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쇠하여야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 요한복음 강해 14-2강
지난 번 글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원리와 원칙, 틀과 질서를 깨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세상에서 살아내는 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이 세례 요한 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증거하는 자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자꾸 보여주려고 하는 것 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까지도 세례 요한에게 나아올 정도 였으니까요.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던 세례 요한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엘리야나 또 다른 선지자로 추앙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초청해서 설교를 듣기도 합니다. 헤롯이 비롯 헤로디아 때문에 세례 요한을 죽였지만,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두려워 했습니다. 왕까지 그의 설교를 청해서 들을 정도로 유명하고 존경을 받았던 세례 요한인데,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예수님께 더 많이 가게 됩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위기 의식을 갖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감을 보고 합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이 응답하여 이르되,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분 앞에 보내어진 자라, 한 것을 너희 자신이 증언하느니라. 신부를 얻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그의 말을 듣는 신랑의 친구가 신랑의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나니 그런즉 나의 이 기쁨이 성취되었노라.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27~30>
세례 요한은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이어서 이렇게 얘기한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두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으니 죄에서 벗어날 수 있더라! 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 입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요한이 자신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오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주권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자기의 인기와 권위가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성도의 역할에 대해서 잘 정리하지 못하면 이런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특히 사역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작은일이던 큰일이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커지고 싶고 흥하고 싶기에 불화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다른 사람을 험담해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주를 찬송하여 이르되, 주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는 영원무궁토록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오 주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주의 것이오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니이다. 오 주여, 왕국도 주의 것이오니 주는 모든 것 위에 머리로서 높여지셨나이다. 재물과 존귀가 다 주에게서 나오며 또 주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나이다.
주의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사람을 크게 하심과 모든 사람에게 기력을 주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역대상 29:10~13>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편 16:5~6>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었던 다윗
다윗은 시편을 통해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이미 줄로 그어저 있는것 처럼 예비되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현재의 내 상황이 하나님께서 줄로 그어서 주신 한치의 오차도 없는 그 계획안에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셨건, 가난을 주셨건, 실패를 주셨건, 그것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서 주신 것 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날때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면서 욕을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그의 부하가 시므이를 죽여야 할 지 물어보니까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일지 모르니까 놔두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수 없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신랑이고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고 비유를 들어서 더 높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중에 특이한 것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신랑 친구의 역할 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부를 소개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서 결혼식을 주관하고 신부의 방 앞을 지키다가 신랑이 오면, 신랑을 기쁘게 맞아 주면서 신랑에게 신부를 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신랑의 친구를 쇼시뱅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쇼시뱅이라고 얘기하며 진짜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 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예수님이 흥하여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흥하여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쫓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그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는 나의 쇠함이 있어야 함을 얘기해 주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쇠함을 밟고 그 목적을 이루실 것임을 얘기하는 것 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죽었고 예수님은 그 성도의 죽음을 밟고 올라가 그의 목적을 완성 시키시는 것 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이 있는 자들은 이 땅에서 쇠하는 모습 죽는 모습으로 드러나더라 라는 말 입니다.
죽는게 무엇인가요?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 입니다. 이는 거룩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계명을 지키게 될 것 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드리는 예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일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쇠함의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그것이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말의 진의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께 죽으시면 안된다고 말린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높아져야 자신이 출세하고 떵떵 거리면서 살텐데, 그것 때문에 쫓아 다녔는데,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시자 당신이 그길을 가게 되면 내가 이땅에서 쇠하여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안됩니다! 라고 얘기한 베드로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셨죠?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사탄의 사고 인 것 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다 이런 것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가 가르치는 흥함과 성경이 가르치는 자기부인
여러분들이 잘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세상이 여러분들을 부러워 하며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라고 가르치는 고지론은 결국 내가 쇠하여야 겠다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예수님께, 예수님 제가 이 땅에서 흥할테니까, 당신도 저를 밟고 올라가서 흥하십시오! 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 입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 이루어지려면, 십자가가 완성이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쇠하여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마태복음 16:24>
자기 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 것 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는 말 그대로 죽음 입니다. 너희 십자가를 지고 쫓아오라는 것은 예수님 조차도 자기의 의견과 자기의 소원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간 것처럼 너의 의지, 선택 다 비우고 하나님이 원하는 그길을 쫓아오라는 것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며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해 놓고 너희가 흥하는 길은 너희가 죽는 거야!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선 세례 요한이 자신의 쇠함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 분이 이땅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폭로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스데반은 단순히 우리가 존경해야 할 어떤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을 하다가 가야함을 보여주는 모델인 것 입니다. 꼭 스데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은 다 그 삶을 살다가 간 것 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맞아주고 당해가면서 폭로하여 심판의 근거를 마련하고 맞아 죽는 것 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 입니다.
