 수도 없이 많은 생물로써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개체들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개체들의 화석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비정상적인 개체들을 보지 못하고 화석으로도 발견하지 못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화론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부정하고 싶다면 돌연변이가 정상적이고 더 발전된 형태의 개체들만 만들어 낸다는 증거를 갖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비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보 이론에 무작위의 정보 변경이 더 발전된 형태의 정보를 생성해 낼 수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화석의 부족함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탄식들

이런 전문적인 생각들은 무시한체 겉모습만 바뀌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을 미혹하는 진화론자들과는 달리 다수의 고생물학자들은 화석의 부족함을 항상 고민해왔습니다. 그들은 책에서 또 강연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딜레마를 토로합니다.

예를들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 디자인의 주요 중간 단계 사이에 대한 화석의 증거 부재는 우리의 무능 심지어 우리의 상상 속에서 기능이 있는 중간 단계 형태를 만드는 것들은 점진적인 진화 얘기에 지속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문제…”[^3] 라고 고백했으며, UCSD의 생물학 교수 크리스 윌스는 화석 기록을 통한 모든 점진적 진화에 대한 살는 이전에 불 수 없었던 신기한 구조와 기능의 나타남이 없는 매끄러운 변화라는 것이 흥미롭다. [^4]라며, 거꾸로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중간 단계 화석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고백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자 이제 북툰의 영상 내용을 반박해 보겠습니다.

우선 설명을 돕기 위해 영상의 순서를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고래의 진화

파키케투스 - 북툰

아마도 진화론자들이 가장 자신있게 내놓는 중간 단계 화석은 고래의 진화일 것입니다. 영상에서는 단순하게 그리고 너무 당연한것처럼 설명했던 고래의 중간 단계 화석에 대해서 위에 있는 굴드와 윌스의 설명 그리고 저의 설명을 대입해서 깊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옆의 사진은 어떤 동물의 화석일까요? 정답은 고래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파키케투스의 화석입니다. 고래와 아주 비슷하죠?

아마 어떤 사람에게라도 이 화석 사진을 보여주면서 고래라고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북툰은 조밀한 귀의 구조와 다리뼈가 두껍기 때문에 고래의 조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설명이 과학적인 가치를 가질까요?

진화론자이자 뉴사이언티스트의 멤버 로저 르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2개의 종을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것을 토대로 유전적인 관계를 정확하게 추론할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중대하고 자세한 해부학에서 이런 접근이 성공적이기도 하지만 이는 기만적이 될수 있다. 왜냐하면 구조의 유사성이 반드시 같은 유전적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류인) 상어와 (포유류인) 쇠돌고래는 보기에 아주 비슷하지만 이는 그들이 같은 환경에서 적응했기 때문이지 유전적인 사촌이 아니기 때문이다.”[^5]

여기서 퀴즈를 내겠습니다.

두개의 골격 구조

옆에는 두개의 골격 구조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어류이고 어느 것이 포유류 입니까?

여러분은 뼈의 모양을 보고 알아 맞출수 있습니까? 북툰에 영상 만든 분은 찍지 않고 정답을 알 수 있을까요? (정답은 2번째 글 시작에 공개 하겠습니다.)

이 두 개체의 겉모습은 아주 비슷합니다. 하지만 두 개체는 유전적으로 완전히 다르며 둘 다 어류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겉모습만을 갖고 누가 누구의 조상이며 진화의 중간 단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는 사람들이 진화론이 사실이라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지 이해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북툰의 영상은 계속해서  고래와 육상 포유류의 딱 중간에 있는 해부학적 특성을 가진 암블로케투스가 발견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부분이 중간이란 것일까요?

1994년 암블로케투스의 화석이 발견 되었을 때 진화론자들은 두개골에 고래처럼 분수공이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스미소니안 박물관을 포함해 암블로케투스의 모형에는 분수공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사기였습니다.

당시 암블로케투스의 연구팀의 리더 한스 드위슨 박사에게 분수공에 대한 근거를 요구하자 그는 콧뼈 앞부분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쿠치케나 파키케투스의 콧구멍(분수공)이 앞에 있기 때문에 (물론 이 역시도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추측했다며 이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6]

물론 지금은 아무도 암블로케투스에게 분수공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중간 단계라고 주장되는 어떤 동물에게도 분수공은 없습니다.

암블로세투스 - 화석 모형

빨간 동그라미는 분수공이 있는곳, 파란 동그라미는 위로 튀어나온 눈

또 암블로케투스는 고래나 다른 중간 단계 동물들과 다른 특징이 있는데 이는 눈에 옆에 달려 있지 않고 악어처럼 위로 튀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드위슨 박사의 스승인 깅그리치 박사는 “어쩌면 암블로케투스는 (고래) 계통도의 옆쪽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이상하게도 눈이 머리 위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기 고래라고 하기에는 눈이 특이하게 큽니다.”[^6] 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북툰의 영상에서 시원시원하게 암블로케투스는 딱 중간 단계입니다. 라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어떠한 비판적인 생각이나 검증도 없이 최면에 걸린듯 이를 받아들입니다.

북툰 영상 제작자에게 묻습니다. 암블로케투스의 눈은 왜 머리 위에 달려있으며 왜 큰가요? 암블로케투스는 고래의 중간 단계 동물입니까?

