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후에 그분께서 자기 어머니와 자기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시니라. 그들이 거기에 여러 날 있지는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이 오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사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가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기록된바,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네가 이런 일들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느냐?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내가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네가 그것을 사흘 안에 세우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셨더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뒤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셨음을 기억하고 성경 기록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 복음 2:12~22>
많은 신학자들이 오늘의 사건을 성전 정화 혹은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정화나 청결은 깨끗이 해서 다시 쓰겠다는 의도를 포함하는 단어인데, 사실 하나님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성전은 완전히 파괴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장면은 성전 파괴 사건으로 불리는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은 가나의 혼인 잔치 표적 바로 뒤에 붙어 있는 장면 입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완성하시는가에 대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성경은 혼인 잔치 이전인 1장 끝에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린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땅은 인간의 간사한 꾀나 지혜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그곳에 범접할 수 없었던 자들을 불러 올리시는가를 첫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사건을 필두로 설명하시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전 파괴 사건 역시 1장에서 쓰여진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한 설명 즉 복음에 대한 내용인 것 입니다.
잠시 성전 파괴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 요한 복음에는 이 사건이 서두에 등장하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주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이 장사치들을 쫓아낸 사건이 두번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이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셨을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다르게 나타나 있는것 그리고 20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성전이 46년동안 지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사기 위해서 BC 20년경 부터 재건하게 시작한 것 입니다. 그래서 AD 63년 알비노스 총독 시대에 완공이 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7년 후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수님의 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이 대화가 있던 때는 AD 28~9 년경이 됩니다.(AD 0년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게 BC 6년 정도 되었으니까, 이 때는 예수님의 공생에 말기가 아니라 초기가 되는 것이죠.
그게 한번이던 두번이던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만큼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성전 파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 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형식 주의에 빠져 버린 유대교와 예수님의 은혜를 극명하게 대조 시키는 사건이라면, 오늘의 ‘성전’을 소란케한 사건도 일관성을 갖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표적의 책은 표적 -> 오해 -> 강해의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오늘 사건,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모두가 가나의 혼인 잔치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는 자들에게 친절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강해하는 구조로 쓰여진 것 입니다.
성전을 방문한 진짜 성전 예수 그리스도
그 관점에서 오늘 있었던 성전 파괴 사건을 봤으면 합니다.
유대인들은 니산월 지금으로 치면 3월 말, 4월 쯤에 일주일간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때, 어린 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발라서 죽음이 넘어가 버렸던 그 날을 기념하는 것 입니다. 이 어린양이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 입니다. 그 유월절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는 시내산에서 제사 제물로 계속해서 예표 되어 집니다.
그리고 그 제사 제물이 바쳐지는 곳이 성전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죄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교 행위, 제사, 제물, 율법의 준수가 그들의 죄를 속할 수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오해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위해 성전 파괴 사건이 등장하는 것 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시면, 유대인들의 유월절! 유월절 어린양으로 바쳐지는 제물! 그리고 그 제물이 바쳐지는 곳인 성전! 그리고 진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모든 것이 한번에 만나는 것이 이 성전 파괴의 사건 입니다. 쉬운 말로 모형 혹은 예표가 실체와 함께 만나서 모형이 파괴 되고, 실체로 대체되는 것이 이 이야기 인 것 입니다. 모형으로 그려졌던 어떤 것이 실체가 옴으로써 완성이 되어지는 사건이 이 성전 파괴 사건인 것 입니다.
당시 엄청난 돈이 되었던 성전 장사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3번 절기 때 마다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뿐 아니라 이방인 개종자, 또 아직 개종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원했던 사람들도 모여들었습니다.
요아킴-예레미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절기때 예루살렘에 모여든 장정들의 숫자만 13만명이라고 합니다. 여자와, 아이, 노인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였던 것 입니다.
