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진화론자들이 사용하는 정의의 왜곡 그리고 논리적 모순 – 에끌의 오해 15
창조론 연대기 27화에서 수영이의 아버지는 창세기 1장이 시가 아닌 역사를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없다고 인정합니다.
아, 그러면 논쟁이 끝났네요? ^^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신 진화론자들을 포함한 오랜지구를 믿는 사람들은 역사의 의미 역시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이론을 맞게 보이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의의 왜곡
에끌의 오해 11편에서 저는 잘못된 이론을 맞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 어딘가에는 반드시 논리적 맹점이나 ‘정의의 왜곡’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창조론 연대기 27화는 그들의 논리적 맹점과 ‘정의의 왜곡’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드릴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창조론 연대기 뿐만이 아닙니다. 수년동안 하나님이 살아계신 객관적인 증거들과 그에 반하는 진화론이나 다른 세속 과학에 대해 공부하고 조사를 하며 알게된 가장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옳게 보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정의의 왜곡’과 논리적 모순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으며 어떤 세상 철학과 지식보다도 완벽합니다
그에 반해 성경은 어떤가요? 제가 성경을 읽고 변증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가장 놀라운 점은 오래전부터 여러 기자들에 의해 쓰여진 성경은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으며 어떠한 철학이나 세상 지식보다도 완벽하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 완벽한 성경이 조금 왜곡되면 우리 신앙 전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완벽히 풀은 수학 공식에 숫자나 기호를 바꾸면 그 답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듯이요.
이에 대해 여러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도덕적 논거가 이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글에서 유신진화론자 피터 엔즈의 주장처럼, 선악과를 먹은 죄인들의 선악 판단으로 가나안 땅의 살상을 명령한 하나님이 비윤리적이라는 주장은 겉으로 보기엔 맞는 얘기지만,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탕을 파고 들어가면 무지한 인간의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역시 많은 사람들이 주먹구구식의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법적이고 논리적인 구원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를 다 설명하려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에 이 두가지 설명에 대해서는 글 맨 아래에 링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자들은 어떤 ‘정의의 왜곡’들을 사용하고 있을까?
과학자들은 우주의 시작부터 ‘정의의 왜곡’을 통해서 설명을 합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우주가 무(無)에서 생겨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억지죠.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가 시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며 과학자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신뢰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무(無)란 무엇일까요?
그들이 얘기하는 무(無)는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고 입자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물질과 반물질이 동일하게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나에게 100억원 짜리 부동산이 있고, 은행에 빚이 100억원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공개할 재산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오류입니다. 누가 국세청에 이렇게 주장하면 금방 고소당할 것 입니다. 이는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Newscientist에서 제작한 영상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결국 우주가 어떻게 이렇게 클 수 있었는지에 관계없이, 에너지 총량과 물질의 총량의 합은 0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정리하면 우주는 정말 이상한 형태의 무(無)라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무(無)에서 유(有)가 나타날수 있었는지 묻는 질문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無)와 유(有)는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죠.1
황당하지 않나요? ^^;;; 저와 여러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반물질이 동수가 존재한다면 우리의 존재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는 무(無)라는게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무(無)의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물질은 어떻게 생겨났고 반물질은 어떻게 생겨난거죠? 이런 질문들에 과학자들은 답을 할수 없고 다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하기 때문에 착한 얼굴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 입니다. 2
정의의 왜곡 없이는 과학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정의의 왜곡’은 자유 의지 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질주의자들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과 의식은 뇌의 활동의 부산물인데 그 뇌를 자유롭게 움직여서 자유 의지를 발동시킬 무언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뇌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나의 뇌가 나에게 명령하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의 왜곡’을 사용합니다. 3
하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란 뇌가 나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로 나의 뇌를 조종하여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여부 입니다. 이를 왜곡하는 것은 다른 말로 그들에게 적절한 답이 없다는 뜻 입니다.
또 진화론자들 역시 ‘정의의 왜곡’을 사용해서 자신들 이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진화론이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확률적인 불가능 입니다. 다시 얘기해서 유전 정보 증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150개 길이의 아미노산 서열이 기능이 있는 단백질이 될 확률은 10-77 밖에 되지 않는데, 이는 돌연변이의 과정이 기존에 있던 단백질을 파괴할 확률이 발전시킬 확률보다 극도로 더 높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창조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유전 정보 증가는 눈이 생기고 날개가 생기고 뇌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종분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정의의 왜곡’을 하며 즉답을 피하고, 대중들에게 창조론자들의 질문에 답을 준다는 인상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은 세상에 어렵게 생긴 첫번째 생물이 어떻게 새로운 타입의 단백질을 생성함으로 두번째 타입의 생물이 될 수 있는지 조차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유신 진화론자들 역시 사용하는 정의의 왜곡
문제는 이런 류의 정의의 왜곡이 무신론자들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기독교 내에 유신 진화론자들에게서도 이런 류의 왜곡이 나타납니다. 이미 여러번 설명드렸듯이 유신 진화론자들은 바위의 풍화 작용을 창조라고 정의함은 물론이고 생명의 다양성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초자연적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자연적이란 단어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저지릅니다. 4
왜 이런 정의의 왜곡이 발생할까요? 저는 이것이 자신이 믿는 세계관을 실제로 관찰되는 과학에 끼워맞추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나오는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짓이 있고 무지가 있으며 미혹이 있습니다.
