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목적은 죽음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입니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삶의 목적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할까요? 그들은 이 세상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목적은 인간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목적이란 있을수가 없으며 모든 것은 허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작위로 우연히 생겨난 단백질 덩어리인 나란 존재에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죽음 후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진다고 믿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어떤 족적을 남기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스티브 잡스가 되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편의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알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사라진 나라는 존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 자식에게 수조원의 재산을 물려주어 내 후손이 영원히 부자로 떵떵거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 모든 후손 하나 하나는 결국 사라져 없어질 존재입니다. 그리고 50억년 후가 되었던 100억년 후가 되었던 우주는 붕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에게 삶의 목적이란 기껏해야 지금의 삶을 최대한 즐기는 것 뿐 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즐거울 수 없다면 그 어떠한 소망도 없다면 그들은 삶을 이어나갈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자살을 해서 죽는 것이나 100년 후에 죽는 것이나 다른 점은 없습니다. 또 나에게 손해가 없다면 을사오적처럼 나라를 팔아서라도 개인적인 이익을 얻는 쪽이 독립 운동을 하며 비참하게 사는 것 보다 더 현명한 일일 것 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은 성경에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다른 답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왜 지어졌는지를 분명하게 얘기해 줍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게 된 인간에게는 성경의 이 말씀이 억울하게 느껴지고 불합리하게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가장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 논하기에 앞서 잠시 생각을 해볼 것이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지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해보는 것 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요즘 보편화 되어 있는 스마트 폰을 예로 들어보죠. 만약 여러분이 스마트 폰을 만들었다면 혹은 구입했다면 그래서 그 스마트 폰의 주인이 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스마트 폰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스마트 폰이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입니까? 당연히 나의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서 스마트 폰이 존재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피조물 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는 하나님 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입니까? 당연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골로새서 1:16>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히브리서 2:10a>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0>
우리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 입니다
우리가 항상 얘기하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의 주인 자리에서 내가 내려오고 예수님을 모신다는 의미는 바로 내 삶이 더 이상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사는 이유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빌립보서 1:20~21>
그럼에도 많은 불신자들이 심지어는 기독교인들 까지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말이 되냐고 반문하고 그것을 불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 입니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악’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로마서 1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로마서에서는 동성애를 대표적인 예를 들어 죄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주셨으니 이는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로마서 1:26>
동성애가 죄인 이유는 본래대로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원리에서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는 모두 죄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은 모두 죄 입니다.
아무도 TV를 보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기지 않을 것 입니다. 하지만 군인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 시간에 혹은 보초를 서야하는 시간에 TV를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죄가 없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굉장히 크게 얼차려를 받거나 영창에 가야 하는 일일 겁니다. 왜 일까요? 군인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인정하지 않는것,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는 모든 것은 피조물로써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죄가 됩니다.
나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삶을 살때에 내 삶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삶의 목적은 창조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허무하게 만들까요? 그것이 내 삶의 가치를 떨어뜨릴까요? 내 안의 죄는 분명히 그렇다고 인식하게 만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삶의 목적이 내가 아닌 하나님이 될 때 나의 삶은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스마트 폰이 가치가 있다라는 것을 어떻게 측정하나요? 스마트 폰이 평가할까요? 강아지가 평가 할까요? 아닙니다. 스마트 폰의 가치는 그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 됩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얼마나 스마트 폰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스마트 폰의 존재 목적은 무엇이 있을까요? 전화, 인터넷, 사진, 음악 등이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스마트 폰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가치는 배터리 용량이 많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배터리가 닳지 않도록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 스마트 폰에는 어떠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 스마트 폰은 쓸모가 있는 것 입니까?
없습니다. 만약 제 스마트 폰에 배터리가 항상 100%라고 하더라도 전화도 안되고 사진도 못찍고 인터넷도 못한다면 그 스마트 폰은 팔리지도 않을 것이고 내 사용 목적에 맞게 고치거나 아무리 고쳐도 수리가 안된다면 버릴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여러분은 전화도 안되고 사진도 못찍고 인터넷도 안되는 스마트 폰을 버리는게 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하니라. <누가복음 3:9>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에 대한 권리도 갖고 계십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10조원에 사서 그 그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사자마자 불로 태웠습니다. 제가 어떠한 잘못을 했나요? 아닙니다. 제가 그 그림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갖고 있을때, 그 그림을 태우던 찢던 집의 가장 잘보이는 곳에 걸어 놓던 그것은 저의 자유이자 권리 입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제가 구입한 그림을 찢어 버렸다면? 그가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더라도 그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 할 것 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로써, 그 피조물에게 무엇을 하던 잘못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죽여도, 아무 이유 없이 지옥에 보내도 그 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있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9:14>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토기장이가 같은 덩어리의 진흙으로 한 그릇을 만들어 존귀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를 만들어 수치에 이르게 할 권한이 없겠느냐? <로마서 9:20~21>
인간 스스로 세운 가치 체계로는 열매 맺지 못하는 허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배터리가 가득 찬 것이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는 스마트 폰 처럼,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가 정해 놓은 절대적인 목적이 아닌 자신이 정한 주관적인 목적 예를들면, 부자가 되는 것, 많은 이성을 만나는 것, 높은 권력을 갖는것, 심지어 하나님이 정한 정의가 아닌 인간이 임의대로 정한 정의로운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가치를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삽니다.
하지만 그 삶에는 어떠한 가치도 없으며, 열매 맺지 못하는 허무한 삶일 뿐 입니다. 책은 사람들이 읽어서 지식과 즐거움을 줄때 최고의 가치를 발휘 합니다. 계산기가 사람들이 원하는 계산을 정확하게 해낼때 최고의 가치를 발휘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삶이 가치있는 삶이 되기를 바라신다면, 즉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셔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하셔야 하고, 깊은 교제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4~5>
가치 있는 삶
이제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보시는 가치 있는 삶을 산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카타콤이라는 곳을 들어 보셨을 것 입니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서 동굴에서 신앙을 지키던 곳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이 곳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실리시아의 무덤 근처에서 하나의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비문은 셉티머스 프랙텍타터스라는 신앙의 선배가 죽기 전에 남긴 글이었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 실리시아의 셉티머스 프래텍타터스, 가치 있는 삶을 살다 가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이곳에서 섬긴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삼십 삼년 육 개월을 살고 주님께 영혼을 드리다.
셉티머스 프래텍타터스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쓰레기 같은 삶을 산 실패자 였을것 입니다. 그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었고, 세상의 즐거움도 없었으며, 오히려 고통만 가득한 삶을 살다가 33년만에 죽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이 가치 있었다고 고백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천국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치 있는 삶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값비싼 자동차가 있어도, 이 차가 가랄때 가지 않고 서랄 때 서지 않으면 가치 있는 멋진 차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소유주인 하나님에 의해 결정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질문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앞으로의 저와 여러분의 삶이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우리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그래서 최고의 가치를 가진 멋진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