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에 모순이 존재할까요?
많은 무신론자들과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논할때, 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근거를 내세울때, 더 나아가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는 근거로 창세기 1장과 2장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무기로써 사탄은 끈질기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특히 창세기의 시작부터 신뢰하지 못하도록 많은 공격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의 주장은 아무 무리없이 반박이 가능합니다. 오늘 이 글을 통해서 비평가들이 왜 창세기의 1장과 2장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는 어떤 오해가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 1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뜻 보면 창세기 2장의 이야기에는 다른 순서가 있는것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서 비평가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경우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의 저자와 2장 4절 부터의 저자가 다른 사람이며 그로 인해 창세기의 창조 순서가 다르다고 얘기를 합니다.
성서 비평가들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
그 근거를 보겠습니다.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창세기 2:4>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그때에는 주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며<창세기 2:5>
단지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세기 2:6>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세기 2:7>
비평가들의 주장에 대한 간단한 반론
비평가들의 주장은 식물과 작물이 없었는데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 입니다. 즉 다른 모든 동식물 보다 사람을 먼저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는 식물과 작물 그리고 동물의 창조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이 창조 첫째 날에 대한 설명이고, 창세기 2장 5절~6절은 물과 땅을 나누신 둘째 날과 셋째 날 처음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셋째 날 후반, 넷째 날, 다섯째 날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여섯째 날 사람을 지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1장이 거시적인 전 우주에 대한 창조를 기록한 것이라면 2장 4절 부터는 포커스를 사람에게 맞추어 창조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입니다.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창조와 이미 창조하신 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것의 차이
특히 2장 7절은 사람의 창조에 대한 내용이고 2장 8절 부터는 에덴 동산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꾸미시는 지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남자를 거기 두셨으며 <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들을 그 곳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2:9>
2장 9절에 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게 아니고 자라나게 하신 것 입니다. 우리가 새로 집이나 정원을 만들 때, 조경을 하듯 하나님은 그곳에 나무와 꽃들로 동산을 꾸미신 것 입니다.
그러다가 논란이 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시제가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 Wayyiqtor 기법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이를 원어로 보면, 짐승들을 지으시다라는 의미의 봐이서(וַיִּצֶר֩)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읽었을 때, 아담이 창조가 된 이후이기에 짐승들이 아담의 창조 이후에 지어졌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 구절을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NIV를 비롯한 일부 번역들은 지으셨다라는 단어 봐이서를 Form이 아닌 과거 완료형인 had formed 즉 지으셨었다로 번역했는데, 히브리어 학자 John Sailhamer는 그가 쓴 창세기 주석서 “해설자의 성경 주석” (1990년)에서 NIV의 해석을 비판하며 waw-consecutive 혹은 wayyiqtol 이라는 히브리어 문법상 “지으셨다”는 글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1]
하지만, H.C.Leupold는 그의 책 창세기 강해[^2] 에서 동사 “지으셨다”를 과거 완료로 즉 “지으셨었던”으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어 학자인 Victor P Hamilton 역시 그의 책 창세기 :1장~17장 (1990년)을 통해 Leupold의 의견에 동의하며 창세기 2장 19절을 “지으셨다”를 “지으셨었던”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3]
결국 논점은 이 것 입니다. wayyiqtol 혹은 waw-consecutive 라고 불리는 문법은 사건의 순서와 글의 순서가 일치해야 하는가? 아니면 먼저 나온 동사가 나중의 사건이 혹은 나중에 나온 동사가 먼저 일어났던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의 여부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Wayyiqtor의 예제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장면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해를 위해 14절 하반절부터 직역 성경으로 적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큰 재산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We-at-tah) 너는 네 조상들에게로 평안히 돌아가리니 좋은 백발로 묻힐 것이다. <창세기 15:14~15 – 히브리어 직역 성경>
창세기 15장 13~14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방 땅에서 400년간 괴롭힘을 당하다가 큰 재산을 받아서 나온다는 내용이 있은 후에 아브라함이 평안히 죽얼 것이라고 알려주는 장면이 있는데, 창세기 1장과 2장을 해석하는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출애굽 이후에 죽어야 한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이 출애굽 이후에 죽는다는 오류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후 성경과 문맥에 맞추어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6하 원칙이나 논리를 중요시 여기는 헬레니즘에 기초해서 모든 책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기준이지 과거에 특히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도 같은 방식으로 글을 썼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특히 성경은 헬레니즘이 아닌 헤브라이즘을 기초해 글을 썼고, 헤브라이즘에는 시간의 순서가 절대적인 글을 쓰는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계속해서 시간 순서대로 글을 적지 않고 왔다갔다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기법은 현대 영화나 소설에서도 자주 사용되죠. 어떠한 목적을 위해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 하며 독자의 흥미를 자아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며 단순히 지금 나의 이해로 쉽게 오류라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Wayyiqtol의 사용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wattiktob)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wattahtom)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그 편지를 보내니라(wattislah). 그녀가 편지에 써서(wattiktob) 이르기를, <열왕기상 21:8~9a>
위 구절은 열왕기 상에서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기 위해 이세벨이 계략을 꾸미는 장면인데, 제가 굵은 글씨로 강조한 동사들은 Wayyiqtol 용법이 사용된 곳 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편지를 쓴 것은 한번이지만, 9절 상반절에 편지를 쓴 표현이 다시 한번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편지를 봉인하고 보낸 이전에 있었던 편지를 쓴 사건이 글에서는 그 뒤에 사용된 사례입니다.
다른 사례를 또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어나서(wayyaqumu) 나가니(wayyeleku) 여호수아가 땅을 그리러 가는 자들에게 명하여(wayesaw) 이르되, 가서 그 땅을 두루 다니며 그것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 실로에서 너희를 위하여 주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하니라. <여호수아 18:8>
이 장면은 땅을 상속 받지 못한 7 지파를 위해 제비 뽑아 상속을 하려고 땅을 그리러 사람을 보내는 장면 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땅을 그리러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땅을 그리러 떠났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는 그 순서가 뒤 바뀌어 있습니다. 즉 일어나서 나가는 장면이 우선 명하는 것이 나중 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순서는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례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다만 한글 번역에는 원문을 잘 표현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어서 영문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Now the LORD raised up (wayyaqem) an adversary against Solomon, Hadad the Edomite; he was a descendant of the king in Edom. For it happened (Wayehi) , when David was in Edom, and Joab the commander of the army had gone up to bury the slain (Wayyak), <열왕기상 11:14~15a>
이 장면은 우상 숭배를 한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의 대적을 일으키시는 장면 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에돔 족속 하닷을 솔로몬의 대적으로 일으키시는 장면이 나오다가 그 이후에 다윗이 왕일 때의 이야기를 합니다. 분명히 과거의 그것도 먼 과거의 이야기를 뒷 구절에 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wayyiqtol 용법의 사용이 반드시 시간의 흐름에 맞게 기록되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짐승들의 창조가 인간의 창조보다 이전이지만 글의 흐름을 위해 더 나중에 기록 되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 랍비 Yehuda Shurpin은 분명하게 wayyitol 용법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사용되어야 하지 않으며 창세기 2장 19절 역시 하나님이 창조 하셨던 (God HAD created…)로 사용될 수 있음을 얘기합니다.
Norman Geisler와 Thomas Howe의 의견을 참고해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모순이 있다는 비평가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