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바라시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 그리고 십자가 – 요한복음 11-2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이 오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사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가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기록된바,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네가 이런 일들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느냐?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내가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네가 그것을 사흘 안에 세우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셨더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뒤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셨음을 기억하고 성경 기록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 복음 2:13~22>
예수님은 유대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 쫓으며 소란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이는 형식적인 종교 뿐인 죄인들에 대한 경고와 책망 그리고 십자가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음을 얘기했습니다.
이를 예수님이 ‘무화과’를 저주하여 말리신 사건과 함께 놓고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 납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사건을 사이에 두고, 무화과 나무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이는 히브리 문학의 고전적인 샌드위치 기법입니다.
샌드위치 기법이라는 것은 중요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양 쪽에 빵을 대듯이 부연 설명을 넣는 문학 기법 입니다. 즉 성전 파괴의 앞뒤에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무화과 나무의 저주가 같은 내용을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 던 중 이파리가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발견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는 우리의 감자나 고구마 같은 부식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침 시장하셨기에 그 앞에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에는 이파리만 무성했지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말려 죽여버리 십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 무화과 열매를 찾으시는 예수님
재밋는 건 성경이 이때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유월절인 4월에 무화과 열매를 찾는 바보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앞으로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들을 상기 시키면서 은혜의 복음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겁니다.
내가 광야에서 포도를 만나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만났으며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처음 익은 열매를 보는 것 같이 너희 조상들을 보았으되 그들이 바알브올에게로 가서 자신을 분리하여 그 수치스런 것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가증한 일은 그들이 사랑한 그대로니라. <호세아 9:10>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했으며 무화과 나무에 맺힌 첫 열매를 보는 것 처럼 보셨다고 얘기합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서 말하면 이스라엘에게서 무화과 나무와 같은 열매를 기대하셨다는 것을 말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내 놓으라고 하는 선지자들을 족족 때려 죽였으며 결국엔 아들까지 때려 죽입니다.
최선을 다해 지킨 율법은 예수님이 바라시던 열매가 아니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켰고, 제사를 지냈고, 최선을 다해서 인간적인 선행을 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가리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시장해 하시면서 구하셨던 그 열매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종교 행위나 율법의 준수가 아니였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부르며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2>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 행위나 율법의 준수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배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 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 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치를 뜻하는 worth와 상태를 나타내는 ship의 합성어 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나의 가치를 챙기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만이 가치 이심을 고백하며 우리의 마음안에 하나님의 원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 하는 것 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앉아 있던 왕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만이 가치있는 분임을 인정하면서 사는 모든 삶을 worship 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열매로 요구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이 존귀하시고, 그분만이 우주의 중심이시며 그분만이 우주를 다스린다는 의식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를 그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맺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예배는 정해진 공간에서 잠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즉 예배는 우리가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공간에서 잠깐 드렸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야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공간의 거룩 혹은 시간의 거룩이라는 개념에 빠져서 특정한 장소 혹은 사람들과 있을때는 자신을 감춘채 쇼를 하지만 그의 삶을 모두 들여다 보면 엉망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예배의 삶은 우리가 내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인정하는 전체의 삶이 예배이며, 거룩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게 사랑으로 연결이 됩니다.
즉 하나가 되면 전체가 다 되야 함에도, 계명은 지키고 율법은 지키는 것 같은데, 사랑이 안되고 하나되지 않고, 거룩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가짜이고 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바로 이것을 부숴버리는 것 입니다.
“얘들아! 연극하지 말아라, 너희의 속이 바뀌지가 않았는데, 왜 너희들은 너희들의 이윤 추구만을 하고 있으면서 날 섬긴다고 거짓말 하느냐!! 이 날강도 들아!” 라는 예수님의 일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예수님이 파괴하시는 것은 이 성전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우리의 종교 행위 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만 파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모두의 종교와 강도의 소굴을 부수고 계십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몸이란 우리의 삶을 얘기하는 것 입니다. 살아 있는 희생물이 바로 예배 입니다. 즉 너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로마서 12장 1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그러나 유대인들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겉으로는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유익과 이윤을 위해서 했던 것 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돈 바꾸는자, 장사하는 자, 그것을 주관하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 대제사장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이 그들 만의 문제임을 폭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죄인들의 행태에 대한 대표적인 상징일 뿐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죄인들의 삶을 총칭해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로 비유하시는 것 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저주받아 죽어 마땅함을 무화과 나무를 죽이심으로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정말 무화과 나무가 되어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열매 없는 죄인들을 죽이는 대신 예수님 스스로가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되셔서 저주 받아 죽으신 것 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해서 죽여 버려야 하는데, 그들을 죽이지 않고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정작 죽어야 할 열매없는 나무들을 풍성한 열매 맺는 나무들로 만드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 입니다. 즉 그 죽은 나무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저주 받은 무화과가 되어 죽으심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가 마가복음 11:21절 부터 나옵니다.
베드로가 기억이 나서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라 버렸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에게 이르기를,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라, 하며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말하는 그것들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다 받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을 원하든지 너희가 그것들을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것들을 받으리라. <마가 복음 11:21~24>
열매를 구하시던 참 열매이신 시장하신 주님은 시장함을 갖고 죽으시고, 열매 없는 나무들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풍성하게 받게 되는 열매 맺는 자들이 된 것 입니다.
가난한 나를 부요하게 만드시고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
이 이야기는 마실물이 없어서 목말라 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퍼주시고 자신은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이 이렇게 정리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후서 8:9>
이 은혜의 복음이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놓여져 있던 율법과 그 아래에서 자행되던 죄를 바다로 던지신 것 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에게 이르기를,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라, 하며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말하는 그것들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다 받으리라. <마가 복음 11:23>
이 대화가 어디서 이루어 졌습니까? 이 대화에서 가리키는 “이 산”은 무엇이겠습니까?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시온산 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이 산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화가 나무가 되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다속으로 던져지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율법을 상징하는 시온산이 무엇이냐면, 성전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엎어 버리는 사건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 중간에 들어가 있는 것 입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 후에, 그 일이 바로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되셔서 저주 받아 죽으실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저주의 율법과 죄악들이 전부 바다에 빠지게 될 것임을 보 여 주시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죄인들을 가로막고 있던 산이 없어지고 죄인들이 의인들이 되어서 열린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음을 가리키게 된 것이 성전 파괴 사건인 것 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1장 29절에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라는 구절과 연결되는 것 입니다. 하늘이 어떻게 열리게 될 것인가를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성전 파괴 사건에서도 무화과 되시고 옛 성전이 되셔서 자기가 죽으심으로 그 하늘이 열리게 될 것이라는 답을 주고 계신 것이며 이게 복음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이 얘기하는 것이 결국 전체가 다 은혜 입니다. 복음은 결국 은혜이며 우리의 어떤 행위도 보태질 수 없음을 요한 복음이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