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왕의 신하 – 요한 복음 강해 18강
성경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을 예수님의 두번째 표적(54절)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 2장에는 이미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이 사건을 두번째 표적이라고 불렀을까요?
요한복음 20:30~31에 보면 요한은 “진실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으나 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합니다.
요한 복음에는 딱 7개의 표적만 기록을 했는데, 요한은 이 기록 목적을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 이라고 얘기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 목적을 설명하는 표적 중 가장 중요한 7개의 표적을 골랐는데, 그 중 두번째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십자가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십자가가 달려 있을까요?
기적을 통해 믿는 것과 말씀을 통해 믿는 것
41~42절에는 오늘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전에 있었던 사마리아 에서 예수님은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만을 듣고 믿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을 듣고 믿는 것과 기적을 통해서 믿는 대조를 하기를 원하는 것 입니다. 성경은 무언가를 봐야지 믿는 사람들의 한심한 행태에서 대해서 경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 44~45절에 보면 예수님이 직접 대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은 받지 못한다고 하시지만 바로 다음 구절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 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들 즉 기적을 일으킨 것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2장에도 동일하게 나오는데, 23~24절에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으나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으니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 기적이나 행동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언가를 보고 기적 때문에 믿는 사람들과는 연합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즉 갈릴리 백성들의 영접은 가짜 영접인 것 입니다. 이 세상에는 믿는 다는 사람도 많고, 예수를 영접 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들 모두를 성도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 입니다.
진짜 영접과 가짜 영점
성경은 이 가짜 영접에 대해 분명하게 얘기하는데, 누가 복음 4장에 고향 땅 나사렛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기적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통하여 나아만 장군과 사렙다 여인 즉 이방인 만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자, 그 사람들이 진노가 가득하여 결국 예수님을 낭떨어지에 떨어뜨려 죽이려고 합니다.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이 말씀으로 자신들을 무시하고 믿음 없음을 책망하자, 영접 했다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예수님을 영접 했다는 사람들의 실체 입니다.
이렇게 기적을 바라보고, 기적을 자신들 신앙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살해 할 수 있는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고 저주하고 죽일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어떠 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구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안해주고 오히려 나를 괴롭게 하고 밑바닥으로 몰아 넣는다 하더라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인 것 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도 갖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요?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3>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우리의 소원 성취나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 입니다. 믿음이란 보이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본것 처럼 선명하게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 일까요? 기적을 보고, 체험을 해서 믿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인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안보고 믿는 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 입니다. 외부로 부터 어떠한 능력이 부어져야 가능한 일 입니다. 그렇게 능력을 부음 받은 사람,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인정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전서 1:28~29>
기도 해서 병이 낫고, 기도해서 돈을 많이 벌수 있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믿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하나님을 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특별하고 구분된 사람일 것 입니다.
믿음을 발휘하기 위해 고난에 던져지는 진짜 성도들
그래서 진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질고와 시련에 던져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발휘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는 기도가 무엇인가요? “보여주세요! 증거를 주세요! 왜 내 소원을 안들어 주십니까? 입니다.
진짜 성도들은 이미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실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이는 증거들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병이 기적적으로 낫거나 위기에서 구해지거나, 예언을 받거나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내 신앙 생활에 더 이상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에 기적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뮬러와 함께 활동 했던 유명한 목사님이 찰스 스펄젼 목사님 입니다. 그런데 스펄젼 목사님이 조카의 부탁을 받고 여러 부흥 집회를 다니면서 3,000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조카에게 주려는데 자꾸 마음속에 조지 뮬러 갖다 주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돈을 갖고 조지 뮬러의 고아원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지 뮬러가 고아원 구석에서 “주님 3,000불만 보내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놀라기도 했지만 화도 나서 퉁명스럽게 던져 주며 “여기 당신 기도 응답 왔소!” 라고 하고 갔다고 합니다.
이런건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 것은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이끄시며 건져주시려는 것이지 자신의 욕심에 따라 소원에 따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삶에 있는 진짜 기적이란, 아무리 기도해도 그 병이 낫지 않을때, 당장 내일 먹을게 없는데도, 그럼에도 그 속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왕의 신하를 고치는 사건은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하는 사건 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곳에서 거의 죽게 된 신하의 아들
46절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곳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이 두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는 글 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은 진정한 혼인 잔치의 즐거움은 어떤 것으로도 회복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회복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 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죽은 자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기적 입니다.
그래서 아프다, 병들었다라는 표현 대신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하고, 병이 낫다는 표현 대신 살아났다는 표현을 쓰는 것 입니다. 이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이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린 사건의 공통점을 보시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 3일째 (on the third day)라는 단어가 등장 합니다. 그렇게 필요 없어 보이는 이 단어는 4장에도 등장 합니다. 이틀이 지나고 (after two days) 즉 3일째… 3일이 왜 이렇게 중요 할까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인간의 타락으로 엉망이 된 셋째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흘이라는 단어는 구속과 관련하여 등장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흘이라는 단어 하나로도 두개의 기적이 하나님 백성의 구속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히브리인들은 이 단어를 듣고도 금방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 입니다.
