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인정치 않으시는 믿음 – 요한복음 12-1
이제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매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을 필요가 없으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 속에 있던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
<요한 복음 2:23~2:25>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올바른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아 보이지만, 이 세 구절은 앞뒤에 에피소드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에 중요한 구절입니다.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린다고 나다니엘에게 말씀하신 후에 기록된 2장 부터 12장까지의 7개의 표적은 죄인들에게 굳게 닫힌 하늘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리게 됨을 보여주는데, 그 중 첫 표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입니다. 이는 형식에 치우치는 종교로는 잔치의 기쁨을 맛볼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즉 진정한 잔치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회복이 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성전을 파괴하는 사건입니다. 겉으로는 온갖 율례를 행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잎사귀만 무성한 종교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진노를 성전 파괴 사건에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저주 받은 성전 또 무화과 나무가 되어서 파괴 당하시고 우리를 새 성전으로 재창조 해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성전 파괴 사건에 담긴 메세지 였습니다.
유월절 절기 동안 많은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
본문 23절을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 내내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들은 모두 표적 (Sign)이었습니다. 이 기적들은 어떤것을 가리키는 표적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표적이 가리키는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표적 자체에 빠져 버린 것 입니다. 이 표적의 신기함에 매혹되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어떻게든 믿었으면 되는 것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기적에 매혹되어 믿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라고 했을때, 맡기다라는 단어가 에피스투엔 (ἐπίστευεν) 인데, 이 단어는 피스테오(πιστεύω) 믿다 라는 단어의 미완료 능동태 입니다. 이와 똑같은 단어가 23절에 나오는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그를 믿었다라는 구절에서의 믿다가, 역시 피스테오의 부정 과거 시제인 에피스투산(ἐπίστευσαν) 입니다. 그 시제는 일시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를 시제만 달리 사용해서 무언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요한은 그 단어의 대조를 통해서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충동적으로 예수를 쫓는 것일 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에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면 어쩌면 예수님을 진정한 ‘믿음’을 가진 분이 아닐지 모릅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신실한 척 연극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바리새인들 뺨치게 종교 행위를 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본인 스스로도 속여 내가 예수를 잘 믿는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속지 않으신다는 것 입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음이 확인이 되면 그 즉시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즉 그들의 ‘믿음’을 온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고 기록하는 것 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주님이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감각적인 지각이나 사물에 대한 견해가 아닌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을 의미 합니다. 이는 예수님에 전지성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표적을 보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게 아닌 표적들을 통해서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따랐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 입니다.
25절에 보면 주님의 전지성이 더 자세하게 묘사 되어 있는데, 주님이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 쓰였는데, 주님은 사람의 현재 과거 미래 모두를 속속 들이 아신다는 의미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겠다며 몰려 왔지만 그들을 인정치 않으셨던 것 입니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믿음
그들의 ‘믿음’은 부정 과거형, 즉 순간적이었고, 단발적이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그들이 믿었다라는 표현을 했을까요? 요한 복음에는 믿는다라는 말이 두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1장 12절 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참 믿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적을 보거나 감정에 자극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그 대상의 가르침을 받고 그를 따르는 행위 역시 믿는다고 표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믿는다라는 것을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의미로 썼기 때문에, 이런 혼용이 있게 된 것 입니다. 그렇기에 전후 문맥을 잘 보지 않으면 곡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분명히 앞에서 믿는다고 했는데, 뒤에서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등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라고 얘기했는데, 2장 22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님을 믿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전에 믿었던 건 무엇인가요? 단순히 그 분의 말씀을 받고 따르기로 했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수도 없이 했음에도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전부 도망갔습니다. 즉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믿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그런데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 나선 많은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곧 떠나고 배신할 것을 아시는데 말이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난 너희를 믿지 않아! 너희의 ‘믿음’은 온전하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다. 그러므로 아무도 주님께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설명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요한 복음 2:25 – Living Bible>
나 자신도 모를수 있지만 예수님은 나를 분명하게 아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며 상대방이 어떤 연극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나를 실망시킨 경우가 있는가하면 별로 기대치도 않았는데, 대단한 성과가 나를 통해 나올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 만날 나를 더 고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 <고린도 전서 13:12>
내가 지금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한 복음이 서두에서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것 입니다.
너희들 선민이라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제사를 지낸다고 무수한 잎사귀를 내세우는데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너희는 어떻게 너희 스스로도 잘 모르니? 라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내 이름 아시죠… 라는 찬양처럼,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이름을 안다는 것은 나의 모든 존재와 실체를 아신다는 것을 얘기 합니다. 또 내 생각, 또 내 신음소리… 나도 모르는 나를 예수님 만이 아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을 보실 수 있었고, 냉소적이지만 진지한 나다나엘에게서 참이스라엘을 보셨고,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서 새 삶과 의에 대한 열망을 보시고, 자신에게 향유를 부은 창녀 마리아에게서 주님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보신 것 입니다. 반면 내가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한 베드로에게서 부인함을 보셨고, 유다에게서 배반을 보신 겁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발가벗겨져 있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다면 어쩌면 그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 일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다는 확인이 있고, 그 예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이 삶을 낭비하지 않고 나의 창조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불꽃 같은 눈동자를 가진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하는 사람을 많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