창조론 연대기에도 사용되는 정의의 왜곡
안타깝게도 이와같은 동일한 미혹들을 창조론 연대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조론 연대기는 창세기 1장이 역사적이라는 것에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역사란 무엇입니까?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 입니다. 즉 인간의 최선의 지식으로 정리한 실제 일어난 사건들 입니다.
즉 창세기 1장이 역사라면 하나님은 지구를 첫째날에 만드시고 태양을 넷째날에 만드셨다고 봐야 옳습니다.
하지만 수영이네 아버지는 이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창조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창세기 저자가 무엇에 초점을 두고 기록했는가가 다른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장면에는 두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첫번째, 창세기 1장이 역사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칸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역사라고 말을 바꿉니다.
두번째는 창세기의 기자 즉 기록한 자를 저자 즉 저작한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즉 성령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것이 아니라 성경을 스스로 만들어서 쓴 저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성경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기록했다면 그것이 역사가 될 수 있는가?
자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배 12척을 갖고 330척의 왜군의 배를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에 초점을 두어서 배 2척으로 왜군의 배 100,000척을 물리쳤다고 기록하면 그것이 역사입니까? 만약 어떤 왕이 자신의 인자함에 초점을 두고 불쌍한 고아 100만명을 왕실에서 먹여 살렸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한명도 도와주지 않았구요. 그렇다면 그것이 역사입니까? 그것을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거짓말 입니다. 사기입니다.
수영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논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수영이 어머님이 내려온 커피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준이는 원두를 갈아서 필터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내려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수영이는 자신이 핫쵸코를 원했지만 또렷한 정신으로 멋진 얘기 나누라고 찐한 커피를 내려주셨다고 설명합니다.
분명히 이 둘이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것은 맞지만 두 설명 모두 실제 사건을 얘기한 것입니다.
역사란 실제 사건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실제 사건에는 오류가 있을수 없습니다.
유신 진화론자들이 수영이의 아버지가 설명한 것처럼,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두개의 창조 기사를 모순이라고 조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과 2장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수영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전 우주적인 창조라는 거시적인 관점과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 조성이라는 미시적인 관점을 설명하고 있어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그 안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기록한 사건들은 모두 실.제.사.건. 즉 역사 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는 분명히 24시간을 의미했지만…
유신 진화론자인 우종학 교수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창세기 1장의 문맥을 보면 여기서 사용된 하루는 분명히 24시간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연대나 시간, 순서등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한 역사를 분명히 담고 있지만 그 서술은 신학적 메세지를 주기 위한 서술이지 과학적 사실을 아려주기 위한 서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5
만약 창세기 1장이 창조의 연대나 시간, 순서를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면 창세기 1장은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창세기 1장이 창조주의 천지 창조의 역사를 담고 있다면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연대나 시간 순서등을 가르쳐주는 책이 맞습니다. 두 주장 중 하난 거짓이며 교수님은 자신의 같은 글 안에서 모순되는 주장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우 교수님은 그러면서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메세지를 주기 위한 기록이지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답답해서 몇번을 반복해서 똑같은 얘기를 하는것 같지만,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상징하기 위해 하는 얘기는 ‘비유’나 ‘신화’라고 하지 역사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동일한 논리
실제로 이런 류의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들 입니다.
유월절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세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치면 성경에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록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가상의 인물이고 다윗왕도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브라함과 다윗등 성경의 핵심 인물들이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해 이는 부정당했습니다.)
저는 창조론 연대기가 말하는 창조 기사는 하나님만이 왕이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이 피조 세계를 선하게 다스리시려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실제 사건을 통해서 드러내신 것이지 없는 일을 소설이나 신화처럼 지어내서 드러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후 놋뱀을 봐야 불뱀에서 물리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을 봐야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예표이지만,그렇다고 놋뱀 사건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 내내 실제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예표해 주셨습니다.
비유와 실제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으로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낸다면, 실제로는 세상이 자연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왕적인 권세가 없음을 역설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유신 진화론자들은 열심히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알아서 자연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아서 원죄가 없다면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게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게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 아닙니까?
또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지 아니하셨으면 우리의 선포하는 것이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리니 이는 우리가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였기 때문이라. …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4~19>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이 실제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의 모든 논리는 무너지고 맙니다. 창세기 1장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 비유라면 하나님만이 온세상의 왕이라는 것 역시 실제가 아니라 비유가 됩니다.
창조론 연대기는 재밋는 스토리와 흥미로운 전개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은 만화였지만, 정작 그 안의 내용은 왜곡과 모순, 오해로 가득한 정직하지 못한 웹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곧 마무리화를 앞두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한 사람의 독자로서 너무도 안타깝고 실망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