1994년 발견된 로드호케투스의 화석에 대한 연구 결과도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당시 깅그리치 박사팀은 로드호케투스의 발에 물갈퀴가 있고 꼬리도 고래처럼 상하로만 움직이는 넓적한 형태라고 묘사하고 그렇게 모형이나 그림을 그렸지만, 당시 그들은 꼬리나 발 화석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었고, 로드호케투스가 고래의 중간 단계라는 믿음 하나로 그렇게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이후에 꼬리 화석과 발 화석이 발견되고 그들의 거짓말이 탄로 났지만 그들을 비판하는 진화론자들은 없었습니다. 북툰도 로드호케투스의 꼬리는 수정했지만 발에는 여전히 물갈퀴가 있는것처럼 그려놨습니다. 북툰 영상 제작자에게 로드호케투스의 물갈퀴 화석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경우는 거짓말로 어떤 경우는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래의 중간 단계로 끼워 맞춰서 진화의 과정을 만들어 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할까요?

파키케투스에서 고래로 진화했다면 단순히 코뼈가 길고 다리가 짧아지는 것 외에 수천가지의 특징이 함께 변했어야 합니다. 예를들어 꼬리가 상하 좌우로 움직이다가 상하로만 움직일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얇은 꼬리가 갑자기 넓어지게 됩니다. 분수공이 생기고 호흡기가 분수공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분수공에는 없던 근육이 생겨 열렸다 닫혔다 할 수 있어야 하고, 심장은 엄청나게 커져야 합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뒷다리가 퇴화했고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그 “뒷다리 뼈”가 없으면 고래는 새끼를 낳을수가 없습니다. 만약 지금 퇴화된 뒷다리 뼈가 출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뒷다리가 다리로 사용될때는 어떻게 출산을 할 수 있었으며 왜 뒷다리가 퇴화되면서 출산의 역할을 맡게 됩니까?

진화론자들은 이에 대한 연속적인 중간단계 화석을 제시할수 있습니까?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변해왔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위에 설명한대로 고래의 몸집이 커지는 것과 그에 필요한 다른 장기들이 커지는 것은 무작위의 돌연변이의 메커니즘에서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몸집은 커지지만 다른 장기들이 돌연변이에 의해서 작아지면서 멸종된 불완전한 개체들이 있습니까? 출산의 메커니즘이 달라지면서 뒷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멸종 된 불완전한 개체는 없습니까? 왜 지적 능력이 없는 무작위의 돌연변이의 과정이 항상 필요한 새로운 구조와 기능들을 부드럽게 만들어 낼 수 있는거지요? 또 왜 몸이 유선형으로 물에서 살기 적합하고 다리가 짧아 육지에서 살기 부적합해지면서 호흡기를 비롯한 장기들이 물에서 살기 적합하게 변한거지요? 이것이 무작위의 돌연변이로 설명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무작위의 돌연변이에 의해 장애를 갖게된 월등하게 더 많아야 할 화석들이 수도 없이 발견되었습니까?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증거를 보여줘야 하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린의 긴 목이 가르쳐 주는 창조의 증거

북툰은 중간 단계 화석의 첫번째 예로 기린과 그 중간단계 화석인 사모테리움과 오카피를 선택합니다. 그러면서 기린에 대한 설명으로 다윈의 자연 선택설을 주장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저도 초등학교를 다닐때 교과서에서 기린의 목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기린이 높이 있는 먹이를 먹으려다 보니 목이 점점 길어지면서 기린이 되었다는 설명이었죠. 죄송하지만 제가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과일을 따고 싶어도 제 목이나 팔은 길어지지 않습니다. 또 어떤 원주민 부족처럼 목에 장신구를 이용해 목이 길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형질이 제 자손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 형질은 DNA의 정보가 바뀌어야 전달됩니다.

자 기린의 목이 길어졌다고 해봅시다. 그게 왜 생존에 유리하죠? 왜냐하면 초원에는 나무뿐 아니라 풀도 엄청나게 많고 목이 길면 맹수들에게 들키기도 쉽고 빨리 뛰기도 어렵고, 물을 마시기도 어려운데요?

그리고 혈액이 긴 목의 머리까지 공급되는것도 어렵고, 긴 목의 머리까지 공급되더라도 기린이 물을 마시기 위해서 고개를 내리면 혈압이 치솟아서 극도로 고통스러워야 합니다. 하지만 기린에게는 강력한 심장과 또 높은 혈압의 고통을 막아주는 혈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굉장히 복잡하며 공학적인 설계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의 질문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목은 길어졌지만 심장은 길어진 목만큼 강해지지 않아서 제대로 피를 공급할 수 없어서 멸종된 개체의 화석을 발견한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거꾸로 목이 길어지기 전에 심장이 커져서 너무 혈압을 높여서 고통속에 멸종한 개체를 갖고 있습니까?  왜 기린은 긴 목을 움직일수 있는 강한 목근육을 갖게 되었습니까? 목은 길어졌지만 근육은 오히려 약해졌을수 있지 않습니까? 왜 무작위의 돌연변이가 목도 길어지게 하면서 이에 필요한 장기나 다른 부취들도 그 목에 적합하게 만들었나요?

기린은 진화가 아니라 창조의 증거입니다.

