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리고 그 기도 제목이 세상적인 죄나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니고 정말로 기본적이고 꼭 필요했던 것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제 주위에 자신의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해서 그로 인해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됩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했던 제 친구는 결국은 하나님이 이런 기도 하나 들어주지 못하냐며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외에도 가장 친한 친구를 사고로 잃고 하나님을 떠난 친구, 여러가지 삶의 고통과 실패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91년 실제 있었던 어린 아이 유괴 사건을 다른 영화인데, 그 영화에서 아이의 생존을 위해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하던 아이의 엄마가 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경책을 찢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그 장면을 공감하고 또 내면적으로 질문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누구를 감정적으로 따뜻하게 위로하거나 안아주는 은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어쩌면 아픈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공감해주기엔 부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고통과 실패가운데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났다면, 또 살아가며 그런 위기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 아픔 너머에 더 커다란 진리의 그림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이해함으로 이성적으로 우리가 삶의 위기의 순간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씁니다.
왜 나에게 가슴 아픈 일들이 생기는가?
물론 하나님은 고통과 죽음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 세상은 저주를 받았으며 우리에게는 고통과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저주의 결과가 누가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픈 일이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엄마가 자기 자식을 잡아 먹어야 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또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분께서 네게 명령하신 그분의 명령과 법규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며 너를 따라잡아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네 원수들이 너를 괴롭게 하려고 너를 에워싸며 곤경에 빠뜨릴 때에 네가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네 몸의 열매 곧 네 아들딸들의 살을 먹으리라. <신명기 28:45 & 53>
그리고 성경에서도 역사내에서도 그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인간의 죄로 인함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만드신게 아닙니다. 나에게 슬픔이 발생한 것은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슬픔이 가득하도록 만드신게 아닙니다.
이 세상이 슬픈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사람을 납치하면 안된다는 그리고 살인을 하면 안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면 아이들이 유괴되고 죽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만약 부자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고 형제들을 돌봐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거나 가난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 입니다.
이혼은 왜 일어날까요? 수십년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환경속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같이 사는 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을 잘 배울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남편이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 역시 주님을 모시듯이 남편을 섬겼다면 이 세상에 이혼하는 가정은 없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혼하는 부부가 많은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속의 아픔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명령을 지키지 않는 우리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이 넘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하나님이 악하다는 주장은 진리가 아니며 합리적인 생각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더 크게 임하는 환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저주받은 세상에 대해 무엇을 약속하셨나요? 이런 저주를 거두어가 주시겠다고 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런 고통이 더욱 심해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더 클 것이라는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마태복음 24:2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디모데후서 3:1>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포로로 끌고 가는 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칼로 죽임을 당하리니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13:9~10>
즉 하나님은 이 고통과 환란을 제거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 목숨을 내줘야 할 정도로 커다란 고통이 임할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환란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고통을 제거해 주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이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며 떠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세상적인 소망과 소원은 부모에게 돈을 달라며, 그러지 않으면 엄마 아빠도 아니라고 떼쓰는 자녀와도 같습니다. 그 요구가 세상적으로 봤을때 정당하더라도 말입니다.
정당한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중간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내 형제에게 말씀하셔서 상속 재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는 굉장히 정당한 요구였습니다. 부모님이 죽게되면 율법에 따라 장자가 두 몫을 챙기고 나머지 상속 재산을 분배해야 하는데, 이 사람의 형제가 전체를 다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당연히 억울했을 것이고 법적으로 소송을 했다면 당연히 승소했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요구에 예수님은 “그래 네가 많이 억울했겠구나?” 라며 위로하시거나 “그래 내가 너희 형제에게 재산을 나누도록 하겠다!”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누가 나를 너희 재판관이나 나누는 자로 삼았냐며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15>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 즉 영생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유산을 정당하게 분배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설교하고 계셨습니까? 영생에 대해 설교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지옥에 넣을 권능이 있으신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이르노니, 몸을 죽이고 그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너희가 두려워할 분을 내가 미리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곧 죽인 뒤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능이 있으신 그분을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분을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2:4~5>
우리가 살아가며 고통속에 하는 수많은 간절한 기도들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하는 기도이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가장 소중한 것은 영생
성경은 온 인류를 구원할 한분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으며 그 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십자가 공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부자되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내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수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소원성취하고 내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단 하나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영생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바라는대로 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이런 하나님은 안믿겠다고 떠납니까?
