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뱀을 쳐다보는 믿음 그리고 순종 – 요한복음 강해 13-1강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 복음 3:14~17>
이 구절은 절에 다니는 스님도 암송하는 성경의 대표 구절, 요한 복음 3:16이 포함 된 말씀에 대한 강해 입니다. 오늘 본문의 15절까지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16절 부터는 요한이 이를 종합해서 설명하는 말씀 입니다. 예수님이 1장에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라는 대주제를 알려 주고는 2장 부터 표적의 책을 시작 합니다.
첫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형식 주의에 빠진 생명력 없는 유대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대조 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즉 은혜로만 이루어짐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 사건을 통해 입사귀만 무성한 인간의 행위를 나무라시며 예수님 자신이 옛 성전이 되어서 파괴되는 은혜의 복음을 다시 반복해 주십니다. 그리고 2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속을 아시기 때문에 겉만 번드르르 하게 믿는 척만 하는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설명을 넣은 뒤에 니고데모의 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사람이 복이라고 여기고 힘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그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과분하게 받은 사람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밤에 속한 자라고 소개 합니다. 요한은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 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 복음 3:11~12를 보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야 함을 니고데모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구절에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이외에는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 거듭남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은 놋뱀을 쳐다봐야 산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광야에서 놋뱀이 들려진 것 처럼 자신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민수기 21장의 이야기 입니다.
성이 호르 산에서 이동하여 홍해 길로 에돔 땅을 돌아가려 하였으나 그 길로 인해 백성의 혼이 심히 낙담하여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며 말하되, 어찌하여 당신들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거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혼이 이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 하매 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모세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와 당신을 대적하여 말함으로 죄를 지었사오니 주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제거하게 하소서, 하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를 위해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살더라. <민수기 21:4~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가는길에 에돔을 건너가려 했지만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땅을 건너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에돔을 돌아서 가야 했습니다. 그 길이 고단했기에 백성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 하며 모세에게 대들었는데, 이것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불뱀을 풀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탁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탁을 들으시고 방법을 알려 주시는데,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서 그 뱀을 쳐다보게 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하와를 꼬셔 죄를 짓게한 뱀, 나를 물어 나를 죽게한 뱀
이는 사실 황당한 처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놋뱀을 쳐다 본다고 뱀에 물려서 죽어 가던 사람들이 낫는다는 것을 믿을 사람도 없거니와, 이 사람들이 지금 죽어가는 이유는 뱀 때문인데, 그 뱀을 놋으로 만들어서 높이 달아서 그것을 보라고 하면 그 뱀을 순순히 쳐다 볼 수 있었을까요?
또 그들은 모세로 부터 창세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들을 죄로 이끈 뱀이라는 짐승을 좋아했을까요? 뱀은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놋으로 만든 놋뱀 이었는데, 놋은 그들에게 심판을 상징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놋뱀 장대를 보고 살아 나리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놋뱀을 본 사람들은 살아 났다고 기록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민수기에서 이야기한 저주의 놋뱀이 바로 자신이며, 저주의 나무에 달려서 높이 들리실 것임을 본인의 입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놋뱀으로 예표되었던 자이며 내가 들리고 나를 바라 보아야 한다! 그래야 거듭날 수 있다! 라고 거듭남의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니고데모는 이에 크게 당황했을 것 입니다. 그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던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 학문적인 존경을 받던 사람에게 “너는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어!” 라고 말씀 하신 후에, 그 거듭남은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처럼 나무에 들린 자신을 바라 보야아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 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한마디로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에 절망하고 오로지 눈을 들어 위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 구원이 주어질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구약에 능통했던 니고데모는 놋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금방 민수기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 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들리다” 라는 의미의 휩소우(ὕψωσεν) 라는 단어는 들어 올리다 교수형에 처하다 라는 뜻과 동시에 높아지다 영광속에 들어 올려지다라는 전혀 반대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저주의 장대 즉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방법이라는 것 입니다.
그 저주의 장대 위로 올려진 다는 것은 나의 세상적 의지와 이기가 부숴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선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따라 간 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것이 높이 들린 것이죠.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거구요.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신도 십자가로 들어 올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렇게 저주의 장대 위로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을 저를 믿는자, 영생을 얻은 가진자 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런 의미 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들 역시 각자의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지는 삶을 살게 되고, 성경은 그런 삶을 순종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3장 마지막 절에서 그 믿음을 순종과 같은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 복음 3:36>
믿음과 순종은 같은 단어 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영생이 있고 없고라는 결과절 앞에 원인절이 하나는 믿는자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치 아니하는 자 입니다. 즉 믿음과 순종을 같은 것으로 보고 얘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믿음은 항상 행위 즉 순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따로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삶의 변화가 없고 순종하지 않는 삶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순종이 무엇이죠? 십자가를 지는 것 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이죠? 내가 죽는 것 입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너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으니라. 그는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길로 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 1:22~25>
야고보 사도는 죄인들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돌아서자 마자 무엇을 봤는지 잊어 버린다고 합니다. 즉 죄인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서 바로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내 형제들아,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야고보서 2:14~22>
영생이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열심히 지는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3장 15절 에 있는 믿는다 라는 단어의 피스티온(πιστεύων)은 현재 분사형 입니다. 그 의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은 현재 분사형의 믿음 즉 계속해서 발휘 되어지는 믿음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거듭남 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계속해서 발휘 되어 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