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채찍으로 맞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태 복음에선 십자가에 올라 가실 때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기록했는데, 요한 복음에선 시몬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직접 십자가를 지고 올라 가셨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그들이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에게 억지로 그분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골고다 즉 해골의 장소라 하는 곳에 이르렀더라. <마태복음 27:32~33>
그분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장소라 하는 곳으로 나가셨는데 이곳은 히브리어로 골고다라 하더라. <요한 복음 19:17>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는 해결 될 수 없는 모순일까요?
오늘날을 기준으로 해석할 수 없는 고대 전기(Ancient Biography)
이미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이 백부장인지에 대한 글에서 한번 설명을 한적이 있는데, 성경을 굳이 인간의 문학 장르로 구분을 하자면 그레꼬로만 스타일의 고대 전기(Ancient Biography) 입니다. 그리고 고대 전기와 현대 전기(Modern Biography)가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는 분명히 다릅니다.
조선 시대에서 일반 백성이나 벼슬아치들이 만들거나 쓴 발명품이나 글을 당시 왕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서에 혁신적인 농기구를 조선의 왕이 만들었다! 라고 하는 것은 조선의 왕이 그 기구를 만드는데 전혀 관여를 안했다고 하더라도 오류가 아니라 당시의 기록 관행인 것 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AD 52년에 로마는 폼페이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 했는데, 그는 특별한 법을 하나 세웁니다. 그것은 당시에 법정에서 피고인에게는 “엔코미엄” 이라는 찬사의 발언을 할 수 없게 한 것 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이 만든 법을 어기기 시작 합니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프랑쿠스를 위해서 자신의 대변인을 보내서 찬사의 발언을 대신 읽게 한 것 입니다. 프루타르코스가 쓴 인물전인 Life of Cato the Younger에서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하는데, 프루타르코스는 실제로는 폼페이우스가 아닌 대변인을 보냈음에도 자신의 책에 길고 불필요한 설명을 삭제하고 폼페이우스가 법정에 가서 찬사의 발언을 한 것처럼 기록 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분명히 폼페이우스가 대변인을 보낸 것을 알면서도 이 기록을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대변인이 엔코미엄을 읽은 것이 폼페이우스의 의지였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넘어와 보죠.
구레네 사람 시몬이 로마 군병들이 시켜서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시몬이 져야할 십자가 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져야할 십자가 입니까?
예수님이 져야할 십자가 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고대 전기를 기록한 사람의 기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것 입니다.
오늘날에도 위임장을 받은 대리인이 계약 서류에 서명한 것이 위임을 해준 사람이 직접 서명한 것과 같은 법률적 효력을 지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간 시몬의 행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라 시대의 기록 관행과 다른 장르의 문학이기에 생기는 다름 입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진 시몬을 통해 전달되는 복음
자! 장르 얘기가 나왔으니, 복음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주 독특한 장르의 책 이기 때문 입니다. 이런 에피소드들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원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마태복음 10:38~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며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위해 사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자는 그것을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구원과 선한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것은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는 것 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것을 원래 내 것이었던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삶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내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훔쳐온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었던 나의 삶을 다시 되돌려 드리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소유인 내 삶을 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삶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절에서 “억지로”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에게 억지로 그분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마태복음 27:32>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절대로 놓지 못하는 태초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에게 반드시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수도 없고 우리의 목숨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두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풍파를 통해서, 사탄의 시험을 통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나 자신을 부인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꼭 거창하게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를 하고, 내 전 재산을 팔아 고아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남편과 아내와 다투면서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나만 생각했던 내가 나의 죄인됨을 보고 배우자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 직장 상사와 다투고 억울하게 실적을 빼앗겼지만, 그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감사하는것 즉 죄로 가득찬 내가 그 모습대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나를 죽이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 입니다.
그리고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한 그 것이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며, 예수님과 함께 그 십자가를 질때,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십자가가 아주 쉽고 가벼운 것이 되는 것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