우리가 원래 갔어야 하는 지옥이란 곳은 어떤 곳입니까?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도 없이 저주 받아 고통받는 곳이며, 마치 매일 부모님이 이혼하는 고통과, 매일 내 자식이 죽는 고통과, 한 순간도 산소가 없어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이 영원한 곳 입니다. 그런데 잠깐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기도가 응답이 안되었다고 하나님을 버리고 영원한 고통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국 사단이 원하는 어리석은 모습 아닐까요?
여러분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게 영생인가요?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에서 유괴된 자식이 죽었음을 알고 성경책을 찢는 장면… 또 최근 인양된 세월호를 떠올리면 그 어린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최근 세월호에서 자식을 잃은 한 기독교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이 분은 세월호로 자녀를 잃은 이후 신앙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을 더 많이 원망하게 된다고 고백하십니다. 충분히 이해되고 저도 제 자식을 잃으면 정말 미치도록 슬플것 같습니다. 솔직히 상상만해도 소름끼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복음을 따라 자녀를 양육하고 그 자녀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지금 그 자녀는 어떠한 슬픔도 고통도 없는 천국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원망해야하는 사건이 아닌,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았어야 할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히 슬픔도 고통도 없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생의 천국에 소망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주위에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친구를 사고로 잃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난 사례도 있습니다. 이 친구가 하나님을 욕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지금이라도 주위에 복음을 모르고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하고 지옥에 가게될지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더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면 어땟을지 생각해봅니다.
왜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며 주위의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는 어떤 않좋은 일이 있으면 모든 원망을 하나님께 할까요?
저는 그 이유가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다고 약속하신 영생을 우리가 실제로 여기지 않거나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찾고 이용해서 결국은 세상에서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고싶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나의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 고통스러워 지는 것 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장 말미에는 믿음을 가진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소개되어있는데, 33절부터 보시면 정복하기도 하고 의를 이루기도 하고 약속하신 것들을 얻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11장 35절 하반절부터 보시면,
‘또 어떤 이들은…’ 이라는 반전을 암시하는 문구와 함께 믿음으로 세상이 제시한 구원을 거절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이 세상에서의 구원을 거절한 이유를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 11:35>
안티오쿠스가 유다를 점령하고 성전에 돼지피를 뿌리는 등 성전을 모독하던 시대에 남겨진 외경에는 어느 어머니가 자기의 7명의 아들들과 체포가 되어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중 하나가 왕에게 율법을 어기느니 죽겠다고 하자, 왕은 솥을 불에 달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죽을 각오가 되었다고 말했던 그 아들의 혀를 자르고 머리 가죽을 벗기고 손발을 자릅니다. 그리고 아직 숨이 겨우 붙어 있던 그를 솥에 집어 넣습니다.
그 후 이 왕은 그 어머니의 남겨진 아들들을 하나 하나 같은 방식으로 죽이는데, 그 중 넷째는 이렇게 얘기하며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마카비하 7:14>
그리고 이 아들의 죽음을 하나 하나 지켜보던 이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뱃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마카비하 7:22~23>
이글을 읽고계시는 분들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영생은 우리에게 실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만큼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그 어떤 환란과 고난과도 바꾸지 않을만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위치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 만물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주인이 소유물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아니면 소유물이 주인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집이나 자동차나 스마트 폰이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집이나 자동차 스마트 폰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설령 아무 이유없이 지옥에 보내셔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아무 이유없이 고통속에 빠뜨려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치셨어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도 행한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소유인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며,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달리는 차를 멈추고 싶어서 브레이크를 밟아도 속도가 줄지 않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아들을 보내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고통속에서 살아야 했는데,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영원한 행복속에서 살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간절히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간절히 하나님께서 내 자녀에게 내 친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셔서 그들이 복음을 믿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야 합니다.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네가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호세아 4:6>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