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마리아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해 놓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에는 어떤 의미와 십자가가 숨어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6개의 빈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돌항아리는 유대인들의 결례를 행할때 쓰는 돌항아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 그리고 식사하기 전에 손과 몸을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이는 율법도 아니고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항아리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이 돌항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 지어지지 않은 형식 주의에 빠진 생명력 없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물도 없는 정결 예식 항아리, 복음과 상관없이 종교 행위를 열광적으로 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주님은 그 항아리 들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참 기쁨과 참 행복이 어떻게 오게 되는 것인가를 표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 버린 것 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주로 기쁨, 잔치, 희락을 상징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심장을 강하게 하는 빵이 나게 하시는도다. <시편 104:5>
심지어 랍비들의 어록에는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정도로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 요한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빗대어 유대교를 진짜 기쁨을 상실한 잔치집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다른 말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을 형식만 남아 있는 유대교 즉 종교로 비유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 잔치집이 참 기쁨을 회복한 잔치집이 되기 위해서는 포도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져야 진짜 잔치집이 될 수 있음을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이 사건의 진짜 메세지 입니다.
왜 완전한 7개의 항아리가 아니라 6개 였을까?
요한 복음은 아주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기록을 하는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왜 완전과 안식을 상징하는 7개 대신 6개의 항아리가 있었을까요? 일부로 숫자까지 기록을 했는데, 항아리는 6개 밖에 없습니다.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누가복음 22:20>
마지막 7번째 항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혼인 잔치로 이끄는 것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들 중의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 <요한 복음 2:11>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계시되는 것
가나의 표적에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계시되어 나타나 있는 상태를 영광이라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얘기하는 것 입니다. 십자가에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 용서, 공의, 오래 참음, 긍휼, 자비가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 입니다.
그러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떤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났나요?
우선은 창조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된 것은 본질이 바뀐 것 입니다. 가나라는 유대인들도 잘 모르는 작은 동네에 이런 성품이 드러난 것은 가나의 혼인 잔치 집과 같은 초라하고 나약하고 추하기 그지 없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 들어가 파장 될 뻔 했던 잔치집에 포도주를 만드는 창조의 행위를 보태심으로 그 잔치집을 잔치집으로 회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기쁨을 잃고 타락한 인간들 참기쁨을 상실한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메워도 메워도 메꿔지지 않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직접 메꿔 주시는 것 입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것을 봐야 합니다.
두번째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주님의 기쁨
두번째로 나타난 영광은 불가능한 곳에 쏟아지는 주님의 기쁨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처럼 참 기쁨을 얻을수 없는 존재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참된 하나님의 기쁨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상황이 바뀌어서 기쁜게 아니고, 우리의 조건이 변해서 기쁜게 아니고 우리의 소원이 기쁜게 아니고, 예수님 만으로 기뻐하셔야 합니다.
예배당은 장례식장이 아니라, 혼인 잔치 집 입니다. 세상에서는 얻어 터지고 찢기고 상하고 와서 이 곳에서는 잔치를 벌이는 곳 입니다. 아버지 앞에 나와서 아버지가 무엇을 기뻐할 지를 생각해야 할 것 입니다. 경건만을 생각해서 형식을 갖추고 무겁게 만 있는 것이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자유로워 져야 할 것 입니다.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이 계시느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4~7>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서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기쁨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갖고 있을수 있는 것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마태복음 11:28~29>
여기서도 예수님은 자기에게 배우면 영혼이 안식을 찾을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기쁨인 것 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내 삶을 포도주로 채워 주시는 예수님
이렇게 주님은 칠흑같이 어두운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포도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쁨은 있으나 마나한 기쁨이 아닌 것 입니다. 항아리 여섯개에 들어갈 포도주는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넘치게 포도주를 주셨을까요? 왜 오병이어의 기적 후 12광주리나 남겨 주셨을까요? 하늘의 풍성함! 하늘의 복과 기쁨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것이지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기쁨을 찾는 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의 표출 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은 마치 알베르토 까뮈가 쓴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삶 같은 것 입니다. 시지프스가 어떤 저주를 받았냐면, 계속해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야 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상에 다 올려놓으면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그러면 다시 끌고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욕망을 갖고 기쁨을 찾아 그 목적을 이루어도 그 만족이 며칠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욕망을 찾아 가야 하기 때문 입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또 다른 바위를 찾아서 다른 곳으로 끌고 올라가야 합니다.
