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완성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값을 치룰 능력이 없었고, 또 죄 값을 치루지 못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망을 이기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망을 이기신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워 합니다. 또 많은 무신론자들과 비평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것이 비이성적인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 기록들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정확하며 사실임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을 버리고 중립적으로 증거를 따라서 확인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성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몇가지 오해들
설명에 앞서 몇가지 오해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입증 혹은 증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입니다. 입증이란 증거를 제시해서 증명하다란 뜻 입니다. 증명이란 어떤 명제나 주장이 참임을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제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증, 증명이라고 했을때, 그 단어의 정의는 일반 상식선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가장 이성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입니다. 부활에 대한 역사성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입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와 기록들을 합리성과 이성에 비추어 가장 사실일 것 같은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며 역사적인 입증이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최선의 추론입니다.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이 쓴 성경은 역사적 가치가 없다거나 증언으로써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 어떤 역사학자도 성경에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에 의해 쓰여졌기에 역사적 사료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난중 일기 같은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알아내는데 역사적 사료 가치가 없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이 글에서도 소개해 드리겠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신약 학자들이 있으며, 그들 중 성경을 역사적 사료 가치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모아져 있는 한권의 책이 아니었으며, 독립적으로 쓰여진 여러개의 기록과 편지들이 이후에 하나로 모여서 비로소 한권으로 되어진 책입니다. 역사적 사료 가치는 누가 썼는가에 상관없이 그것이 실제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압도적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성경이 주장하는 6가지 팩트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팩트: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사실상 모든 학자들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성경외에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기독교인들을 싫어했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보고를 없애기 위해 네로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고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해 미움을 받는 자들이 받는 가장 극렬한 고문을 받았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티베리우스 시대에 우리의 행정관 중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악한 미신은 악의 근원지인 유대 뿐 아니라 전세계에 흉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중심지로 삼는 로마에까지 와서 인기를 얻었다. [^1]
라고 기록하며 성경의 기록을 확증합니다.
십자가 형을 받고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십자가 형에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선 당시 처형 당해야 하는 죄수가 도망가거나 살아난다면 이를 담당하는 군인들은 모두 대신 죽어야 했기에 그들은 죄수들이 확실히 죽도록 했고, 또 물에 불린 채찍 가죽에 동물의 뼈조각을 넣어서 때리는 형벌 후 처형장까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서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세우는 방식은 어떤 사람도 살아날 수 없게 만드는 극도로 잔혹한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 형을 받고 살아난 사례는 단 한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세푸스가 예전에 알 던 세 사람이 십자가 형을 받는 것을 보고 티투스에게 눈물로 부탁하자 그 세명의 처형을 중지하고 그들을 극진히 간호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세명 중 두명은 죽고 한명이 살아난 것이 유일한 생존 기록 입니다. [^2]
이런 증거에 따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성서 비평단체인 Jesus Seminar의 공동 설립자 John Dominic Crossan도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도 확실하다. 만약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십자가 후 100년간 아무 기록을 안남겼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두 역사가를 안다. 그들의 이름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고넬리우스 타키투스 이다.” [^3] 라고 말합니다.
또 무신론자이자 저명한 신약학자인 Gerd Ludemann 역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4] 라고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자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부활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팩트: 예수님은 죽은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네개의 복음서 그리고 외경인 베드로 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 사건은 대다수의 신약학자에 의해 팩트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를 쓴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 지냈다는 것은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자로써 십자가에 처형 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 장사 지낸다는 것은 “나도 반란군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의 이 행위를 담대하다고 표현 합니다.
아리마대의 요셉이 와서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간절히 구하니라.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역시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는 자더라. <마가복음 15:43>
이는 사실 제자들이 했어야 하는 일들 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갔었습니다. 만약 이 내용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인 산헤드린 공회원이 이런 영웅적인 행동을 했다고 기록했을까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분석하는 기준 중에 당혹성의 기준(Criterion of Embarrassment)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자가 기록하기 싫었거나 이 사실을 통해서 당혹스러울 만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많은 신약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장사되었음을 역사적 팩트로 받아들입니다.
무신론/비평가들의 웹사이트인 Infidels.org의 공동 창립자이자 무신론자인 Jeffrey Lowder 역시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묻혔을 확률은 아주 높다! … 크리스챤들이 아리마대 요셉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 [^5] 라고 인정합니다.
또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고, 3일 후에 그 무덤에 시신이 없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하던 저명한 성서 비평가 Bart Ehrman 역시 이후 자신이 관점을 바꾸어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이 정말로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3일 후에 무덤이 비어 있는채로 발견 되었음을 알 수 있다.”[^6] 고 말합니다.