이제 사모테리움 화석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모테리움의 목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포유류에 비해서 긴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린의 조상이라는 결론으로 귀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따로따로 만들어진 다른 개체가 중간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모테리움과 기린의 목길이 차이는 여전히 많이 납니다. 창조론자들은 항상 “연속적인” 중간 단계 화석을 요구해 왔고, 진화론자들도 사모테리움의 목길이를 갖고 있던 개체가 단번에 기린의 목길이를 갖는 개체로 진화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어떤 개체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중간 길이의 목을 갖고 있는 개체와 기린을 진화론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참으로 여기고 중간 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용각류의 긴 목이 얘기하는 창조의 증거

이제 이번 글의 마지막 반박을 제시하겠습니다. 제가 글 서두에 창조론자들은 소진화를 인정한다는 것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창조론자들의 논거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진화론자들이 용각류의 긴 목을 창조를 부정하고 진화를 증명하는 증거로 갖고 와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공룡 종류 혹은 용각류에서 북툰이 제시한 다양한 길이의 목을 가진 용각류가 소진화를 통해 분기되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장을 하는 두 그룹중 한 그룹이 자신의 주장이 맞다며 다른 그룹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를 인정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마음 아파 하겠지만 용각류 공룡은 진화론이 틀렸으며 창조가 맞다는 강력한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우선 계속 해온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무작위의 돌연변이에 의해 목이 점점 길어지고 자연 선택에 의해 목이 길어진 공룡 중 제대로 된 즉 목 뼈 모양도 맞고 근육도 강해지고 몸의 균형도 맞게 진화된 개체만 살아남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목이 길어지면서 무작위의 돌연변이에 의해서 목 뼈 모양이 틀리거나 목 근육이 약해지거나 몸의 균형이 무너져 걸어다닐수 없었던 개체의 화석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용각류 공룡은 이런 단순한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 합니다.

용각류 공룡 - 북툰이 만든 영상 속 캡쳐

Credit: 북툰 유튜브에서 캡쳐

여러분 혹시 레고나 블록 놀이를 해본적이 있으십니까? 레고나 다른 블럭으로 아니면 실제 건물을 짓는데 브라키오 사우루스처럼 아래는 좁고 위에가 엄청나게 넓거나 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균형잡기 쉬울까요? 조금만 균형이 흐트러져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수각류 공룡과 달리 목이 긴 용각류 공룡이 몸의 중심을 잡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프레드릭 히란에 따르면, 용각류에는 다른 작은 공룡들과는 다르게 브라키오 사우루스 같은 목이 긴 공룡들은 엉치뼈가 하나 더 있고 다리뼈와 결합되어 있어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여 긴 목을 들어올릴때도 버틸수 있게 해주었습니다.[^7]

그 뿐 아닙니다. 히란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식으로 먹기 위해서는 긴 목이 필요 했을 것이다. 만약 긴 목이 단단한 척추뼈로 되어 있었다면 목을 드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대형 용각류의 척추뼈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이런 공기로 차있는 혹은 압축 공기에 의한 뼈는 (다른 공룡들이 갖고 있는) 단단한 뼈의 무게와 비교해 35% 밖에 되지 않는다.”[^7]

첫번째, 다른 수 많은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대형 용각류 공룡은 필요한 특징이 적합한 종에만 들어가 있습니다.

두번째, 북툰은 목의 길이에만 집중해서 설명했지만 (물론 그마저도 일관성을 갖고 길어지거나 짧아진게 아니라 길어졌다 짧아졌다를 반복했다.) 진화론이 입증해야 하는 단계적인 골격 구조의 변화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 뼈가 단번에 단단한 뼈에서 35%밖에 안되는 가벼운 뼈로 뿅! 바뀐게 아니라면 진화론은 90%만 가벼운 뼈, 80%만 가벼운 뼈, 70%, 60%, 50%… 35% 가벼운 뼈의 진화의 단계를 보여줄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부합하는 계통은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용각류가 있다면 그 용각류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어떤이는 원시용각류(Prosauropod)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일반인들 헷갈리라고 이름만 원시 용각류라고 지어놨을뿐 진화론자들도 원시용각류가 용각류의 조상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7] [^8]

왜 일까요? 다른 공룡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지 일관성 있는 진화의 과정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볼까요?  원시 용각류인 아도닉스(Aardonyx)는 많은 음식을 먹기 위해 용의한 넓은 U 모양의 입대신 좁은 V 모양의 입을 갖고 있습니다. 또 이족보행을 하면서도 다른 원시용각류와는 달리 그리고 사족보행을 하는 공룡처럼 허벅지 뼈가 아래다리 뼈에 비해 긴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연구했던 보난은 자신이 갖고 있었던 가설이 “산산조각” 났다고 말합니다.[^9]

또 다른 용각류 조상 후보(?) 레오네라사우루스는 용각류의 특징을 조금 갖고 있지만 사족 보행을 하는 공룡처럼 4개의 엉치뼈를 갖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또 숟가락 모양의 앞으로 기운 이빨을 갖고 있는데 이는 원시 용각류가 아니라 후기 용각류가 갖고 있는 특징입니다. 이를 연구했던 디에고 폴은 “이전에 갖고 있었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놨다.”[^10] 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북툰의 주장대로 용각류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진화했다면 원시 용각류와 용각류는 일관성 있고 공통되는 특징들이 생겨나야 합니다. 하지만 각 공룡들은 계통과 관계없이 여러 다른 공룡들의 특징들이 섞여 있고 다르며, 진화론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연속적인 중간단계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진화론은 목의 길이가 늘어났다 줄어든다고 입증되는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공학적인 문제와 정보 생성의 문제, 또 계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진화론은 이런 문제들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훌륭한 영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는 게속해서 잘못된 정보로 사람들을 홀리는 에끌의 창조론 연대기와 비슷한  전략입니다.

이는 제가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Oxford dictionary of Zoology는 “현재의 이론은 원시 용각류가 용각류의 조상이 아니라 옆에 붙어 있는 가지(Side-branch) 였음을 제안한다.”[^11] 라고 설명합니다.

북툰이 수 많은 용각류의 화석을 훌륭하게 찾아낼수 있었다면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용각류의 조상 화석을 발견할 수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 다른 목 길이를 가진 공룡은 보여줄 수 있지만 그 긴 목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특징의 발전은 보여줄 수 없는 북툰이 또 진화론자들이 창조론을 바탕으로 한 수 많은 가정들을 화석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창조론자들을 비웃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다른 내용들 역시 한 두개의 글을 통해서 반박하도록 하겠습니다.

