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행전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이때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합니다. 많은 분들은 사도들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완전히 틀린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것이 완벽한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사망에 대한 승리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맞습니다. 저는 그 부활의 사건을 폄하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말도 안되는 사건을 두눈으로 직접 경험하고도 여전히 넘어지고 세상을 두려워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임을 상기시켜 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노라
예수님과 함께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던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잡히자 모두 도망가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세번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져 예수님의 시체조차도 찾아올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이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고 돌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냅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주의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제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못박힌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비로소 알아봅니다. 이 때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지만 예수님을 보고나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후 이들이 담대하게 부활을 증거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예수님을 전했을까요?
요한복음 21장은 제자들이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음을 기록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더라.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그에게, 우리도 함께 가노라, 하고 그들이 나가서 즉시 배에 올랐으나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라. <요한복음 21:2~3>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두번이나 보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보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난 3년간의 예수님과의 생활을 까맣게 잊은 채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이며, 인간의 불가능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도 하나님께 불평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지내며 많은 표적과 행하심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마저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 보다는 풀이죽고 자신의 초라함을 보고 무엇을 해야할지도 깨닫지 못한체 그들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모습이고, 이것이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제자들을 담대하게 변화시켰을까?
저는 무엇이 제자들을 담대하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질문에 한가지만의 원인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복합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지혜에 의한 것이며 딱 하나의 원인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도 그들을 담대하게 만든 요인중의 하나일 것이고, 지난 3년간 보았던 예수님의 표적과 능력 역시 이들을 담대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묵상하게 되는 가장 큰 세가지 요인은, 말씀과 사명 제시 그리고 성령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을 보고도 눈이 가려져서 알아볼수도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는 성경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자, 가슴이 뜨거웠음을 고백합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는 <누가복음 24:32>
또 제자들에게도 지각을 여셔서 성경 기록을 깨닫게 해주시며 부활을 설명하시고, 제자들에게 뚜렷한 사명 즉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함을 제시해 주십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 <누가복음 24:44~4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마태복음 28:19~20>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충만하게 되고 나서부터 담대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며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전도의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전도를 하는 것도,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심지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글의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저는 제자들의 담대함이 단지 부활을 목격함에서 생겨난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 주장이 부활 자체의 의미를 격하시킬 의도는 없음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실제로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며 사망을 이기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셨음은 내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요지는, 인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지각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함에 의해서 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열심이었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였습니다.
인간이 부활을 목격했기에 인간적인 용기가 생겨서 하나님을 전할 수 있게 된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의 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사도들을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의 모든 구속의 원리는 모순이 되어버리며 우리는 아무런 소망없이 우리를 옭아맬 사망을 기다리며 사는 처참한 존재였을것 입니다. 하지만 그 부활의 의미와 중요성을 진정 이해하지 못했다면 사도들은 죽을때까지 고기나 잡으면서 살았을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고,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제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저의 눈을 여시고 지각을 열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을으며 하나님 믿는 자들을 욕하고 조롱하며 비웃으며 살았을 것 입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하게 된 것도, 제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깨닫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게 된 것도, 역사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 영생에 이르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결코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하며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