세번째 팩트: 예수님의 시체가 놓여 있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
사흘 째 예수님이 있던 무덤에 시신이 없었다는 복음서의 기록 역시 다수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팩트로 인정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연구로 저명한 종교 철학자이자 변증가 Gary Habermas는 1975년 부터 빈 무덤에 대해 쓰여진 3,400여개의 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75%의 학자들이 빈 무덤이 발견된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합니다. [^7]
왜 신약 학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없었음을 인정할까요? 우선 당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처형 당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주장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는데, 만약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이런 주장은 쉽게 반박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로마나 유대인 지도자가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어 길거리에 공개했다면 이런 소문은 금방 사그러들었을 것 입니다.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역시 무덤이 비어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초대 교부이자 역사가인 저스틴 마터와 터툴리안은 유대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주장했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8장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만약 시체가 무덤에 있었다면 시체를 훔쳐갔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아주 재밋는 사실은 1930년 나사렛에서 발견된 나사렛 비문에는 이스라엘에서 돌무덤에 있는 시체를 훔쳐가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적힌 로마 황제의 칙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 도굴꾼들은 시체가 아니라 무덤에 묻힌 보물들을 훔쳐가기 때문에 시체를 훔쳐가면 안된다는 비문은 아주 이례적인데, 칙령이 내려진 시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와 겹칩니다.
이런 근거들을 통해 저명한 고대 역사가 Paul Maier는 “유대인 비평가들도 기독교인들처럼 돌무덤이 비어 있었음에 동의한다. 다만 그들은 자연적인 설명을 하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비평가들에게서 나온 이런 강력한 증거는 이 사실이 진짜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9] 라고 주장합니다.
빈무덤을 발견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신약 학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음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무덤을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증언이 인정받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의 성은 경박하고 뻔뻔하기 때문이다. 종들의 증언이 인정받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익을 얻을수 없거나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면 아마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10]
여인이 주는 어떤 증거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증언할 수도 없다. 이는 랍비가 인정하는 강도가 여자와 같이 증거를 줄 수 있다. [^11]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의 사회적 위치는 굉장히 낮았습니다. 요세푸스는 당시 여자들이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도 허가 받지 못했을 정도로 여자들의 말은 신뢰받지 못했음을 기록합니다. 또 탈무드는 여자의 증언은 강도와 같은 범죄자의 증언과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만약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 지어낸 얘기였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믿게 하고 싶었다면, 왜 성경의 기자들은 그것을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라고 했을까요? 당시의 문화에 비추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자들의 증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빙성이 없는 얘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 역사학자 Geza Vermes는 “모든 주장을 고려하고 평가했을때, 전통파이던, 자유주의자이던 비평적인 불가지론자이던 역사학자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한 결론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팩트이다. 그것은 예수님께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던 여자들을 낙담하게 했던 것은 시체가 아니라 빈 무덤이다.” [^12] 라고 이야기 합니다.
네번째 팩트: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다!
사실상 모든 역사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신실하게 믿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핍박받고 거의 대부분의 사도들이 순교했음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합니다. 이는 복음서를 포함, 사도행전, 서신서, 초대 교부들의 교회사에 대한 기록 등에 자세히 남아 있습니다.
예를들어 폴리캅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무한한 인내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은 주님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자리에 있다. 그와 함께 있기에 그들은 고난도 함께 당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 라고 기록합니다.
플리캅과 동시대의 교부였던 안디옥 이그나티우스 역시 서기 110년경 로마로 순교하러 가면서 7개의 편지를 썼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으려 함을 기록합니다. 그 중 서머나 교회에 쓴 편지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 왔을 때, 자신을 만져보고 몸이 없는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져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그나티우스는 이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외에도 독립적인 수많은 기록들 특히 동일하게 고난받고 순교당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록들을 통해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들이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20세기 가장 저명한 회의론자 Rudolf Bultmann은 “모든 역사적 비평은 첫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13] “고 인정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Ed Sanders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후에 사도 바울까지) 경험한 부활은, 내 판단에, 팩트이다. 무엇이 이 경험을 하도록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이들이 고의적인 거짓말을 했다는 설명이 타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부활을 봤다는 많은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부활한 주님을 외치며 보냈고, 십수명의 사람들은 이로 인해 죽었다.” [^14] 라고 주장합니다.
또 무신론 성경 비평가 Gerd Ludemann 역시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경험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하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15] 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을만한 어떤 사건을 경험했으며 그들이 이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음을 인정합니다.
다섯번째 팩트: 예수님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저히 풀지 못하는 문제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가장 강력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용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도 바울의 사례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합니다.
신의 한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극도로 미워했던 사울의 회심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신의 한수 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의 한수 –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 특히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의 기록, 또 여러 초대 교부들과 교회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통해 사도 바울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같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했음을 믿었다는 사실은 역사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초대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기록을 믿고 싶지 않다면 “씨저의 생명들”이라는 공개된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네로에 의해 베드로가 십자가 형을 당했고 사도 바울은 목베임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역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순교 당했음을 기록합니다.