Reference

[^1]: 나무 위키, 자연 선택

[^2]: 국민 일보, 방사능 악몽 이제 시작, 일본 가지마 의사의 경고, 2019.07.24

[^3]: S.J.Gould, Is a new and general theory of Evolution emering?, 1982

[^4]: C.Wills, Genetic Variability, Pg. 94~96, 1989

[^5]: R. Lewin, Bones of Contention, 1987

[^6]: Fingerofthomas 유튜브, 고래의 진화, 2015.02.01

[^7]: F.Heeran, Rise of the Titans, Nature, 2011.07.14

[^8]: J.Mcintosh et al, The complete dinosaur,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9]: A.Yates et al, A new transitional sauropodomorph dinosaur from the early Jurassic of South Africa and the evolution of auropod feeding and quadrupedalism, Proc. R Soc B, 2010

[^10]: D.Pol et al, A new sauropodomorph dinosaur from the Early Jurassic of Patagonia and the origin and evolution of the sauropid-type sacrum, PLOS one, 2011.01.26

[^11]: M.Allaby, Oxford Dictionary of Zoology, Oxford Universit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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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8~21 묵상 –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들 https://www.fingerofthomas.org/%eb%a1%9c%eb%a7%88%ec%84%9c-1%ec%9e%a518%ec%a0%8832%ec%a0%88-%eb%ac%b5%ec%83%81-%ed%95%98%eb%82%98%eb%8b%98%ec%9d%84-%eb%b6%84%eb%aa%85%ed%9e%88-%ec%95%8c-%ec%88%98-%ec%9e%88%eb%8b%a4/?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b%25a1%259c%25eb%25a7%2588%25ec%2584%259c-1%25ec%259e%25a518%25ec%25a0%258832%25ec%25a0%2588-%25eb%25ac%25b5%25ec%2583%2581-%25ed%2595%2598%25eb%2582%2598%25eb%258b%2598%25ec%259d%2584-%25eb%25b6%2584%25eb%25aa%2585%25ed%259e%2588-%25ec%2595%258c-%25ec%2588%2598-%25ec%259e%2588%25eb%258b%25a4 Fri, 25 Oct 2019 17:55:24 +0000 http://fingerofthomas.org/?p=12542 The post 로마서 1:18~21 묵상 –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들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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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제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고 또 보고 있습니다.

세포의 복잡성 -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증거

단순한 세포 하나도 엄청난 복잡성이 존재합니다. 지금 인간이 이 것을 만들려면 다수의 과학자가 수퍼 컴퓨터 등을 사용해야 겨우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연히 만들어 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신론을 믿는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지금의 우리가 생명이 살기에 너무나도 희박한 확률을 뚫고 우연과 우연과 우연을 거쳐서 생겨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이런 세상이 만들어질 유이한 방법은 전능하신 창조주가 계시거나 보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무한한 다중 우주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 저를 포함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수많은 증인들을 보고 있으면서 그리고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단 한번도 다중 우주를 관찰하거나 그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들은 스스럼 없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세상에 바퀴벌레를 만들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뛰어난 과학자들도 바퀴벌레는 커녕 그 보다 훨씬 더 단순한 형태의 바이러스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이 우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적인 능력은 우연이라는 과정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빠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인 능력으로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연이란 과정은 가장 복잡한 형태의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피조물들을 통해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등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댈 수 없으며 하나님은 정당하게 자신의 진노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벌하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해서 피조물들을 통해 즉 우주와 별들과 생명체와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없을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또 우리의 영혼에도 하나님을 새겨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신심이라는 것을 갖게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와 민족들은 신을 찾습니다. 그 신이 누구인지는 모를수도 있고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인지하지 못할수는 있으나 적어도 물질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존재는 인식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도 정한수를 떠 놓고 하늘을 보며 기도하기도 하고 축구를 보면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고 로또를 사면서 누군가에게 당첨을 구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고 그 사람의 명복을 빕니다.

아는 분께 들은 얘기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꿈에서 절벽에서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맞닥뜨렸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분명히 자신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머리를 통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성과 능력과 영광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거부한 것은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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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2
세종 대왕은 지옥에 가셨을까? https://www.fingerofthomas.org/%ec%84%b8%ec%a2%85-%eb%8c%80%ec%99%95%ec%9d%80-%ec%a7%80%ec%98%a5%ec%97%90-%ea%b0%80%ec%85%a8%ec%9d%84%ea%b9%8c/?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c%2584%25b8%25ec%25a2%2585-%25eb%258c%2580%25ec%2599%2595%25ec%259d%2580-%25ec%25a7%2580%25ec%2598%25a5%25ec%2597%2590-%25ea%25b0%2580%25ec%2585%25a8%25ec%259d%2584%25ea%25b9%258c Mon, 30 Sep 2019 10:18:55 +0000 http://fingerofthomas.org/?p=12535 The post 세종 대왕은 지옥에 가셨을까?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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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왕 - 광화문

Credit: Y H Lee from Pixabay

“세종 대왕은 지옥에 가셨나요?”

아마 변증을 하는 사람이라면, 또 사역자들은 초신자들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 여러번 받은 질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하지만 선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이 불공평하며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 가장 대표적인 예로 조선의 최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 대왕님이 지옥에 갔는지의 여부를 물어봅니다.

저는 이에 대한 신학자나 변증가들의 답을 읽어 보았지만 많은 답들이 질문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질문한 분들이 알아야하고 생각해 보아야하는 더 크고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세종 대왕님이 지옥에 갔을까요?

