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역시도 마찬가지 였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뜻일까 궁금해하며 넘어가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사실 성경을 읽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며 이를 잘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오랜 시간 성경 공부를 하고 성경 전체 내용을 이해하고 좋은 설교를 들으며 읽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제가 그런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정말 평생 공부해오신 사역자들과 평신도 혹은 초신자 사이에서 양쪽을 다 이해하는 중간 계단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성경에 대한 초보적인 해설 혹은 묵상 나눔을 하고 싶었고, 신약 통독 중 로마서를 읽으며 강하게 생기는 열정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이 글들이 올바른 복음을 설명하면서도 초신자 분들이 성경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에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서라는 이름이 말하듯이 당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로 사역자가 없이 자생적으로 커 나가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정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기회가 없어서 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직접 교리를 가르치고 편지로 교리를 써야할 이유가 없었다면 우리는 위대한 서신인 로마서를 통해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그 정도로 놀라운 책이며 아마 대다수의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로마서는 바울의 소개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는데 <로마서 1:1>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다고 말합니다.
종이란 무엇일까요?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로마서의 첫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과 동시에 죄를 지어 사탄에게 팔려 갔다가 예수님의 핏값으로 다시 구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누구의 것이죠?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영적 전쟁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탄교 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사람을 죽이고 피를 마시거나 괴성을 지르는 것이 생각나십니까? 사실 사탄교는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탄교의 제 1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이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라!”
이는 무신론이나 불교 같은 다른 종교가 말하는 것과도 일치합니다. 법륜 스님은 설법을 하실때 우리의 삶의 주인이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저에 깔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반대로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으며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여야 함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15>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의 의지가 아니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되고 기독교인이 된 것을 부르심을 받고 구분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잘 압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안수했던 아나니아에게 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니라. <사도행전 9:15>
누가 부르셨고 누가 구분하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불러줬기 때문에 찾을수 있었고 누군가가 구분해 두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분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그분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성경 기록들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로마서 1:2>
복음은 복음서에만 있는게 아니고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는 신약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성경 기록은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모세 5경에서 시작해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모두는 “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첫 번째는 대언자를 통해서 기록된 성경은 우리 신앙의 절대적인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구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을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신약을 읽을때는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으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혹은 하면 안되는지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율법적인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혹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다다를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얘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로마서 1:3~4>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데 그는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는게 마땅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되면 즉 성경을 읽고 이해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더 자세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처음 태어난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는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시력을 얻고 흑백으로 보다가 완전한 시력을 얻게 되듯이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복음을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구약에서 대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처럼 다윗의 씨로 오셨고 또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게 하였나니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1:5~6>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얻고 우리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 우리에게는 각자 크리스천으로써 주어진 역할이 있고 맡겨진 직분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써 누군가는 목사로써 누군가는 찬양팀으로써 누군가는 교사로써 주어진 임무를 종으로써 잘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두는 내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사람들을 믿음에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7>
이 편지는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을 얻은자들 즉 성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모든 서신에 하나님으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빌었는데, 은혜와 평강은 무엇일까요?
은혜는 말그대로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진 무언가입니다. 연약하고 죄로 물든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그래서 흠없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았어야 하는 사람들 중 하나님께서 구분하시고 불러주신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평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다툼이나 위기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라는 이유로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는 상태가 평강입니다. 우리는 은혜없이는 진정한 평강에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항상 은혜와 평강을 빌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완전한 사랑 가운데 모든 두려움이 떠나간 상태가 평강입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요한 1서 4:18~19>
성도는 이 평강을 소유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이는 돈이 많아서 생기는 안심과 다른 것입니다. 이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평강과 다른 것입니다. 성도는 그 평강을 얻을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그 평강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폭풍 속에서도 예수님과 한 배에 같이 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는 평강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사모해야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느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