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 당도 했습니다. 이 구절들에는 기독교의 주옥같은 교리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본문을 갖고 15번의 설교를 제임스 보이드 목사님은 11번,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12번 설교를 했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이 갖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방대 하며 감격스럽고 벅찹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의 전개 속에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1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것이라고 하셨으며, 2장 부터는 하늘이 열리는 표적들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총 7개의 표적을 통해서 어떻게 하늘이 열리고 땅과 하늘이 연합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2장부터 12장 까지를 표적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표적의 책은 모두 표적-오해-강해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이 열리게 되는 표적을 행하시면 사람들은 이 땅의 것으로 표적을 곡해하고 주님은 이 표적이 가리키는 바를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번째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입니다. 이 표적은 형식만 남은 죽은 종교인 유대교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와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 형식과 방법으로써의 인간의 행위는 다 배제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만 잔치가 잔치답게 완성이 된다는 은혜의 복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에 대한 두 오해
이 표적 뒤에 오해가 오게 되어 있는데, 이 표적을 오해한 첫번째 사람이 니고데모이고 두번째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니고데모는 혼인 잔치의 완성은 절대 인간의 노력과 자격과 열심을 통해서 이루어 질수 없음을 보여주는 표본의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완성된다는것이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강해되어 집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풀어주시는 그 강해의 결론을 요한복음 3:16에서 정확하게 정리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다른 말로 그분의 보혈이 항아리에 채워짐으로 인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밝힙니다. 그렇게 첫번째 오해가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오해의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모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건데,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을만큼 높이 올라간 사람은 없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진리의 표본이라면, 사마리아 여인은 누구라도 구원을 받지 못할만큼 밑으로 떨어진 사람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진리의 표본인 것 입니다. 완전히 극과 극의 두 표본인 것입니다.
극과 극의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구원이 주어지고 그 은혜를 받을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인간도 없고 그 은혜를 필요로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인간도 없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극과 극의 차이를 갖고 있는 등장 인물들 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어떠한 종파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의 국회의원 정도 되는 정치인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런 지위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대단한 선생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여자였습니다. (당시의 여자들은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아주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또 다른 남자와 동거중에 있었던 부도덕한 여자 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름이 밝혀졌고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도 없이 등장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여러 역사책에 등장하는 높은 가문 소속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족보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큰 부자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가난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니고데모는 남자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인구 계수에도 들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평판을 보호하기 위해서 밤에 몰래 찾아 왔는가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지킬 평판도 없었던 이런 여자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양 극단에 있는 두 사람을 대조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은혜 없이도 구원에 이를수 없으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은혜를 받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결론인 4:42에서 예수는 세상의 구주라고 결론을 맺는 것 입니다. 예수는 부자들이나 똑똑한 사람들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은혜를 입은 세상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가장 큰 차이점
이렇게 많은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한 사람은 표적을 보고 자신의 지식을 근거로 주님을 찾아왔다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 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무엇을 주시는지도 모르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 왔다는 것 입니다. 이게 가장 큰 차이 입니다.
성경은 이 차이를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측의 지식이나 노력이나 능력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부터 예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측에서 찾아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기독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시는 거라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 분의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영생을 부어주심으로 주어지는 것 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3>
타락한 인간은 절대 스스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모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복이 떠나버린 인간은 절대 하늘의 것을 인식하거나 깨달을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사람들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발견할 때, 개 만도 못한 놈,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짐승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라고 하십니다. 소도 임자도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른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이 소와 나귀 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여기고 계신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을 짐승에게 비교하는 것은 짐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이 후에, 하나 같이 다 길을 벗어난 상태가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치우치다라는 단어인 에클리노 (ἐκκλίνω)를 139회나 사용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스스로는 하나님의 길로 돌아올 수 없음을 얘기하는 것 입니다. 이를 잘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에 인류는 그들의 가슴에 뻥 뚫린 공허를 메우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노력을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불렀습니다. 도는 길 도 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를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길을 발견했나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치우쳐 각기 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절대 길을 못찾습니다. 인간 스스로 누구도 그 공허를 메울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한계 밖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의 이성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을 감지할 수 없다! 라고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완전히 깨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려고 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그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부단한 노력들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타난 것들이 선행 체계, 지식 체계, 종교, 이데올로기, 학문, 과학 ,문명, 이런 것들 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道)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4:6에 나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요한 복음 14:6>
이 길이 바로 도(道)인 것 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대단한 말인것 같지만, 도가 사상에서 얘기하는 도는 바로 이 도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엉뚱한 곳을 찾아간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이 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이신 예수가 찾아오는 방법이 아니면 절대로 인간은 찾아 갈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게 길이신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그의 마음에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실때에 인간은 비로소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밖의 것들을 인식할 수 있게되는데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그 무식하고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돌아가서 부끄러움도 다 잊은채 메시아를 전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구원은 이런 것 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요구한적 없는 불가능 했던 어떤 자에게, 길이신 도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 마음을 뚫고 들어가 버린것, 그리고 그 선물이 너무 소중해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것을 버리고 나가서 자기의 선물을 자랑하는 것 입니다.
참 안타깝게도 사마리아의 여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오늘 날 교회는 여기에 무언가가 더 붙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었더니 사마리아 여인이 떼부자가 되었더라! 혹은 팔자가 폈다더라…
하지만 성경은 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복음 뒤에 이런 세상의 유치한 것들을 절대 붙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런것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불가능하고 더럽고 추한, 그리고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요구하지도 않았던 어떤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뚫고 들어와서 그들의 생명을 새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기독교 인것 입니다.
이게 좋아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지, 예수를 믿고 났더니 만사형통, 소원성취, 승승장구가 되더라! 라는 것은 무당 종교인 것 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신앙 고백
눈과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감지한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성도는 여기서 죽어도 좋사오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느니라. <고린도전서 2:12~14>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고단하게 사마리아로 가셨던 것 입니다. 이 여인의 처지나 상황을 바꿔주려고 가신 것 아닙니다. 그녀의 눈과 귀를 열어 영생을 주시려고 가신 것 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린도후서 10:4~6>
하나님은 타락한 이 후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와 선행 체계를 박살내시고 그리스도께 복종 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의 복과 차단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어떤 것들을 쌓아서 도를 찾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절대로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강력을 파해 버리고 눈과 귀를 열어 영생을 허락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 오신 것 입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좋고 기쁘고 감격 스럽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께 땡깡을 피워야 하겠습니까?
신화 같은 말도 안되는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이유
우리가 복음이라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신화와 같은 어리석은 이야기를 믿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오심에 의해서 인것 입니다. 사람이 처녀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며, 물위를 걷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수만명의 사람을 먹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바보 같이 믿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믿게 된거죠? 눈과 귀가 열려서 신령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굉장히 이성적이여서 모든 것을 따져보고 의심해보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믿고 있다니 이게 정말 기적인 것 입니다. 다른 무슨 기적이 필요합니까? 암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는게 뭐가 그렇게 신기 합니까? 저는 제가 이런 사실들을 믿고 있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그 분의 다리를 꼭 붙들고 있는 것 처럼 큰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 세상의 지식인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는 그런 도를 따라 묵묵히 하지만 기쁘게 이 길을 가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도가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 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요한 복음 3장에서 유대교의 최고봉의 인물로 니고데모를 등장시키고 4장에서 모세 언약 체계의 가장 낮은 골짜기인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서 구원에는 인간의 어떤 조건과 자격과 열심도 보태질수 없고 또 그러한 것들로 방해되어 질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또 구원은 인간측에서 찾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이신 예수가 찾아 오셔야 얻을수 있는 은혜의 선물임을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