우선 질문 자체에 대한 답을 해볼까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모릅니다!” 입니다. 왜 모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세종 대왕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행전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하나님의 후손일진대 하나님의 신격을 결코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새긴 금이나 은이나 돌 같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 <사도행전 17:29~30>

어떤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함을 눈감아 주셨고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갖고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답은 “모른다!”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질문에 내재되어 있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고 싶습니다.

첫번째 문제점: 예수님을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억울하거나 불공평한 일인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으며 나에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내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을 이룰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모든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것이 합당한 가능성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으며 세종 대왕님을 포함해서 그가 누구이던 역사 속에서 가장 착하고 선하게 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누구이던 그 역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것이 정당한 죄인이며 예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배신하고 창조주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셔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습니다. 즉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가도 인간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공평을 따진다면 예수님이 누군지 복음을 못듣고 지옥에 간게 불공평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구원을 얻은것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천국에 가고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건 놀라운 은혜이지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가 아닙니다.

두번째 문제점: 만약 세종 대왕님이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믿고 지옥에 가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인가?

세종 대왕님이 지옥에 갔는지를 묻는 분들에게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선한가 악한가의 여부를 판단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혹은 창조주의 존재 없이는 선과 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즉 이 세상의 선악의 기준은 창조주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이지 피조물이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있을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시나니 <로마서 9:14~15>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이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를 판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죄악이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죄인들의 행태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인 피조물들에게 어떤 일을 해하시던 그것은 그분의 주권이고 그분의 판단입니다. 10억원짜리 피카소 그림의 소유주가 그 비싼 그림을 불에 태웠다고 죄가 됩니까?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잡초같고 한번 치고 사라지는 파도같은 허무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토기장이가 같은 덩어리의 진흙으로 한 그릇을 만들어 존귀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를 만들어 수치에 이르게 할 권한이 없겠느냐? <로마서 9:20~21>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세종 대왕을 지옥에 보냈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 세종 대왕이 지옥에 가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천국에 가면 믿을 것입니까?

아니요…. 우리는 어떤 상황이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 숨어야 합니다. 선악과 먹은 피조물이 자신의 근거 없는 판단으로 하나님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죄악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번째 문제: 하나님이 나보다 어리석으신가? 하나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나?

이런 질문에는 하나님이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고 나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보다 낫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선악과 먹은 인간의 교만이며 착각입니다.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9>

저는 하나님이 세종 대왕님을 천국에 보내셨는지 지옥에 보내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하게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셨더라도 그게 가장 공정하며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정함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셨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을 가장 공정하고 공의롭게 처리하셨을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네번째 문제점: 내가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알아야 하나?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믿기 싫기 때문에 제시하는 핑계거리에 불과합니다.

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죄인들은 내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떠한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부분을 명확히 말씀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들어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갔던 지옥에 갔던 그것이 나의 구원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많은 사람들은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재앙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 것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여러 해석을 가능케하지만) 그런데 우리는 그 중간에 일곱 천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곱 천둥이 자기 음성을 내어 말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기를, 일곱 천둥이 말한 그것들을 봉인하고 그것들을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 계시록 10:4>

하나님은 왜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재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으면서 일곱 천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으셨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알 필요가 없고 알아서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또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창조 때 목적하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을 살기에 넘치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금하거나 알려주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묵상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진정 합리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해야하는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모든 결정을 신뢰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쉽게 또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로 기독교 변증을 공부해 보실 것을 권면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수고했다, 힘들었겠다, 감사하다는 메일을 보내주십니다. 그런 메일이 감사하고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이 일들을 하면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저 자신입니다. 변증은 저에게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 주었고 뜬구름 잡는 것 같았던 성경 구절이 사실은 심오한 철학적 근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어떤 일에 어떤 결정을 내리셨더라도 저는 그 결정이 최상의 선택이며 가장 공의로운 결정이라고 신뢰합니다. 그 어떤 결정도 제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 일이라도 심지어 내가 지옥에 가야 할지라도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던 없던) 저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이 저의 창조 목적입니다.

저는 단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 지옥가는게 당연한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 거짓말 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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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학 교수님이 자신의 글을 삭제해야 했던 이유 https://www.fingerofthomas.org/%ec%84%9c%ec%9a%b8%eb%8c%80-%ec%9a%b0%ec%a2%85%ed%95%99-%ec%9e%90%ec%8b%a0%ec%9d%98-%ea%b8%80%ec%9d%84-%ec%82%ad%ec%a0%9c%ed%95%b4%ec%95%bc/?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c%2584%259c%25ec%259a%25b8%25eb%258c%2580-%25ec%259a%25b0%25ec%25a2%2585%25ed%2595%2599-%25ec%259e%2590%25ec%258b%25a0%25ec%259d%2598-%25ea%25b8%2580%25ec%259d%2584-%25ec%2582%25ad%25ec%25a0%259c%25ed%2595%25b4%25ec%2595%25bc Sat, 21 Sep 2019 10:28:16 +0000 http://fingerofthomas.org/?p=12521 The post 우종학 교수님이 자신의 글을 삭제해야 했던 이유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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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저는 ‘빅뱅이 사실일 수 없는 4가지 증거‘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우종학 교수님은 ‘ ‘빅뱅이 사실일 수 없는 4가지 증거라고? – 편집과 왜곡,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라는 글로 반박을 시도하셨습니다.

4년 후 우 교수님은 자신의 글에 무언가를 더하시더니, 제가 그 글에 대한 반박글을 쓰자 갑자기 자신의 글을 삭제 (혹은 비공개 전환)해 버렸습니다. 지금 교수님의 글이 쓰여져 있었던 주소에는 아래와 같이 아무 내용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종학 -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삭제해야

Credit: @별아저시의 집 – 우종학의 과학 이야기 & 사는 이야기

왜 교수님은 자신의 글을 삭제해야 했을까요?

