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고 맛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라면을 맛있게 끓이기 위해서는 라면을 끓이면서 면발을 들었다 놨다하며 차가운 공기에 닿게하면 면발이 꼬들꼬들해서 맛있는 라면이 됩니다.
저는 이 사실을 스펀지라는 지식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시절 저와 같이 살던 형과 같이 이 프로그램을 보았고 그 때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살던 형이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해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그 비법을 알려 주었는데, 같이 봤던 스펀지가 알려준 방식 그대로 끓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스펀지를 보기만 하고 라면 끓일때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평소와 같은 수준(?)의 라면을 먹었었는데, 이 형은 우리가 머리로만 알고 있던 방법을 직접 적용해서 맛있는 라면을 끓일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기독교인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저 자신을 포함해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을 그냥 흘려보내고 한 주를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관념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뜬구름 잡는 소리고 우리는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세상이 가르치는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으니 물살이 그 집에 세차게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그 집이 크게 파괴되었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6:49>
여러분이 거할 하나님 나라의 집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끄떡없이 견디는 집입니까? 아니면 힘이 없어 무너지는 약한 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너무나도 커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붙들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35>
만약 우리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의 어떤 고난과 고통 심지어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사랑은 우리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고통의 영원에서 빼어내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행복의 영원으로 넣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통속에 던져지건 우리는 그와 비할바 없는 고통속에서 영원을 살아도 마땅한 죄인인데 그 고통이 영원이 아닌 잠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왜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라면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안다고 라면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리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반석위에 집을 세우지 않고 흙에다 세울까요?
여러분은 바위를 파본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흙은 몇번 파봤지만 바위를 파본적은 없습니다. 흙을 파서 기초를 만드는 것도 엄청나게 힘든 일인데 바위를 파서 기초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날 현대인들은 그리고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그럴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의 내 집 마련 vs 하나님 나라에서의 내 집 마련
우선은 내가 먹고 사는게 바쁘고, 우선은 내 품위 유지를 하는게 급하고 우선은 사회에서 뒤쳐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기 위해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길어야 100년 정도 살아야 하는 이 땅에서 내 집 하나 마련하는 것에 목숨 걸고 삽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영원히 살것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살 집 짓는 것에는 너무나도 소홀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따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읽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 기독교인이라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의 삶을 등한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무한하게 더 중요한 영생의 삶을 보고 즉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는 이 땅에서의 나그네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