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 너희는 이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라!
그런데 주님은 그 일련의 사역 속에 창세 전 부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일 하십니다. 그렇기에 저주받아서 죽어야 마땅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성전으로 변하게 되는 것 입니다.
옛 성전인 우리가 옛 성전이 되셔서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 죽고, 새 성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 성전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보고도 성전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전서 3:16>
이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 입니다. 우리는 옛 성전 안에서 장사나 하던 장사치 같이 나만을 위해 살며 죄만 짓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을 주신 것 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명령하시는 것 입니다.
기도는 이것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참 성전으로 바뀌는 과정 가운데 우리의 노력이나 꾀나 지혜가 전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성도들은 이토론 엄청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오는 감사로 예배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의 삶은 하나님을 목표로 살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거나 주시지 않는 어떤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무엇을 주시든지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과 제사를 드리러 성전을 찾은 유대인들이 한 짓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 아니라 모두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풍성한 나무 이파리 같은 종교 행위만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정작 맺어야 할 열매는 맺지 못하고 엉뚱한 일들만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파리만 풍성한 저주 받을 무화과 나무 인 것이고 이 것을 부수는게 무화과 나무의 저주이고, 이 것을 부수는게 성전의 파괴인 것 입니다.
종교 개혁과 우상 파괴에 힘을 쏟은 요시아 왕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
요시아 왕은 유대 후기에 성전을 정결케 하고 종교 개혁을 하며 모든 우상들을 찍어 버린 보기 드문 왕입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책을 읽어 더욱 더 깊이 회개하고 더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하고 유월절도 잘 지킵니다. 성경은 요시아 만큼 유월절을 잘 지킨 사람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성전을 정화하고, 율법 준수를 외치던 이 당시의 예언자인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을 막아서게 하시고, 이렇게 외치게 하십니다.
주 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주의 집 문에 서서 거기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주께 경배하려고 이 문들로 들어가는 너희 모든 유다 사람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길과 너희 행위를 고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하여금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들이 주의 성전이라. 주의 성전이라. 주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예레미아 7:1~4>
지금 열심히 종교 개혁을 하고 우상을 찍어 버리고 유월절도 역사에 없을 만큼 잘 지키던 이 때에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가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길과 너희 행위를 철저히 고치고 사람과 그의 이웃 사이에서 철저히 심판을 집행하며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학대하지 아니하고 무죄한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너희에게 해로운 다른 신들을 따라 걷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 곧 이곳에서 너희로 하여금 영원무궁토록 거하게 하리라. 보라, 너희가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거짓말을 신뢰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 걸으면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 모든 가증한 것을 행하려고 우리가 구출 받았나이다, 하려느냐?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너희 눈에 강도의 소굴이 되었느냐? 보라, 심지어 내가 그것을 보았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예레미야 7:5~11>
겉만 번드르르 한 종교 행위에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지 않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서, 겉만 번드르르한 종교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거짓말 하는자, 강도! 라고 하시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산이 바다로 던져졌으니까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산이 없어지고, 또 우리 주위에 산이 없어진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떻게 정죄하고 안아주지 못하고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냐는 것 입니다.
그게 안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답답해 하시면서 거짓말 하지 말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외치는 것 입니다.
“종교 개혁을 한다고? 우상을 찍어 버린다고? 웃기지 마! 너희는 그냥 나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뿐이지, 여전히 우상 섬기고 있는거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 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뒤 뜬금 없는 용서의 권고
그래서 마가 복음의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 뒤에 뜬금 없이 용서의 권고가 들어가 있는 것 입니다. 왜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 뒤에 왜 갑자기 용서하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걸까요?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구를 대적할 것이 너희에게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시리라. <마가복음 11:25>
이를 원문에 맞게 풀어서 번역을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너희를 용서하실 때에 동시에 너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 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은 당연히 그 용서가 흘러 나온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용서의 삶, 긍휼의 삶, 이해의 삶이 아닌 자기들의 욕심이나 탐욕을 어떤 우상에게 빌면서 그 욕심이나 탐심을 만족시켜 달라고 아우성 치는 사람들은 모두 절도요, 강도요, 거짓말을 하는자 라는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종교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 입니다. 그 의미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만족 스럽게 받겠다고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시키는 것을 전심을 다해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을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라는 것을 하고, 주인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주인이 기뻐 하는 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이며 종교 행위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해서 종교 행위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는 증거인 것 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식으로 가르치고 온전한 말씀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교리에 동의하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논쟁과 말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 이로써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이 생기며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디모데 전서 6:3~5>
하나님을 섬기는 것 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사람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타락한 자들은 경건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 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다는 것 입니다.