그 분의 마음을 제가 알 수 없지만 그 분이 4년 지난 글을 삭제해야 했다면 스스로의 글이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글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우종학 - 빅뱅의 증거는 엄밀하다

Credit: ParaboLOG

4년전 쓰신 반박글에는 빅뱅 이론에 대한 자신감으로 증거의 엄밀성이 이미 다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최근 수정했던 글에는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종학 교수님이 추가한 글 2

Credit: @별아저시의 집 – 우종학의 과학 이야기 & 사는 이야기

즉 빅뱅 자체에 대해서 과학으로 엄밀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빅뱅 자체에 대해서 과학으로 엄밀하게 설명할 수 없고 저는 그 엄밀하지 않은 증거들을 나열해서 빅뱅이 사실일 수 없다는 글을 쓴 것입니다. 본인이 인정하는 증거의 부족을 나열한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요?

본인 스스로 증거가 엄밀하지 않다고 말해놓고 저에겐 과학적인 사실을 왜곡한다고 근거없는 비방을 하셨고, 무엇보다 제가 어떤 과학적인 사실을 왜곡했는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글을 삭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인 이영욱 연세대 교수님의 인터뷰는 그리고 그 인터뷰의 내용이 4년 전에 쓴 제 글의 한 주장과 일치하는 점은 교수님의 글이 얼마나 조악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우 교수님의 글을 링크하고 가능한 많은 분들이 그 글과 제 글을 읽고 비교해 보시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과학자가 표준 우주론에 대한 반박글을 쓰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과학적인 반박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했고 저의 의아함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수님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또 다른 너스레로 아무렇지 않은 척 과학적인 증거가 아닌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이용해서 저를 음해하고 비방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저와 토론을 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진정한 과학적 증거와 이성적인 논리 앞에 유신 진화론, 오랜 지구론 등 교수님이 지지하고 전파하는 이론들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저는 본인의 글을 삭제해야 했던 혹은 비공개로 전환해야 했던 이 상황이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글을 삭제하셨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전체 글을 어딘가에 저장해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는데 감사하게도 paraboLOG라는 블로그에서 그 분의 글을 공유하고 계셨고, 아래 그 글을 공유합니다.

여러분이 이중잣대가 없는 정말로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로써만 판단하신다면 두 개의 글 중 누구의 글이 과학적으로 더 우월한지 명확하게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빅뱅이 사실일 수 없는 4가지 증거라고?

이 글(http://solarcosmos.tistory.com/m/744)은 창조과학회의 글 빅뱅 우주론이 사실일 수 없는 4가지 증거에 대한 반론임.

표준우주론 -흔히 뱅이론이라고 불리죠-은 물리학과 우주론을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언론에 나온 기사 몇개 읽고 대중과학서 몇권 읽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비전문가들의 이야기는 무시하시는게 좋습니다.

특히 대학에서 무슨 전공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젊은지구론을 지지하는 음모론자가 천문학, 지질학, 물리학, 핵물리학, 생명과학을 두루 마스터한 전문가 행세를 하며 많은 글을 써서 대중들을 혹하게 하나 봅니다. 이런 글들은 주의하기 바랍니다.

한번 생각들 해보세요. 얼마나 위대한 분이시길래, 자연과학 전체를 망라해서 과학자들을 거짓말장이라고 판단한답니까. 그정도로 뛰어난 분이면 왜 그러고 있겠어요. 벌써 빅뱅이론을 반박하는 논문 하나써서 노벨상이라도 받았겠지.

———————————

빅뱅이 사실일 수 없는 4가지 증거라고?

— 편집과 왜곡된 글을 생산하는 젊은지구교인들은 그만 잠잠하라.

요 며칠 빅뱅이 사실일 수 없는 증거라는 글이 페북에 떠돌고 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이 사실인가요를 물어보는 페친들도 있고 어느 담벼락에 개제된 그 글을 보고 저를 호출하신 분도 있고 메세지를 보내서 물어보는 분도 있습니다.

일일히 답하는 게 매우 비효율적이라서 제 담벼락에 몇가지 설명합니다. 영상과 기사를 따서 마치 빅뱅이 허구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쓰여진 이 글을 보면 참 노력한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봐야 과학자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고 일반 대중만 헷갈리게 되겠죠. 이런 활동이야 말로 과학을 적대시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변증에도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1. 이글은 마치 과학자들이 빅뱅이 틀렸다는 증거를 숨기고 있다는 식으로 음모론을 제기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글이 허구임을 파악할 단서가 보입니다. 서두를 따오겠습니다. “빅뱅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설명을 들으면 그럴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이 숨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

과학자들이 뭘 숨긴다는 걸까요? 과학자들은 뭘 숨기지도 않고 일반대중에게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표준우주론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내용들, 우주배경복사, 우주팽창, 핵융합, 급팽창이론 등의 장단점이나 증거의 엄밀성 등등은 이미 다 잘 알려진 사실인데 뭘 숨기고 말고 합니까? 숨긴다고 숨겨집니까?

과학자들은 과학자사회에서 토론하고 설득하고 경쟁하는 것이지, 일반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학자가 도대체 누구로부터 뭘 숨긴다는 건지. 여기서 부터 음모론의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죠. 아, 정말 그런가? 하는 의심이 생기면서 구미가 당기는 순간, 음모론의 낚시밥에 딱 걸리는 것이죠.