유월절에는 13만명의 순례자들이 25만 마리의 양들을 잡아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잡혀 죽게 될 제물들이 성내로 들어오던 문이 양 문 입니다. 양문은 많이 익숙하실 겁니다. 뒤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가가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순례객들은 속전이라고 불리는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 성전세는 반 세겔인데, 당시 노동자들의 2일치 품삯정도 되는 것 입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전세계를 다스리던 시기 였기에 사람들은 로마나 헬라의 화폐를 사용했는데, 그 화폐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그 돈을 성전세로 안받고, 세겔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환전을 할 때에, 50%를 수수료로 떼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전을 주관하던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입니다.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이죠. 절기가 1년에 3번이라고 하지만 그 외에도 1년 내내 제사가 돌아가는 곳이 성전입니다.
또 그들이 성전에 들어오는 목적은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그 제사때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순례를 온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튼튼한 가축을 끌고 와도,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살이 빠지고 흠이 나서 불합격 판정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감란산 일대에 네 곳의 가축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축 시장 뿐 아니라 성전의 바깥, 이방인의 뜰에도 가축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축 시장을 주관하는 자들 역시 산헤드린 공의회였습니다. 그래서 제물을 심사할 때에, 자기들이 주관하는 가축 시장에서 안사온 것들은 불합격 판정을 내리는 것 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성전에서 가축을 샀는데, 이 과정에서도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는 것 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성전을 등장 시키며 역설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전을 이윤 추구의 장소로 만든 죄인들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함 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마주한 예수님
바로 그 현장에 참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신 겁니다. 그리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그들을 모두 내쫓아 내신 겁니다. 모형이 물러가고 실체가 들어서는 순간이죠.
산헤드린 공의회 관청이 바로 그 바깥 마당에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보고 금방 뛰쳐 나와서 예수님께 항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네가 이런 일들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느냐? 하매 <요한 복음 2:18>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 밖에 없는데,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을 보여봐라! 라고 따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며 등장할 것을 철썩같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그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18절에 그분께 응답하여 라는 헬라어 아페크리떼산(ἀπεκρίθησαν)은 어떤 요구나 항변을 강력히 드러내는 행위에 대한 표현 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대들었다, 혹은 따졌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정말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다면 그렇게 무례하게 대들고 따지지 못했을 것 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예수님도 그들에게 똑같이 응답(ἀπεκρίθη)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는 바리새인과 나의 행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나
자신의 이윤 추구를 위한 형식 뿐인 종교를 질책하시는 예수님과 그 지적을 못마땅히 여기며 그 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 지도자의 모습속에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가는 형식 뿐인 예배, 형식 뿐인 신앙생활과 그 것을 거두어 가려 할때 악악 거리며 하나님께 대들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소위 성도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으시고는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라고 외치십니다. 그런데 19절에 사용된 성전이란 단어의 나오스(ναὸν)는 14절에 쓰인 성전 히에론(ἱερῷ)과 다른 단어 입니다. 14절의 히에론은 성전 전체의 외형을 강조하는 단어인 반면, 19절의 나오스는 그 거룩한 성전 자체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 입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 21장에서 이 나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고, 고린도 전서 3장에서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건물로써의 성전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21절에 요한의 부연 설명처럼, 성전이신 자기 몸을 헐어라! 즉 파괴하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라고 할 때 쓰인 에게로(ἐγερῶ)는 다시 살리다! 라는 의미로 스스로 다시 살아날 것임을 말씀하신 것 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병든자를 고쳐주려고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인들에게 닫혀버린 하늘의 문을 여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흘만의 부활로 결론 지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매한 죄인들은 이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날 까지 죄인들의 조롱을 받으시는 것 입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고 그분께 욕하며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마가복음 15:29>
그 십자가의 자리가 죄인들에 의해 성전이신 주님이 헐리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그 주님을 조롱했던 것 입니다.
주님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만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유대교로 대표되는 죄인들의 행태 전체를 파괴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그 더럽고 형식적인 성전이 되셔서 파괴되고 죽으셔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