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하신 많은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있습니다.
여리고 성으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못본체 하고 지나갔지만 유대인들이 개 취급도 안하던 선한 사마리아인 만이 강도 만난자를 도와준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은 이 비유를 읽고 나도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겠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 단체나 구호 단체의 이름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우리의 일반적인 해석과 정 반대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전하고 싶으셨던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
성경을 포함한 많은 글들은 문맥을 통해 그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역시 그 전 구절들을 통해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겠습니까?’라고 묻기 전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셨을까요?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 그들에게 병 고치는 권세와 마귀 쫓는 권세를 주고 각 도시와 지역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고는 기쁘게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의 사역 결과를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기뻐하며 기도하십니다.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 영 안에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음을 감사하나이다.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 보시기에 좋았나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사오니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1~22>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찾을수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뻐하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도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자들이 들을수 있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자들이 볼 수 있다는 구원의 원리를 나타내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만을 통한 구원 얘기를 들은 한 율법사가 발끈해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합니다.
율법 vs 은혜
율법사는 자신의 평생을 율법을 연구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 온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선택하셨으며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시자 이 율법사는 예수님이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합니다.
보라,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그분을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매 <누가복음 10:25>
그러자 예수님도 율법사에게 율법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되묻습니다. 그리고 이는 율법사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그는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매 <누가복음 10:27>
예수님은 그 율법사를 칭찬하시며 그렇게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신이 영생을 얻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확인받고 많은 사람 앞에 나타내 보이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르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니 <누가복음 10:29>
이제 율법사는 자기가 그 동안 사랑해 온 이웃들, 금식하며 남은 돈으로 구제한 것들 매일같이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옳은 일을 할 때 칭찬하며 불의를 행한 것을 기뻐하지 않았던 자기의 과거 행적들만 확인 받으면 자신이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확인 받을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이웃이 누구인지만 알려주시면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서 물어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외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여리고 성으로 가다가 강도 만난자의 비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고 그들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의 죽은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버려집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 출몰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여리고에는 제사장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은 말에서 내리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강도들이 여자나 어린 아이들을 아픈 사람처럼 쓰러져 있는척 하게 해 놓고, 누군가가 그들을 도우러 멈춰서면 그 때 이들을 덮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전후사정도 모르고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 길에서 그러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레위기에 나와 있는대로 죽은 사람을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므로 혹시라도 그 사람이 죽었을까봐 더더욱 조심했어야 합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아무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죽은 자로 인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 것이로되 <레위기 21:1>
그런 이유들로 이들은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그냥 지나칩니다.
이들은 죽게 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냉혈인이나 잔혹한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을 위험에서 보호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을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게 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 출신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정책에 따라 혼혈이 많았기 때문에 이방인인 개처럼 취급했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자신들을 무시하고 유대교인으로써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미워합니다.
만약 강도 맞은 사람이 자신을 구하려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며 도움을 거절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의 죽게된 이 사람은 누가 자신을 도와주는지 심지어 자신이 도움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소독하고 상처를 싸매줍니다. 또 자신이 타고 오던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간 후 돌봐주고 여관 주인에게 그를 돌봐주라고 부탁하며 그 비용까지 대신 지불합니다. 그리고 비용이 부족하면 자신이 다시 돌아와서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vs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치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라고 질문합니다.
율법사가 처음에 무엇을 질문했죠?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사를 사마리아인이 아닌 강도만난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율법의 가르침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사에게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도와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강도 만나 거의 죽게된 자 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린 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냐? 하니 <요한복음 8:48>
당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랍비로써 인정받기도 했지만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비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예표하는 예수님이라는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방인 혹은 이방인이 믿는 우상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거의 죽게된 너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즉 율법이 아니라 너희가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나야!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율법처럼 우리를 정죄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자를 불쌍히 여겼듯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사마리아인이 상처를 소독하고 싸매 주듯이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해 주시는 분이시며, 특히 사마리아 사람이 여관 주인에게 치료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다 지불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죽인 죄에 대한 비용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여관 주인에게 우리를 맡기고 영영 떠나버리는 분이 아니라 재림하셔서 다시 돌아오시고 우리를 영접하는 분이십니다.
이 비유에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사가 강도 즉 마귀를 만나 빼앗긴 것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너희들은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율법 지켜서 구원얻으려고 하지마! 나를 믿어! 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분노하사 그분의 진노가 조금이라도 타오를 때에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로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2>
여리고로가는 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자를 무시하고 지나간 것은 율법으로는 영생을 빼앗긴 즉 하나님을 빼앗긴 한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를 지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을수 없습니다.
하지만 율법주의가 무시하고 개취급하는 은혜, 싸구려 복음이라고 무시당하는 은혜, 그 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즉 율법으로 가득한 어떤 곳에 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이 길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의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더럽다고 사마리아 땅도 않밟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이 길에서 발견되면 강도를 만나지 않아도 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한 사람이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한 사람을 구해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이 바로 율법사이며 나 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6:23>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음의 메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