2. 그렇다면 이 글이 말하는 4가지 증거는 그럴듯 할까요? 그럴듯하게 썼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침소봉대라고 합니다. 과학은 진행 중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고 연구 중인 내용이 많죠. 하지만 잘 모르는 어떤 현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과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예를 들어볼까요? 지동설과 천동설 중에서 우리는 지동설이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턴 이후, 행성들의 운동이 뉴턴역학의 예측과는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동설이 틀린 걸까요? 지동설의 반증이 나타난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것이죠. 이것은 일반상대론에 의해서 중력이론이 더 완벽하게 구현되면서 20세기가 되면서 해결이 됩니다.

이 글에서 예로 드는 문제들이 다 그런 식입니다. 화학적 진화의 문제나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나 블랙홀이나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재밌는 현상들이죠.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과학자들이 연구 중이라는 사실이 도대체 왜 빅뱅이 틀렸다는 증거가 되고, 왜 그것을 과학자들이 숨기고 있다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3. 가장 답답한 것은 빅뱅이라는 말로 도대체 뭘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빅뱅 자체는 플랑크 타임 스케일 보다 작은 시점이라 과학으로 기술할 수 없는 시점입니다. 마치 우주는 팽창하지만 빅뱅은 없었다는 식의 이해는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이죠. 우주가 팽창한다면 과거의 빅뱅은 피할수 없는 것이죠. 그것은 빅뱅이라는 시점을 우리가 과학으로 기술할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와는 관계없이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빅뱅이라는 말 자체는 현재 과학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138억년의 그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 출발점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빅뱅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죠.

빅뱅의 시점자체가 과학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표준우주론이 틀렸다고 하는 것은 우주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과학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증거들과 이론들이 종합적으로 들어맞아야 정설로 자리잡는 것이죠. 표준우주론은 이미 90년대에 정설로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정설로 자리잡았다는 것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주론이라는 학문이 다 끝나버렸겠지요.

이 글의 주장은 외계인이 이미 지구를 방문하여 미국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행정부를 장악했고 이를 철저히 숨기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과 비슷합니다. 음모론은 보통 그럴듯한 내용들을 편리하게 편집하고 왜곡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의 주장을 지지하는 시나리오 혹은 근거로 만들어 냅니다.

4. 정말, 빅뱅이 허구라는 증거가 이렇게 강력하다면 왜 과학자들은 이런 내용으로 논문을 쓰고 빅뱅우주론을 무너뜨리지 않는 걸까요? 과학자들끼리 서로 담합해서 자기들만 아는 이런 반증들을 숨기고 쉬쉬하고 있다는 거지요? 거의 외계인음모론 수준이지요.

이런 태도가 바로 창조과학회가 가진 매우 위험한 이원론적 태도입니다. 도대체 과학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의 영역에서 밝혀내는 수많은 과학지식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드러내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진화론이냐 아니냐는 틀로 이분법적으로 보고 죄다 진화론으로 묶어서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과학적 증거를 내밀어도 진화론이기 때문에 틀렸다는 한마디로 전세계의 훌륭한 과학자들과 그들의 업적을 쓰레기통에 쳐박는 것입니다.

5. 이런 주장을 하려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논문을 내고 정말 빅뱅우주론이 틀렸는지 밝히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과학도 잘 모르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그것도 과학때문에 힘들어하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프로파간다를 퍼트리는 것일까요? 물론 그 이유가 뻔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미 이런 글이 허구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창조과학이 욕을 먹는 이유가 바로 전문가들과 논쟁할 전문성도 없으면서 대중들을 대상으로 이런 프로파간다를 퍼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과학자들은 거들떠도 안보고 과학에 임하겠지만 대중과학적으로는 참 문제입니다. 이런 창조과학의 활동이야 말로 대중과학의 적이죠.

6. 이 글도 정확하게 전문성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빅뱅우주론이 문제라면 과학자들의 논문들을 인용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정도일텐데, 방송에서 방송작가가 급팽창이론이라는 말 대신 빅뱅이론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식으로 오버해서 표현한 것,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따온 표현 이런 2차적 자료를 가지고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전형적인 창조과학식 주장의 스타일입니다.

7. 저는 이런 글들이 참 걱정입니다. 과학적으로 탄탄한 수많은 과학기사나 내용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젊은지구교인들이 과학을 왜곡하는 내용들은 퍼다 나르고 인용하는 태도들도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아마도 이런 왜곡된 내용을 만드는 사람들은 신앙의 열심으로 할 것입니다. 진화론에 물든 과학세계와 그에 헌신한 과학자들을 불신하고 그들이 숨기고 가리고 있는 진실을 찾아 바르게 알리고 퍼트려 기독교신앙을 지키겠다는 열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접근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청년들이 신앙이 흔들려 기독교를 떠나는 이유는 소위 진화론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자꾸 이런 말도 안되는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과학이 틀렸고 지구가 젊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인 것이죠. 즉, 이런 글로 인해 오히려 과학과 신앙이 서로 모순된다고 느끼고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 책임입니까? 진화론의 책임이라구요. 아닙니다. 젊은지구교 때문입니다.