우리 중에 내가 예배당에 나가 줌으로, 내가 봉사를 해 줌으로, 내가 헌금을 해 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거야, 라고 기대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절도요 강도인 것 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 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앞에 엎드려 항복하고 그 분이 시키는 것은 뭐든지 선임을 인정하고 그 분께 나를 완전히 바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무엇 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좋고 감사해서 그 분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배우고, 그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를 배우기 위해서 나오는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빌리기 위해 나오는 것 입니까?
나를 위해 부르는 것은 모두 우상 숭배 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매 백성이 그것을 보고 함께 모여 아론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우리를 위해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출애굽기 32:1>
성경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부르는 신을 다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존재하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들이 섬긴 것은 정작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풍요와 행복을 줄 힘이 센 어떤 존재를 쫓은 것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어도 좋고, 바알이여도 좋고 송아지여도 상관이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던 하나님을 겉으로 표현해 낸 것이 금송아지 입니다.
그 금송아지는 이집트에서 그들이 섬기던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이며 자신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의 백성들이 섬기던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난 하나님을 섬겨요, 난 하나님만 쫓아가요 라고 했지만, 정작 그들이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을 줄 수 있는 송아지 였던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냐는 것 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인이며 구원을 받았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입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무엇을 만드시겠습니까?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던 금송아지를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깨고 벗어 나야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모형을 또 다시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
히스기야 왕이 산당과 우상들을 제거할 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느후스단 입니다. 이게 뭐냐면, 모세가 만든 놋뱀 입니다.
이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히스기야 왕때 까지 거기에 절하고 제사 했던 것 입니다. 왜 여기에 절하고 제사 했을까요? 놋뱀이 무엇을 해주었는데요? 병고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병 고침이 필요할 때는 거기서 빈 것 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가리켜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하시는 것 입니다.
사람들은 “아니야! 난 하나님도 섬겼고, 여기에는 가끔 가서 절했다니까!” 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하고, 그 우상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놋뱀처럼 들려 올려야 하리라 라고 했듯이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의 뱀이 되셔서 달리심으로 그것을 바라본 자들이 은혜로 살아나는 사건을 예표한 것 이죠. 그런 진의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이 놋뱀이 병 고쳐 줬으니까 여기다 절하면 날것이라는 믿음으로 우상 숭배를 하는 것 입니다.
이들과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
이게 오늘날 기독교 입니다. 아마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이 것을 찍어 버리고 엎어 버리실 것입니다. “여기가 이윤 추구 하는 곳이냐? 장사 하는 곳이냐? 너희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내가 2,000년 전에 이 옛 성전이 되어져,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새 성전으로 만들어 놨는데 여전히 여기서 이윤 추구 하고 있는거야?” 이럴 것 같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뒤집어 엎으시기 전에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 때는 끝 입니다. 두번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이것 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갈망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배와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 입니까?
오죽하면 바울이 너희가 섬기는 신은 배라고 했겠습니까? 기독교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때 부터 형식에 매달리게 되고, 형식에 치우치게 되고 형식만을 강화화게 됩니다. 내용이 없어지면 자꾸 그릇을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거짓말을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혜라고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외형에 치우치는 기독교와 그 결과
내실이 없고 본질이 흔들리다 보니까,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외형적인 성장과 부흥 밖에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영웅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어주니까 교회 키우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그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썩어가고 있는 것 입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신앙, 기독교, 믿음 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자아 성취의 욕구를 여기서 자아 성취의 욕구를 여기서 해소 합니다.
“성공한 목회자!”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멋진 예배당!”
이런 말이 기독교에 가당한 단어들 입니까? 성공한 목회자라는게 뭡니까? 사람들 많이 모으고 베스트 셀러 많이 내면 성공한 목회자 입니까?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성 베드로 성당은 이제 도색 잡치 파는 더러운 곳으로 전락해 버렸고,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안에 속한 참 교회 진짜 성전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하고 자라가고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며 본질이지 이파리만 무성하게 자라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저 세상의 힘 좀 주십시오. 나 부자 한번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건, 하나님 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의지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말 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이것만 있으면 살 수 있으니까, 나 그거 주세요.”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니까!” 라고 하셔도 “아니요! 당신은 필요 없고,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하나님은 없어도 되요!” 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의 힘이라고 하는데 다른 힘을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것이 기독교 입니다.
신앙은 Outside in이 아니라 inside out 입니다. 내가 나를 비우고 나를 쏟아 부어서 하나님과 내 이웃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밖으로 부터 무언가를 채우고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자꾸 무언가를 채워달라고 하고 나의 이익만을 위해 종교 행위를 한다면 장사치들이 넘쳐나던 성전 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을 뒤집어 엎어 버리실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고 나를 정결케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부르짖어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