페스투스가 죽었고, 알비누스가 부임했다. 그래서 그가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을 소집했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다른 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들이 법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씌우고 돌로 죽이게 하였다. 하지만 가장 공정한 시민들과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싫어했다. [^16]
이에 대해 신약 비평가 바트 얼만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의 처형 이후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역사적 팩트이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살아난 예수님을 봤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17] 라며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봤다고 주장함을 인정합니다.
여섯번째 팩트: 1세기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여섯번째 팩트 역시 사실상 모든 역사 학자들이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당시 기독교의 부흥에 대한 역사 기록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로마의 정치가이자 변호사였던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기독교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합니다.
그들 (기독교인)은 특정한 날을 정해서 날이 밝기 전에 모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를 때는 하나님께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찬양을 부르고 사기, 도둑질, 간음을 행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부정하거나 질문을 받을때 믿음을 부인하지 않기로 엄숙한 맹세를 합니다. 그들은 헤어진 후 음식을 나눠 먹기 위해 다시 모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입니다. [^18]
또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도
이 보고를 없애기 위해 네로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고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해 미움을 받는 자들이 받는 가장 극렬한 고문을 받았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티베리우스 시대에 우리의 행정관 중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악한 미신은 악의 근원지인 유대 뿐 아니라 전세계에 흉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중심지로 삼는 로마에까지 와서 인기를 얻었다. [^19]
라고 기독교인들의 부흥에 대해 기록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유대지방은 물론 이방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퍼진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무에 달린 자 즉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자 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당시 유대인의 개념상 로마를 정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면 메시아가 아니며, 나무에 달렸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을까요?
당시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핍박했으며, 전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말 그대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왜 심지어는 이방인들 까지도 자기들과 상관없는 아주 작은 유대라는 나라에서 반역자로 처형당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까요?
저명한 신약학자 N.T Wright 역시 “역사학자로써,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지 않았다면, 초기 기독교의 부흥을 설명할 수 없다!” [^20] 라고 얘기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부흥은 불가능 했다는 것이죠. 이는 위에 있는 팩트 들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였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또 예수님을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숨걸고 전하고 다녔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신뢰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대신한 다른 사도를 뽑을때 베드로가 얘기한 사도들의 목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다니던 이 사람들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임명하여 우리와 함께 그분의 부활을 증언할 증인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매 <사도행전 1:22>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려 했던 것 입니다.
이 6가지 팩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절대 다수의 역사학자들에게 인정받는 6가지 팩트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6가지 팩트를 통해 왜?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6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추론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 봐야 할 가능성은 이를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주장했던 예수님의 부활! 입니다. 하지만 세속 역사 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그래서 역사 내내 많은 역사학자들이 복음서와 다른 역사서에 있는 내용들을 규합해서 자연적으로 이를 설명해 보려 했습니다. 제자들이 환상을 봤다는 환상 가설, 예수님이 죽은게 아니라 기절했었던 거라는 기절설, 모든 것은 제자들이 꾸며낸 얘기라는 음모설 등 수 많은 자연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가설들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설들은 역사학적인 검증 기준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부활 가설만이 검증 기준을 통과 합니다.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서 부활 가설을 제외한 다른 가설들이 왜 역사학적 검증 기준에 통과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왜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인지에 대해 촛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특히 세속 역사학자들이 부활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와 그 이유에 대한 답변을 같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활 가설에 대한 검증과 세속 역사학자들의 반론
역사학적인 검증에는 크게 4가지의 기준이 있습니다.
설명 범위 (Explanatory scope): 가설이 제시된 모든 팩트들을 다 효과적으로 설명하는가?
설명 능력 (Explanatory Power): 가설이 제시된 모든 팩트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
타당성 (Plausibility): 제시된 가설이 합리적으로 타당한가?
최소한의 임의성 (Ad-hoc): 제시된 가설에 증거가 없는 임의적인 가정이 최소화 되어 있는가?
기본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부활 가설이 3가지 즉 설명 범위, 설명 능력, 최소한의 임의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동의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는 부활 가설은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 후에 그 무덤이 비어 있는채로 발견되었음을 잘 설명합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게 되었는지, 특히 예수님과 크리스천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게 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신약 비평가들이나 세속 역사학자들이 부활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혹은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자연적이지 않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설명은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가의 여부에 대한 가장 큰 그리고 거의 유일한 쟁점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적에 타당성이 있는가를 설명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적은 타당성이 있는가?
저명한 신약 비평가 Bart Ehrman은 역사학자들은 과거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기적은 가장 극도로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가장 극도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은 모순이다. [^17] [^21] 라고 주장합니다.