8. 답답한 노릇입니다. 왜곡된 정보로부터 크리스천들을 건전하게 지켜주는 일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왜곡된 정보는 제발 좀 사라져야 합니다. 제가 창조과학회, 특히 젊은지구교인들을 그저 순수히 볼 수 만은 없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프로파간다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 바랍니다. 이런 글들은 제발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사실관계와 내용을 확인하고 글을 올리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한 것이 아니라구요? 젊은지구교인이 한 것이라면 창조과학회의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가 건전하게 바뀌기를 저는 간절히 빕니다. 저한테 창조과학회를 비판한다고 뭐라하기보다, 제발 과학의 전문성을 개뿔 취급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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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장 묵상 – 나는 빌레몬 일까 오네시모 일까? https://www.fingerofthomas.org/%eb%b9%8c%eb%a0%88%eb%aa%ac%ec%84%9c-1%ec%9e%a5-%eb%ac%b5%ec%83%81-%eb%b9%8c%eb%a0%88%eb%aa%ac-%ec%98%a4%eb%84%a4%ec%8b%9c%eb%aa%a8-%ec%9a%a9%ec%84%9c/?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25eb%25b9%258c%25eb%25a0%2588%25eb%25aa%25ac%25ec%2584%259c-1%25ec%259e%25a5-%25eb%25ac%25b5%25ec%2583%2581-%25eb%25b9%258c%25eb%25a0%2588%25eb%25aa%25ac-%25ec%2598%25a4%25eb%2584%25a4%25ec%258b%259c%25eb%25aa%25a8-%25ec%259a%25a9%25ec%2584%259c Thu, 19 Sep 2019 11:14:31 +0000 http://fingerofthomas.org/?p=12517 The post 빌레몬서 1장 묵상 – 나는 빌레몬 일까 오네시모 일까? appeared first on Fingerofthoma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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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은 성경을 묵상하며 성경이 소개하는 인물에 나를 적용시키고 그것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내 행동을 고치려고 합니다. 빌레몬서를 읽으며 나는 이 서신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인지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빌레몬서는 아마 신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서신 일 것입니다. 유다서와 함께 1장 밖에 되지 않는 유이한 책이고 그만큼 내용이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하지만 빌레몬서는 굉장히 은혜롭고 의미있는 서신입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그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심지어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지금은 그런 의미가 많이 퇴색 되었지만 1세기만해도 종과 주인의 위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인권이란 개념도 없었던 그 시대에 종은 말 그대로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종이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을 갔다는 것은 당시 세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던 악행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간청을 가장한 반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는 빌레몬서가 단순히 나를 배신하거나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어떤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은 나를 빌레몬에 투영하여 나에게 손해를 끼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묵상을 마칩니다. 물론 빌레몬서는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빌레몬서를 묵상하는 사람은 나를 빌레몬에 투영하기 전에 그 보다 더 한걸음을 나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빌레몬이 아니라 오네시모라는 생각입니다.

오네시모인 나

나는 주인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자 했으며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왕으로 군림하고 싶어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죄인으로써 나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간 죄인인 오네시모… 나와 오네시모는 많은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나는 1차적으로 이 책에서 용서를 해야하는 빌레몬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오네시모 입니다.

빌레몬서 -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오네시모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도 바울과 그의 믿음의 아들 오네시모

오네시모는 어떻게 용서를 받게 됩니까?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를 따르게 되었고 바울이 그를 옥중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 이라고 칭할 정도로 신뢰받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감옥에 가서 모든 처벌을 받으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중재자가 되어 오네시모가 용서 받을수 있도록 한것처럼 예수님도 중재자가 되어 원수였던 하나님과 내 사이를 이었고 용서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빌레몬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빌레몬과 오네시모 그리고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단순히 용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종이 아닌 형제로써 그를 인정하라고 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배반자이자 반역자인 우리를 형제요 친구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자기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나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 <요한복음 15:15>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이며 친구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빌레몬인 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빌레몬 역시 바울에게 빚을 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마태복음 6:12>

그리고 이 근거는 용서받을 자격없지만 용서를 받은 내가 다른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근거가 됩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쳤던 누군가를, 나를 기분 나쁘게 했던 누군가를 나는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아 형벌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자기 형제에게 그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33>

저는 이 구절에서 “마음으로부터”라는 표현에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명령하거나 억지로 용서를 강요하지 않고 자원하기를 바랬던 것처럼 하나님도 체면 때문에 용서하는 척을 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솔직히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냥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더 큰 용서를 받았음을 이해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했을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에게 진 빚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진 빚을 마음에 품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네시모 였었던 빌레몬

글을 마칩니다.

나는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 같은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큰 죄를 지었지만 감옥에 갇힌 누군가를 통해 거듭나게 되엇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며 나에게 큰 화가 나있을 주인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어떻게 오네시모는 이렇게 담대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중재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진노하실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만든 전능한 창조주가 특히 나를 이 세상에서도 죽일 권리가 있고 지옥에 넣을 권리가 있는 분이 나의 원수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조폭이 나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중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안에서 그 사랑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오네시모가 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이름의 의미는 “쓸모 있는” 입니다.

그리고 한때 오네시모 같았던 즉 죄인이었다가 커다란 용서를 받았음을 이해하게 된 빌레몬은 그 용서에 힘입어 자신도 용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역시 용서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될 때 빌레몬이 될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이름의 의미는 “사랑이 넘치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도 바울이 인내심을 갖고 빌레몬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시키지 않음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으시는 온유하신 하나님의 성품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며 우리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하게 만드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힘으로 문을 열지 않으십니다. 강제로 분명히 할 수 있지만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그 분은 겸손하시며 온유하십니다. 우리가 문을 열 때 까지 얼마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것 같은 사람, 분노, 증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진심으로 그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제로 용서를 명령하시지 않으며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이 생길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조급해 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죄인된 사람인지를,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떤 빚을 졌는지 깊게 묵상하십시오. 이 세상에 나에게 그 보다 더 큰 빚을 진 사람은 없습니다. 100억원의 빚을 졌다 탕감받은 사람은 10만원 빚을 진 사람을 쉽게 용서하고 그 빚을 탕감해 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하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간청하고 명령하실수 있는 근거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강력한 요청은 내가 그만큼 확실하게 용서 받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의 핵심은 ‘내가 용서를 해줘야한다’가 아니라 ‘내가 용서를 받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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