또 두 이적의 공통점은 기적을 구한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시작 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이 기적에서는 왕의 신하를 책망 합니다. 또 두 사건 모두 다 말씀 만으로 이적을 이루 십니다. 그리고 또 두 사건 모두 종들이 이적의 최초 목격자 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공통점은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건 모두 어떻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이야기 라는 것 입니다.
48절에 보면 예수님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신하를 책망하십니다.
기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매
사실 오늘 본문의 비밀은 이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과 동시에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표적이라는 헬라어는 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인데, 자신들이 원하는 욕심을 채우는 기적이란 뜻도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표적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후자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요한 복음 6장에 나오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표적을 보았어야 하는데 표적은 보지 못하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이 있구나 라는 책망입니다.
오병이어는 하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일어날 하늘의 풍요를 나타내는 표적이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 기적만을 보고 열광했던 것 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일으킨 표적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이시며 주이신 것을 설명해서 믿게 하기 위함이기에 예수님이 표적을 봐야 한다고 하신 것 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12:29>
구약에 특히 이사야서에 그리스도가 왔을때 수많은 표적들을 일으킬 것을 예언해 놓았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표적들을 일으킨 것 입니다.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들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이사야 35:5~6>
이는 단순히 치유에 사역을 하실 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포로가 된 영적 소경과 귀머거리와 절름발이인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 께서 해방시키실 거라는 영적 사역을 예언한 것 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이에 대한 상징적인 설명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역시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죽은 우리들을 살리실 것을 상징하는 것 이었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간 왕의 신하
다시 본문으로 가서, 왕의 신하가 내 아이가 죽기전에 자기의 집으로 가자고 부탁하는데, 예수님은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신하는 아마도 굉장히 높은 관직에 있거나 왕의 친척이었을 것 입니다. 그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에 사는 한 초라한 목수를 찾아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비는데 아이를 살리신 것을 보여 주기전에 즉 어떠한 표적을 직접 보여주시기 전에 말씀으로만 너희 아이가 살았다고 알려주십니다.
만약 이 신하가 표적만을 보러온 가짜였다면 엘리사에게 화를 낸 나아만 장군처럼 상당히 화를 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신하는 말씀만 듣고 믿고 갑니다.
이 왕의 신하의 얘기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한 갈릴리 사람들과 대조 되어 기적을 보고 믿으려 하는 사람들과 아울러, 오직 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믿음의 대조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계속해서 표적만을 요구하다가 망하게 되지만 표적을 보지 못하고도 말씀만을 믿고 돌아간 신하에게 그 말씀이 실제로 표적이 되어 실현되고 온 가족이 믿음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는 사건 바로 복음의 이야기 입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표적만을 좇는 자들에 경고하고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지 못하고도 말씀만을 붙잡고 갔던 신하는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지 내가 보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다.
즉 현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지 우리가 보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믿음대로 신앙대로 혹은 기도가 더디게 응답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사는 가운데 이루어 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쪽으로 돌려 응답 해주실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고 언제 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보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을 진짜 신앙,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 입니다.
이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백부장 이야기 입니다. 보통 자식을 낫게 해달라고 하면 집으로 가서 내 자식이 낫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하는데, 백부장의 경우에는 자기의 종을 고쳐 주시되 예수님이 집에 들어 올 필요도 없이 말씀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놀라사 따르던 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내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10>
믿음이라는 것은 말씀에 근거한 것 이어야지, 표적과 이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복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는 신하의 가족들이 믿음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리게 된 것 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복입니까? 저주 입니까?
성도에게 고난이란 것은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열병으로 죽어갈 때 그 가족들은 스스로를 가장 불쌍하고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신하는 주님을 찾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높으신 왕의 신하가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사렛에 목수를 찾아올 일이 있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 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이 커다란 유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고통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됩니다.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간들이 하고 싶은대로 놔두는 것을 저주라고 얘기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의 마음속에서 올바른 욕구가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만 고난이 유익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께 “내 소원대로 하지 마세요.” 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질병, 가난, 전쟁, 기아 같은 것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죽음의 그림자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고통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이렇게 죽을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실존을 경험하게 되고, 그런 경험 속에서 참된 회개가 나올 수 있는 것 입니다.
즉 고난은 회개로 향하게 하는 복된 사건 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인으로써 고통을 감지하는 것은 복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서운 병
성경에 고통을 감지하지 못해서 결국 목숨을 잃는 병이 있는데 그게 문둥병 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자신이 평안한 줄 알지만 그건 착각 입니다. 바람이 불면 눈이 시어져서 눈을 깜빡 거려서 눈물을 흘리게 해야 하는데 문둥병 환자들은 하나도 고통스럽지가 않아서 시력을 잃게 됩니다. 또거운 것을 만지면 뜨거워야 하는데 그걸 못느껴서 화상을 입고, 고통을 느껴야 하는데 느끼지 못해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모르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그 고통을 감지 하지 못하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는 분명히 고통의 감지 고난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고통의 시간들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사건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겁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복된 일들 입니다.
왜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이시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고린도 후서 5:7>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로마서 10:17>
내가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고 주의 길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 자신이 주의 법규들을 기뻐하고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19: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