부활이 낮은 확률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수학적인 반론
지금 Bart Ehrman을 위시한 기적을 역사로 받아 들일수 없다는 주장은 다분히 수학적인 특히 확률론적인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수학적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실제 수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확률이 낮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사건이어야 하는 확률은 아주 높습니다. 이에 대해 수학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2]
우리는 지금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6가지 증거들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Pr (R/E & B) 즉 일반적인 지식과 증거들을 토대로 부활이 사실일 확률을 찾고 있습니다.
R 은 예수님의 부활
B는 일반적인 지식
E는 관련 증거들
Pr (R/B)은 일반적인 지식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일 내부 확률(Intrinsic Probability)을 의미하고, Pr (E/R & B)는 관련 증거들이 일반적인 지식과 예수님의 부활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률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이스 정리 [^23] 를 통해 다음의 확률 공식을 세울 수 있습니다.
Pr (R/E & B) = Pr (E/R & B) x Pr (R/B) / [Pr (E/R & B) x Pr (R/B) + Pr (E/Not R & B) x Pr (Not R/B)]
우리는 자연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확률이 낮다는 Bart Ehrman의 주장은 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역사적으로 인정되는 증거들을 부활 가설이 잘 설명할 수 있는가? 즉 위에 설명한 6가지 팩트들을 부활로 설명하는 것의 설명 능력이 뛰어난가? 라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동의한다는 것 입니다.
즉 위의 공식에서 Pr (E/R & B)는 굉장히 높습니다.
반대로 위에 설명한 6가지 팩트를 부활 가설이 아닌 다른 가설들로 잘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세속 역사학자들은 그렇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William Lane Craig와의 토론 [^22] 에서 Bart Ehrman은 자신이 실제로 일어났을것으로 생각하는 가설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다만 어떤 설명을 해도 부활이란 기적보다는 더 확률이 높을것이라는 관념적인 답을 할 뿐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Pr (E/Not R & B) 즉 부활을 지지하는 증거를 일반적인 지식과 부활이 아닌 다른 가설로 설명할 확률은 굉장히 낮습니다.
그러므로 [Pr (Not R/B) x Pr (E/Not R & B)]은 [Pr (R/B) x Pr (E/R & B)] 보다 낮고 그렇게 되면 베이스 정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날 조건적 확률은 50%가 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수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날 확률이 극도로 낮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수학적으로 거짓이 됩니다.
부활 가설은 자연적 가설이 아니라 초자연적 가설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이 기적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사건의 확률이 낮다는 것은 자연적인 상황에서만 참이 됩니다. 하지만 부활 가설은 예수님이 자연적으로 살아났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로마서 10:9>
즉 생명의 창시자이자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예수님을 초자연적으로 살려내셨다는 것이 부활 가설이 주장하는 바 입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들은 온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이 죽은자를 살려내신것이 불가능한지의 여부를 검토해야 합니다.
즉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입증해야 합니다.
첫번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 하나님이 존재하더라도 죽은자를 다시 살리실수 없다.
하지만 불가지론자인 Bart Ehrman은 역사학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24] 그러므로 Bart Ehrman이나 위 두가지 논거를 모두 입증할 수 없는 역사학자들이 가질수 있는 가장 비평적인 위치는 예수님의 부활이 타당한지 모르겠다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상식적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죽은 사람을 살릴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약 이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한다면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더 낮은 확률의 기적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했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역사학자들은 자동적으로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음을 믿습니다.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확률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10-78,991 [^25] 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낮은 확률로 인해 역사속에 생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들이 내세우는 가설 중에는 환각 가설이란것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글에 설명드리겠지만 수백명의 제자들이 단체로 똑같은 환각을 경험했다는 가설 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화학 작용으로 일어나는 환각이 다수의 사람에게 동일하게 일어날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 시키셨다는 것을 믿지 않기 위해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가설로 세우고 있습니다. 모순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 안된다’는 논거는 여러 관점에서 부정됩니다.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이 6가지 팩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우리는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6가지 역사적 팩트에 대한 부활 가설을 검증해 봤습니다. 부활 가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여러 사람들이 실제로 주장한 바이자, 역사학적 검증 기준을 통과한 유일한 가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과 관념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받아 들일수 밖에 없는 결론입니다.
만약 위 6가지 팩트를 예수님의 부활로 결론내지 않는다면, 왜 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결론 내시겠습니까? 그 어떤 가설도 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전 인류의 죄값을 치룰수 없어서 사망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죄값을 대신 지불하려고 시도하셨지만 실패하셨다는 뜻 입니다. 즉 나의 죄사함도 없고 난 죽어서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7~19>
하지만 우리는 비참하지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던 원수 사망은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지옥이 아닌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