죽을 때 까지 그 일만 하다가 죽을 것 입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 입니까?
성경은 그런 것을 기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기쁨은 오직 하나님 께로만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통한 안도와 평안, 안식 ,행복 이런 것이 여러분안에 있는지를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주셨는데도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 기쁨, 그런 기쁨이 우리 안에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로마서 14:17>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인 것 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얻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원 성취나 목표 달성이 아닌 여호와로만 기쁘게 만드시겠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쁨이 성도의 힘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싸워야 하는데, 하나님만으로 느끼는 기쁨을 통해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때에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일부를 보내라. 이 날은 우리 주께 거룩한 날이니라. 너희는 또한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10>
이 세상적인 기쁨이 진짜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권력을 얻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힘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로 기뻐할 수 있을때 그것이 힘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가난이 무섭습니까? 질병이 무섭습니까? 여호와가 나의 기쁨이 되었는데 왜 무섭겠습니까? 이런 기쁨을 소유한 자가 하박국에 나오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께서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들에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3:17~19>
이 고백이 성도가 가야할 길인 것 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무화과 나무에 꽃을 주고, 포도 나무에 열매 주고, 밭이 소출을 달라고 하고 우리에 양을 채워 주고 외양간에 소를 채워달라고 하며 그 것을 받지 못했을 때, 실망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관심이 포도주로 가 있을때, 그리고 그 관심이 예수님께로 옮겨졌을 때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지매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분께 이르되,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한 복음 2:3>
마리아의 목적과 관심이 포도주로 가 있을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대답 하시지만
그분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이르되,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한 복음 2:5>
마리아의 관심이 포도주에서 예수님께로 옮겨가자 예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 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과 세상의 힘, 기쁨에서 예수님께로 옮겨 갈때,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다 엎어라!” 라고 하시면 엎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엎으라고 할 때 엎지 못하면 아직도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포도주에 관심을 두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자식을 잃고 성경책을 찢는 부모
그 놈 목소리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에서 유괴 당한 아이의 부모들은 교회를 다닙니다. 당연히 열심히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결국 아이는 시체로 돌아 옵니다. 그 때 이 아이의 어머니가 방안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한장씩 북북 찢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께 “대신 내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기도했음에도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성경책을 찢어 버리시겠습니까?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내 기도가 들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앞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관자 이시며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 주었어야 합니다. 내 자식이 언제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영생을 얻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 아이가 유괴 되기 전에 정말 중요한 영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아이에게 이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게 아니고 하나님으로 살아가는거야 라고 신앙을 가르쳤다면 물론 내 자식이 먼저 떠나간 것이 가슴 아프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셨다고 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원히 지옥에 가야 할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내 자식에게 영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가르치고 신앙을 교육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가, 내 소원,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이는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르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 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또 지금 당장 중동에 수 많은 우리 형제 자매들은 수많은 핍박과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영생을 받은 우리가 무엇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나요?
네로 황제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자기 자식들이 하나 하나 뜨거운 기름에 들어가 기름에 튀겨지는대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얘야, 조금만 있으면 우리는 아무런 고통도 없는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있을거야! 조금만 참으렴…” 이라고 말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자식 세명을 모조리 잃었는데도 큰 돈을 헌금하며, 보잘것 없는 자신의 집안이 세명이나 되는 순교자의 집안이 되었음을 감사하고,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들을 양자로 삼아 그들이 결국 진정으로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무엇이 말씀에 부합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창조하고 싶어하시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포도주에서 눈을 돌려 “그가 말씀하시는대로 하라!” 즉 예수님께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일주일에 한시간도 말씀을 읽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가 있으며, 그런 우리 안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으십니까? 또 어떻게 우리 안에 기쁨을 채우실 수 가 있으며, 어떻게 새 창조를 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서 내 소원이 채워지는 것에서 예수님께로 돌리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