기독교 교리에 기복 신앙이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삶에 기복 신앙이 들어오고 신비가 들어오겠습니까? 이건 너무 유치한 것들 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하루 하루 죽어가면 되는 것 입니다. 성도들이 죽어가는 길에 선교와 전도가 이루어 집니다. 선교와 전도는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나 스데반이 외치다가 죽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을 통해 일을 하시는 것 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옛 자아, 오염, 죄, 부패성, 집착, 중독 이런 것들이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 없이 선교지로 먼저 달려가는 것은 우리의 흥함으로 예수의 흥함을 이루겠다는 착각 속에 사는지 모르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때나 땅 끝으로 뛰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 자리에서 내가 쇠함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흥하는 삶을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보내실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왜 부르실까요? 이 일들을 통해 우리의 거룩을 훈련시키시는 것일 뿐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너희 중에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가축을 치는 종이 있으면 그가 밭에서 올 때에 그가 즉시 그에게 이르기를, 와서 앉아 음식을 먹으라, 하겠느냐? 도리어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저녁을 먹도록 준비하고 또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기까지 나를 섬기며 너는 그 뒤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 종이 명령받은 일들을 했으므로 그가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노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그 일들을 다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는 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하였나이다,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7:7~10>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무익한 종이라고 칭하십니다. 무익한 종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주인인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쇠함, 우리 옛 자아의 죽음을 이루어 가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 보상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명한대로 했다고 종에게 사례하지 않으십니다. 헌금, 봉사, 전도, 선교,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에 대한 상급이나 사례를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과 능력을 빌려야 할 만큼 약하신 분도 아니시며 우리에게 돈을 빌렸다가 이자쳐서 되돌려 주는 고리 대금업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니까 일을 주시는 것 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고 사례도 없지만, 이 일속에서 우리 자아가 죽고 쇠해지게 되는 것 입니다.
더글라스 맥밀란이 하나님과의 씨름이라는 책에서 성도의 헌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투신과 헌신은 죄인의 가슴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유는 뭘 바래서도 아니고, 하나님께 유익이 되겠지라는 교만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사랑하니까 뭔가 그 분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 입니다. 그냥 우리의 것을 쏟아 드리고 싶은 것 입니다. 이것이 투신이고 헌신 입니다.
요한 복음 31~32절을 보시면 왜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느니라. 그분께서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3:31~32>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이해 시킬수도 없습니다.
위에서 오신 분이 직접 위에서 보고 들은바를 이 땅에서 전했는데도 알아들은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어디서 줏어들은 복음을 갖고 이 땅에서 외친다고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절대로 못알아 듣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실 때에만 가능한 일들 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 증거를 알아듣는 이들이 소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실하다고 하여 도장을 새긴다고 합니다. 여기서 도장을 새기다라는 의미의 스푸라기죠(σφραγίζω)는 밀봉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 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받아들인자들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옳다! 하나님이 참되다 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의미 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 믿었는데, 자식들에게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잘 안되고, 불치병이 생기고, 이래도,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은 “그래도 하나님께서 옳으시고 참되시며 선하십니다!” 라고 확증하고 증명을 하더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그런 일들을 증명하려면 그런 일들이 성도의 삶속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없애주는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옳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이런 일들이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 저는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들인 것 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니까요! “하나님 나에게 꼭 필요하시니까 주시는 거죠?” 라고 하나님은 참되시다! 항상 옳다!라고 인정을 하는 것 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이 구절을 이렇게 의역 했습니다.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옳으시다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세상적으로 봤을때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일은 옳다라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란?
캐나다에 줄타기의 명인인 코크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수많은 관객들과 기자 앞에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자 사람들이 환호를 했습니다. 그때 코크란이 “나는 누군가를 등에 업고도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네 그럼요! 저는 당신이 누군가를 업고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코크란이 “그러면 제 등에 업혀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고 싶으신 분은 나오세요. 제가 업고 건너보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한 아이가 나와서 코크란이 그 아이를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다시 건넙니다.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얘야! 너 무섭지 않았니? 빠지면 죽는데 그 등에 업혀서 건널 용기를 냈니”라고 묻자, 이 아이가 대답합니다.
“저는 제 아빠가 저를 업고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충분히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라고 답합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로 믿는 것 입니다. 이게 예수를 아는 것이고 영접한 것 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내가 위험에 처할수 있지만 당신을 내가 믿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가겠다고 결정하는 것 입니다.
내가 예수를 몰랐을 때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게 이 세상의 삶의 원리 입니다. 죄의 원리! 하지만 우린 이제 하나님의 중심이고 내가 그 하나님을 따라 도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자들은 지금, 벌써,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자 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36>
이 요한 복음의 말씀은 모두 현재형입니다. 우리는 이 현재에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이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고통속에 살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벗어 던지고 쇠하여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흥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때서야 빛을 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